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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시대는 변해도 ‘백마’는 여전히 달린다

시대는 변해도 ‘백마’는 여전히 달린다
[사회혁신]
대한민국은 어떤 희생 속에서 세워졌는가.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러한 희생에 당당하게 답할 수 있는 주권국가 노릇을 하고 있는가. 이런 묵직한 질문을 정면으로 던지는 문제 소설 『박수와 백마』(문학과행동, 2026년 5월)가 출간됐다. ‘80년 해직 기자’ 출신 전진우 작가의 이 신작 장편소설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격동기였던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실존 인물인 미군 장교 제임스 H. 하우스만과 허구의 인물인 사내 무당(박수) 오천수의 궤적을 교차시키는 ‘팩션(Faction)’ 소설이다. 제목에서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민중의 기저에 흐르는 샤머니즘적 세계관을 대변하는 ‘박수’ 오천수와, 미국 및 양키를 은유하는 ‘백마’ 하우스만을 두 축으로 삼아 독립적으로 서사를 전개해 나간다. 두 인물은 처음에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듯 보이지만, 소설이 진행될수록 이들의 삶은 하나의 역사적 소용돌이 안에서 서서히 중첩된다.   한국 대통령의 눈에 미군 대위의 군대로 비친 한국군 논픽션의 주인공인 하우스만은 1946년 스물여덟의 나이로 한국에 파견되어 국방경비대 창설과 군 조직 정비를 주도하며 ‘대한민국 국군의 아버지’라 불렸던 실존 인물이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대위, 소령에 불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승만 정부부터 박정희 정부에 이르기까지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권력의 핵심이었다. 소설은 그가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 진압, 군부 내 좌익 세력 숙청을 주도하고 기획하는 등 한반도 내 냉전 체제 구축의 산파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반면 픽션의 주인공인 오천수는 열여섯 살에 무병을 앓고 가족에게 버림받은 하층민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분단과 전쟁이라는 가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산 사람은 살아야 해”라며 끈질기게 버텨낸 이 땅의 평범한 백성을 상징한다. 처음에는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인물의 이야기는 서사가 진행될수록 밀접한 연관성을 띠며 맞물려 들어간다. 그리고 결말부에 이르러 무당 용화가 오천수의 아들인 길남의 여수 집을 찾아가고, 그가 4·3 사건과 여순 사건, 한국전쟁에 연루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음이 극적으로 드러나면서 두 서사는 마치 박격포탄이 낙하해 폭발하듯 하나로” 합쳐진다. 특히 이 소설에서 한국과 미국의 지배·종속 관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압권은 이승만 대통령과 하우스만의 한국군 열병식 참석 장면이다. 사열대 앞을 지나는 군인들을 보며 이승만이 미스터 하우스만, 당신의 군대가 자랑스럽겠군요”라고 하자, 당황한 하우스만이 이 군대는 대한민국과 당신의 군대입니다”라고 답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웃으며 아니요, 이 군대는 당신의 군대입니다”(229~230쪽)라고 응수한다. 이는 오천수라는 한 개인의 비극적 삶 배후에 하우스만으로 표상되는 미국의 거대한 힘이 짙게 깔려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늘의 손이 팩트와 허구로 짜내려간 80년 전의 비극 이 작품을 집필한 전진우 작가는 1949년생으로,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기자로서 신군부의 검열에 반대하고 제작 거부 활동을 벌이다 강제 해직된 뼈아픈 이력을 지닌 언론인이다. 1987년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갑오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동백』과 월남전과 한국전쟁을 다뤄 류주현문학상을 수상한 『그대의 강』에 이어 이번 『박수와 백마』를 출간함으로써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꿰뚫는 역사 소설 3부작을 완성했다. 오랜 기간 언론계에서 진실을 좇았던 작가는, 역사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대한민국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가”, 오늘의 국가는 누구의 희생 위에 세워졌는가”라는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작가는 오천수의 서사는 허구의 인물이 끌고 가는 삶의 궤적을 묵묵히 따라가면 되지만, 실존 인물 하우스만의 이야기는 철저한 팩트와 역사적 맥락, 그리고 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해석의 관점이 반드시 요구되는 작업이었다”라고 말하며, 조지워싱턴대 리처드 손턴 교수의 저서 등 여러 사료를 섭렵하며 미국의 한반도 프로젝트를 날카롭게 해부해 냈다고 밝혔다. 작가는 최근 동료 언론인들과 함께한 출판 기념회의 인사말에서 집필 과정의 소회를 밝히며, 여담이지만 이번 소설을 쓰는데 윤석열이 큰 장애물이었다. 그 자 때문에 거의 반년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했다”라고 토로했다. 이는 작가가 과거의 역사를 단순히 지나간 일로만 치부하지 않고, 현재진행형인 정치·사회적 현실과 치열하게 연결지어 호흡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설이 다루는 시대는 80년 전이지만, 그것을 쓰는 손은 오늘의 시국 한복판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개인과 권력의 충돌이 폭발적으로 드러낸 억압의 구조 이 소설이 지니는 가장 큰 문학적, 역사적 의미는 개인의 미시사와 거대 권력의 거시사를 충돌·대치시킴으로써 분단과 억압의 구조적 모순을 입체적으로 조명해 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단순히 과거의 비극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한을 동북아 반공 체제의 최일선 기지로 삼으려 했던 미국의 비민주적이고 인종적인 통치 방식을 고발한다. 