로버트 오언, 그가 없었다면 8시간 노동 가능했을까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사회개혁가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은 웨일스 지방의 가난한 마구 제조공 아들로 태어났다. 열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해야 했지만, 그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19세에 맨체스터의 방적공장 관리자가 되더니, 10년 만에 스코틀랜드 뉴래너크(New Lanark) 방적공장의 공동 소유주 겸 경영자가 됐다.
오늘날로 치면 중학교 중퇴자가 20대에 대기업 사장이 된 셈이다. 자수성가의 전형이랄까. 하지만 오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돈 버는 재주만 있었다면 그냥 19세기판 재벌로 끝났을 텐데, 그는 뭔가 골치 아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윌리엄 헨리 브룩이 그린 로버트 오언. (위키피디아)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다 - 200년 전 심리학 선취
오언의 핵심 사상은 간단했다. 인간의 성격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환경이 만든다. 지금이야 상식이지만, 19세기 초 영국에서 이런 소리를 하면 뭔 소리야? 가난뱅이는 원래 게으르고 술 처먹고 타락한 거지 라는 반응이 돌아올 게 뻔했다.
하지만 오언은 자기 공장에서 실험을 시작했다. 뉴래너크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괜찮은 주택을 제공하고, 노동시간을 하루 10시간으로 줄였다(당시엔 14~16시간이 보통이었다). 아동 노동을 금지하고, 10세 이상 아이들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했다. 술집 대신 도서관과 학교를 지었다.
결과는? 생산성이 올라가고 이윤도 늘었다. 노동자들은 행복했고, 오언은 더 부자가 됐다. 자본가들이 제일 싫어하는 시나리오다. 착취 안 해도 돈 벌 수 있다니, 이거 곤란한데?
뉴타운 성공회 교구 등록부에 있는 로버트 오언의 세례 기록.(위키피디아)
의회에서 망신당한 개혁가
1815년 오언은 의회에 공장법 제정을 청원했다. 10세 미만 아동 노동 금지, 10~18세 노동시간 제한 같은 걸 요구했다. 당시로선 혁명적인 제안이었다.
공장주들의 반응?
미쳤군요. 누가 우리 공장 돌릴 건데? 아이들 없으면 기계 밑에 기어들어가서 실 묶을 사람이 없잖아요!
결국 1819년에 통과된 공장법은 오언이 원한 것보다 훨씬 약한 수준이었다. 9세 미만 아동 노동만 금지됐다. 아홉 살은 괜찮단다. 참 인간적이지 않은가. ㅠㅠ
스코틀랜드 뉴라나크에 있는 로버트 오언의 집. (위키피디아)
미국에서 날린 거금, 그리고 실패한 유토피아
1824년 오언은 미국 인디애나로 건너가 뉴하모니(New Harmony) 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재산 공유, 평등한 노동, 종교와 혼인의 자유 같은 급진적 이념을 실험했다.
3만 파운드(당시 돈으로 어마어마한 금액)를 쏟아 부었지만 3년 만에 망했다. 왜? 일 안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재산 공유래서 왔는데 내가 왜 땀 흘려 일해? 하는 무임승차자들 천국이 됐다. 오언의 아들들까지 아버지, 이거 안 됩니다 라고 말릴 정도였다. 하지만 오언은 포기하지 않았다.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여러 공동체 실험을 시도했다. 다 망했다.
로버트 오언과 벤지 울필드의 명령에 따른 트럭 지불 시스템, 전국 평등 노동 거래소, 1833년 7월 22일.(위키피디아)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씨앗
실패만 한 건 아니다. 오언의 사상은 영국 노동운동의 토대가 됐다. 1833년, 그는 전국노동조합대연합(Grand National Consolidated Trades Union) 을 조직했다. 영국 최초의 전국 단위 노동조합이었다. 물론 이것도 1년 만에 해체됐지만, 씨앗은 뿌려졌다.
더 중요한 건 협동조합 운동이다. 오언의 제자들인 로치데일 선구자들(Rochdale Pioneers, 1844년 설립) 이 세계 최초의 현대적 소비자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오늘날 전 세계 협동조합 운동의 뿌리가 바로 여기다. 오언을 협동조합의 아버지 라고 부르는 이유다.
오언이 구상한 뉴 하모니의 후계자, 뉴 모럴 월드. 오언파 사람들이 설계했지만, 실제로 건설되지는 않았다.(위키피디아)
자칭 새로운 도덕세계 전도사
말년의 오언은 점점 더 괴짜가 됐다. 심령술에 빠져서 죽은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의 영혼이 자기한테 나타났다나 뭐라나. 심지어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과 앨버트 공(Prince Albert, 1819~1861)에게 편지를 보내 제 이야기 좀 들어 보세요 라고 간청했다. 당연히 무시당했다.
1858년 8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언은 자기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장례식에선 종교 의식 없이 그가 좋아하던 음악만 연주됐다. 무신론자답게 갔다.
존 크랜치의 오언 초상화, 1845년.(위키피디아)
공상가인가, 선구자인가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오언을 공상적 사회주의자 라고 불렀다. 칭찬인지 욕인지 애매한 표현이다. 좋은 생각은 하는데 현실성이 없다 는 뜻이랄까. 하지만 오언 없이 오늘날의 노동법, 8시간 노동제, 협동조합, 공공교육 체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의 공상 은 실패했지만, 그 공상이 훗날 현실이 됐다.
영국 역사학자 E. P. 톰슨(E. P. Thompson, 1924~1993)은 오언을 19세기 초 가장 중요한 사회운동가 라고 평가했다. 실패한 공상가가 아니라, 너무 앞서간 개혁가인 셈이다.
1902년 7월 12일 몽고메리셔 뉴타운에 있는 로버트 오언의 무덤에 모인 군중.(위키피디아)
오언이 우리에게 남긴 것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즉 아동노동 금지, 최저 노동시간, 공교육, 협동조합 등은 19세기엔 미친 소리 였다. 로버트 오언은 그 미친 소리 를 했고, 재산을 날리면서까지 실천했다.
물론 그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다. 때로 독선적이었고, 현실감각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가 꿈꾼 세상은 지금도 유효하다. 인간다운 노동, 평등한 기회, 협동하는 사회.
그러니 다음에 협동조합 가게를 보거든, 혹은 8시간 노동제의 고마움을 느끼거든, 웨일스의 가난한 방적공 출신이 꿈꾼 세상을 떠올려 보시라. 그 공상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아동들과 함께 하루 14시간씩 일하며 이게 인생이지 뭐 하고 있을지 모른다.
영국 맨체스터 협동조합 은행 앞에 있는, 오언을 기리는 동상.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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