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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일곱 아이 키우며 건반 위에서 열일 한 클라라 슈만

일곱 아이 키우며 건반 위에서 열일 한 클라라 슈만
[사람들]
말문은 늦게 트이고 손가락은 일찍 트이다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처녀 적 이름은 클라라 비크(Clara Wieck)다. 네 살이 되도록 말이 거의 없어 귀가 먹은 게 아니냐는 걱정을 샀다는데, 입보다 손가락이 먼저 트였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 1785~1873)는 피아노선생이자 장사 수완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딸을 가르쳤다기보다 빚어냈다 고 해야 옳다. 클라라는 아홉 살에 라이프치히 연주회장 무대에 섰고, 열두 살에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앞에서 연주하고 기념메달을 받았다. 열여섯에는 직접 지은 협주곡을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이 이끄는 악단과 함께 연주했다. 아버지는 어릴 적 딸의 일기까지 딸의 이름으로 직접 썼다고 한다. 연주 일정, 수업, 일기까지 아버지가 감수한 셈이니 엄마 친구 아들 은 저리 가라, 이쯤 되면 아버지 감독 딸 이다.   클라라 슈만 1857년 초상화(위키피디아) 사위는 안 된다, 제자라면 몰라도 문제는 아버지의 제자로 들어온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과 딸이 사랑에 빠지면서 터졌다. 제자는 키워도 사위는 안 된다는 것이 아버지의 셈법이었다. 신랑감이 술꾼이고 앞날이 없다고 헐뜯으며 끝내 동의를 거부했다. 딸의 연주 수입이 아까워 그랬다는 해석이 붙는 건 자연스럽다. 두 사람은 아버지의 동의를 법원에서 대신 받겠다며 소송을 냈고, 법원은 1840년 혼인을 허락했다. 부부는 클라라의 스물한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식을 올렸다. 건반 앞에서만 이름을 날린 줄 알았던 딸이 법정에서도 아버지를 이긴 것이다.   1835년 클라라 석판화(위키피디아) 여덟 아이와 건반, 그리고 무너진 집 둘 사이에는 여덟 아이가 태어났다. 같은 해 태어난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이 아홉 아이를 낳고 제국을 다스렸다면, 클라라는 여덟 아이를 낳고 건반을 다스렸다. 기저귀와 악보 사이를 오가며 연주여행까지 다녔다. 러시아에서는 한 귀족이 남편 로베르트에게 당신도 음악을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작곡가 남편이 클라라의 남편 으로 불린 순간이다. 시대가 한 번 뒤집힌 셈인데, 정작 클라라 본인은 열아홉 살 일기에 여자가 작곡을 바란 것부터 주제넘다, 해낸 여자가 없지 않나 하는 취지의 글을 적었다. 그러고도 피아노 삼중주 같은 빼어난 곡을 남겼으니, 스스로 쓴 판결문을 작품으로 뒤집은 격이다. 1854년 로베르트가 라인강에 몸을 던졌다가 구조되어 정신병원에 들어갔고, 1856년 그곳에서 숨졌다. 서른여섯 살 클라라 곁에 남은 건 일곱 아이와 생계였다. 작곡은 사실상 접었고, 연주 여행과 제자교육, 남편 작품의 출판으로 살림을 꾸렸다. 아이들은 친척과 기숙학교에 맡기고 길 위에서 보낸 날이 많았다. 이 무렵 스무 살 청년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가 찾아와 평생의 벗이 되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상당수가 사라져 그 속사정은 아는 이가 없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눈을 감은 이듬해 뒤따라 떠났다.   클라라 1839년 석판화(위키피디아) 무대의 풍속을 바꾼 사람 당시 연주회는 청중의 입맛에 맞춘 화려한 재주자랑이 많았다. 유명한 가락을 멋들어지게 엮어 손가락 묘기를 뽐내는 식이다. 클라라는 악보를 외워 연주하고, 곡 자체의 가치를 앞세우는 쪽으로 풍속을 바꾸는 데 앞장선 사람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곡을 무대에 올려 연주가는 청중의 재롱둥이가 아니라 작품의 심부름꾼 이라는 생각을 퍼뜨렸다. 남편이 세상을 뜬 뒤에는 그의 전집을 직접 다듬어 펴냈고, 1878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예순 해가 넘도록 무대에 섰고, 마지막 공개연주는 1891년이었다. 독일은 훗날 그녀의 얼굴을 100마르크 지폐에 새겼다. 생전에 이 집안 돈줄을 쥔 사람이 사후에 진짜 돈에 얼굴을 올린 것이다.   1853년 클라라(위키피디아) 한국에서 곱씹을 것들 첫째는 돌봄이다. 클라라가 홀로 감당한 병든 남편과 어린자식은 오늘 한국가정의 모습과 겹친다. 치매부모와 아픈 배우자를 가족이 떠안다 무너지는 일이 해마다 뉴스에 오른다. 돌봄을 가족의 사랑 이라는 말로 개인에게 떠넘겨 온 사회가 이제 값을 치르는 중이다. 돌봄은 사랑으로 버틸 일이 아니라 제도로 받칠 일이다. 둘째는 이름 지우기다. 누구의 아내 , 누구의 딸 로 불리며 가려진 여성의 업적이 한국에도 수두룩하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끊기는 일도 여전하다. 클라라의 작품이 되살아난 것은 사후 한참 뒤, 누군가 묻힌 악보를 다시 꺼내 연주하면서부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사라진 여성예술가와 학자의 기록을 지금 부지런히 발굴하는 일이다. 셋째는 기록이다. 클라라는 남편의 작품을 모아 전집으로 엮어 유산을 지켰다. 기록은 남이 대신 남겨주지 않는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이후 증거와 증언을 모으고 지키는 일, 시민이 기록을 직접 모아 책으로 남기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다. 내버려 두면 기억은 가해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넷째는 무대의 품격이다. 청중의 환호를 좇는 재주자랑 대신 작품자체로 승부하는 길을 택한 것처럼, 정치도 짧은 영상 한 편의 반응에 일희일비하기보다 내용으로 평가받을 때가 되었다. 인기에 영합하는 쇼는 한 철이지만, 제대로 닦은 작품은 백 년을 간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클라라는 아버지와의 소송에서 이겼고, 사후에는 잊힌 작품을 되살려 낸 시간이라는 마지막 재판에서도 이겼다.   클라라와 로베르트 슈만, 『유명 작곡가들과 그들의 작품』(1906년)에 실린 삽화(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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