문상길-제주 4·3 당시 미군정의 강경 진압 노선에 반발해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하고 처형당한 국방경비대 중위-이 처형된 뒤, 하우스만이 그 주검의 머리에 확인 사살을 가하고, 민간인 학살을 녹화해 교재로 썼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러한 구조적 폭력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한 개인의 죽음조차 온전히 애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진압 교재로 소비되는 이 장면은, 소설 전체가 고발하려는 폭력의 본질-인간을 통치 기술의 재료로 다루는 시선-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놀랍게도 분단 8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이 소설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최근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제이비어 브런슨이 한국은 중국 사이에 떠 있는 항공모함”, 한국은 중국을 향한 단도”라고 거침없이 발언한 것은, 한국을 대하는 미국의 전략적 시각이 하우스만 시대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오늘의 브런슨 사령관은 하우스만의 재림과도 같으며, 소설 속 오천수와 주변 인물들이 겪은 참상은 미국이 짜놓은 지정학적 대립 구도 속에서 오늘까지 고통받는 한국 민중의 현실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소설 제목이 다시금 무게를 얻는다. 무당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백마는 늙지 않고 여전히 같은 자리를 달리고 있다.   여순사건 당시 박정희(맨 왼쪽)와 함께 있는 하우스만(왼쪽에서 세 번째 서있는 이) 제주 4.3과 여순과 한 덩어리인 일본 미군정의 ‘역코스’ 문학평론가 전상기의 말처럼, 이 소설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가치 평가가 끝난 표본적 사실(하우스만)과 소설적 허구(오천수)를 교묘하게 엮어 상승시키는 미학적 전략을 훌륭하게 성취해 낸 문제적 소설이다. 독자들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역사적 실존의 무게와 소설적 재미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일본 사정을 약간 아는 나로서는 아쉬운 대목도 있다. 작품이 한국 현대사의 내부적 모순과 미국의 개입을 탁월하게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을 동아시아 전반의 역학 구도, 특히 일본에서 벌어진 미군정의 ‘역코스(Reverse Course)’ 정책과 연동하여 다뤘다면 당대의 시대 흐름을 더욱 현실감 있게 묘파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1940년대 후반 중국 대륙의 공산화가 임박하자, 맥아더가 이끄는 일본의 미군정(GHQ)은 일본의 민주화 노선을 폐기하고 우익 세력을 부활시켜 일본을 ‘아시아의 반공 기지’로 만드는 역코스 정책으로 급선회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 내 개혁파인 민정국(GS)과 반공 치안을 우선시한 참모2부(G2)가 치열하게 대립했으나, 결국 찰스 윌로비가 이끄는 참모2부가 승리하며 좌익 숙청이 본격화했다. 이러한 동아시아 반공 기지화의 본보기로 희생된 것이 바로 재일조선인들의 한신교육투쟁(1948)이었다. 일본 내 좌파 한국인들이 중심이 된 민족학교를 폐쇄하라는 명령에 반발해 일어난 저항에 대해, 당시 맥아더 총사령관과 제8군 사령관 로버트 아이켈버거 중장은 패전 후 유일하게 비상사태(계엄령)를 선포하고 미군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해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오사카와 고베에서 3천 명이 넘는 재일동포가 체포되고, 열여섯 살 소년 김태일이 총탄에 숨지는 비극이 발생했다. 하우스만은 갔지만 여전히 달리는 백마, 누가 멈추게 할 것인가 이처럼 미군정이 주도한 일본에서의 재일 민족교육운동 탄압과, 한반도에서의 제주 4·3 및 여순 사건은 결코 분리된 사건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당시 미국이 주도한 냉전 질서와 ‘역코스’는 거대한 동아시아 퇴행 정책의 톱니바퀴 속에서 맞물려 벌어진 거시적 국가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에서 울린 총성과 오사카에서 울린 총성은, 지도 위의 거리는 멀어도 같은 설계도 위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재일 작가 김석범의 소설 『화산도』에서 제주 저항운동과 일본 재일동포 사회의 연계가 부분적으로나마 다루어졌듯, 『박수와 백마』 역시 한반도 내부의 비극을 넘어 미군의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패권적 기획으로 시야를 넓혔더라면 훨씬 더 거대하고 입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확보할 수 있었을 테다. 이는 이 소설의 결함이라기보다, 이 소설이 열어놓은 질문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하우스만은 1996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짜놓은 냉전의 틀, 그리고 그 틀 위를 여전히 달리는 백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세월은 몇 번이고 변했지만, 한반도를 바라보는 강대국의 시선과 그 시선이 요구하는 군사적 배치는 놀라울 만큼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앞으로 전진우의 신작 소설을 디딤돌 삼아, 후학 소설가와 학자들이 이러한 동아시아적 연대와 억압의 사슬을 더욱 치밀하게 궁구하여 밝혀내는 작품을 생산하길 기대해 본다. 백마가 언제쯤 걸음을 멈출 것인지, 아니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이는 결국 누구인지, 이 질문이야말로 『박수와 백마』가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독자에게 남기고 가는 숙제라고 할 수 있다.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ohtak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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