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이름 뒤에 숨은 조르주 상드, 세상을 다시 쓰다 [사람들] 19세기 파리의 한 살롱에 시가를 입에 물고 남자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선다. 목소리는 분명 여자인데 차림은 신사다. 사람들은 수군거리지만 그 펜 끝에서 나온 소설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보다,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보다 더 많이 팔렸다. 이름은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 본명은 아망틴 뤼실 오로르 뒤팽(Amantine Lucile Aurore Dupin)이다.
조르주 상드(위키피디아)
백작 손녀, 시골뜨기로 자라다
뒤팽은 180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은 귀족 출신, 어머니 쪽은 거리에서 새를 팔던 평민 출신이었다. 양쪽 집안의 자존심 다툼 속에 어린 뒤팽은 시골 노앙의 할머니 댁에서 자랐는데, 평민 아이들과 어울려 말을 타고 들판을 뛰어다니며 자랐다. 열여덟에 결혼했지만 남편은 재산에만 관심이 있었고, 뒤팽은 스물일곱에 두 아이를 남편에게 맡긴 채 파리로 달아났다. 글을 써서 먹고 살겠다는 결심이었다.
토머스 설리가 그린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 1826년(위키피디아)
조르주 라는 가면, 혹은 무기
당시 여성이 자기 이름으로 소설을 내면 으레 사랑 타령이겠거니 취급받았다. 뒤팽은 이 벽을 정면으로 부수는 대신 옆으로 돌아갔다. 남자 이름 조르주 상드 를 내세운 것이다. 1832년 첫 단독 소설 『앵디아나』가 나오자 파리는 발칵 뒤집혔다. 불행한 결혼에 갇힌 여성을 다룬 이야기였다. 상드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갔다. 남자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당시 파리 경찰은 여성이 남장을 하려면 별도의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까지 두고 있었으니, 상드의 옷차림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도발이었던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비슷한 수법을 쓴 이가 상드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영국에서는 메리 앤 에번스(Mary Ann Evans, 1819~1880)가 조지 엘리엇 이라는 이름으로, 브론테 자매가 커러 벨 등의 남자이름으로 작품을 냈다. 본명을 감추고 남자 옷을 빌려 입어야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시대, 이것이 19세기 유럽지성계의 한 단면이었다.
1860년대의 상드 남편 카지미르 뒤드방(위키피디아)
혁명의 한가운데, 그리고 배신의 맛
상드는 책상물림이 아니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혁명이 터지자 곧바로 노앙을 떠나 수도로 달려갔다. 임시정부의 신임을 얻어 통행증을 받았고, 정부기관지 『공화국 회보』의 상당수 호를 직접 썼다. 농민들에게 새 공화국을 설명하고 세금을 내라 독려하는 글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이 시기를 두고 혁명이 세상을 뒤집어 라마르틴이라는 여자와 조르주 상드라는 남자 를 정치무대에 올려놓았다고 농담을 했을 정도다.
그러나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 6월, 새 공화국 정부는 파리노동자들의 봉기를 군대로 짓밟았다. 상드는 이때 프롤레타리아를 죽이는 것으로 시작하는 공화국 따위는 믿지 않는다 는 말을 남기고 정부와 결별했다. 1851년에는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하고 황제자리에 올랐다. 상드는 노앙으로 물러나 펜으로 버티는 내적 망명의 길을 택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1838년에 상상으로 그린 그림. 상드가 곁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쇼팽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한국이 곱씹을 대목
여기부터가 진짜 흥미롭다. 상드의 삶은 두 겹의 거짓을 동시에 폭로한다. 하나는 이름이 능력을 가린다 는 거짓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진지하게 읽히지 못하는 사회에서, 상드는 가짜 이름을 빌려서야 겨우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얻었다. 가면을 벗을 필요가 없어지는 사회, 즉 이름이 아니라 내용으로 평가받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성별을 정치적 갈라치기 도구로 쓰는 일이 여전히 익숙한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다른 하나는 더 묵직하다. 혁명이 성공했다고 외친 바로 그 정부가 두 달도 안 되어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눈 장면, 그리고 그 짧은 자유마저 한 사람의 쿠데타로 통째로 삼켜진 장면이다.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 소식에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왔던 그 밤을 겪은 사람이라면, 상드가 느꼈던 배신감의 결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권력을 쥔 손이 누구의 손인지보다, 그 손이 누구를 향해 칼을 드는지를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교훈은 175년 전 파리에서도, 지금 서울에서도 똑같이 유효하다.
상드는 황제 치하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권력은 사람을 가두거나 침묵하게 할 수는 있어도, 결국 역사의 법정에는 시효가 없다. 가면을 쓰고서라도 끝까지 말한 사람과 칼을 들고 침묵을 강요한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그 법정에 설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샤를 루이 그라티아가 그린 조르주 상드, 1835년경(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