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평화공존의 길로 가는 국호 ‘한국’과 ‘조선’ [뉴스] 정치의 출발점은 ‘이름을 바로잡는 일(正名)’이라는 공자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논어』 자로(子路) 편에서 공자는 정치를 맡기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라는 물음에 단호히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라고 답했습니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나라의 일 또한 제대로 설 자리를 잃기 때문입니다.
정명(正名)의 눈으로 본 ‘조선’ ‘천황’ 호칭 논란
외교에서 상대를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는 단순한 예의나 의전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대방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고도의 전략적 행위입니다. 최근 정치권과 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북한의 정식 국호 호칭을 둘러싼 논란 역시 ‘정명’의 잣대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달 초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남북이 서로가 원하는 이름을 불러주자며 북한의 공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약칭 조선)’ 사용을 한반도 평화공존 발전 구상의 첫걸음으로 제안했습니다. 상대를 등신대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파탄 난 남북 관계를 복원하고 평화공존으로 나아가는 마중물이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러나 보수 진영은 이를 두고 ‘통일 포기론’이라며 낡은 색깔론 공세를 폈고, 이재명 대통령도 우리의 선의대로 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에 정말 플러스인지 의문이 든다”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정 장관도 통일부가 끌고 갈 일이 아니라 선 공론화가 먼저”라며 한발 물러섰습니다. 옳은 방향으로 내디딘 첫걸음이 여론의 눈치 앞에서 주춤한 셈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외교부·통일부·국방부·국가보훈부 등에 대한 부처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6.8.5. [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그사이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조·미 직거래 정상회담 가능성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당사자인 한국을 건너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조선이 이미 ‘적대적 두 국가론’을 선언하며 남북 관계를 통일이 아닌 별개 국가 간 관계로 규정한 상황에서 이를 애써 외면하고 예전처럼 ‘헤어지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완고함은, 오히려 우리 외교의 활동 공간을 좁히고 조선에 빌미만 주는 자충수가 되는 건 아닌지 냉정히 따져보아야 합니다.
남북 정상회담의 길 열었던 김일성 ‘주석’ 호칭
호칭은 상대와 관계와 시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적대감이 깊을수록 호칭은 격하되고 편협해집니다.
과거 한국 사회는 ‘북괴’라는 극단적인 용어에 갇혀 있었습니다.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과 함께 남북 화해 차원에서 금기를 깨고 ‘김일성 주석’이라는 공식 직함을 처음 썼을 때, 보수세력이 ‘빨갱이 신문’ 운운하며 반발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그대로 인정했던 그러한 작은 용기가 있었기에 훗날 남북 고위급회담과 정상회담의 길도 열릴 수 있었습니다.
일본 미디어 역시 1990년대 후반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그들의 공식 국호를 병기했으나, 1998년 일본 열도를 통과한 대포동미사일 발사와 2000년 초 납치 사실 확인을 계기로 반조선 여론이 거세지면서 ‘북조선’이란 단독 표기로 되돌아갔습니다. 호칭을 깎아내려 적대감을 재생산한 대표 사례입니다.
일본 국왕 호칭을 둘러싼 논란도 궤를 같이합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이래 한국 정부의 공식 표기는 ‘천황’이지만, 대다수 미디어와 시민들은 여전히 ‘일왕’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극심한 한국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양쪽 진영의 의견이 일치한 용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식민 지배를 자행한 침략국의 군주를 ‘하늘의 황제’로 부를 수 없다는 민족적 정서와 역사적 피해의식이 그만큼 강고합니다. 과거 식민지 지배를 부정하고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자세에 비춰볼 때, 그런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다만 일본과 가장 사이가 나쁜 중국조차 정부와 관영 매체에서 ‘일황(日皇)’으로 표기하고 있는 사실은, 한국 사회의 호칭 방식이 옳은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국력에서는 일본을 바짝 따라잡았다고 자평하면서 정작 상대국이 스스로 부르는 이름 앞에서는 여전히 식민지 피해의식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정 ‘천황’이란 용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이원복 교수 등이 제안했듯 ‘파라오’나 ‘차르’처럼 ‘덴노(Tennō)’로 음차 표기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합니다.
6·15 공동선언 등 100여 건 공식문서에 이미 ‘조선’ 명기
상대를 존중하며 이름을 불러준 선례는, 이미 남북 간의 교류 역사 속에 많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서명란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양쪽의 공식 국호가 나란히 새겨졌고, 노태우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정식 구호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남북이 맺어온 100여 건의 공식 문서 속에서 국호 병기는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1995년 한국기자협회 등 언론 3단체가 제정한 보도 준칙 1항에서도 상대방 국호를 불러주자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올해 5월 수원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 여자챔피언스리그 기자회견장에서 조선의 내고향팀 감독이 ‘북측’ 대신 정식 국호를 불러달라며 기자회견장을 박차고 떠난 일화는, 현시점에서 조선이란 호칭이 갖는 무게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남북 평화와 공존을 외치면서 상대의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않으려는 태도로는 어떤 변화나 반응도 끌어내기 어렵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1일 노동당 중앙간부학교 창립 80주년 기념행사에서 2025-2026 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우승팀인 내고향팀 리유일 감독과 악수하며 격려하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2026.6.2. 연합뉴스
북한을 ‘조선’으로, 일본 군주를 ‘천황’ 또는 ‘덴노’로 부르는 것은 결코 굴종이나 양보가 아닙니다. 적대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 그리고 현실주의에 근거해 외교를 펼쳐나가겠다는 주권 국가의 성숙한 선언입니다.
정명이야말로 꽉 막힌 남북 관계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쉽고 실천적인 출발점입니다. ‘앞마당을 같이 쓰는’ 한일 간에도 더욱 연대를 굳게 다질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상대를 대접하는 상호주의의 기본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평화와 화해, 우호의 문도 열릴 것입니다.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마침, 9월 19일부터 10월 4일까지 일본에서 제20회 아이치·나고야 하계 아시안게임이 열립니다. 일본 땅에서 한국팀과 조선팀이 함께 참가하는 하계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건 1994년 이래 32년 만입니다. 자연스레 재일동포를 중심으로 남북 양쪽을 각기 또는 공동으로 응원하는 일도 벌어질 것입니다.
모처럼 만에 남북과 일본이 같은 공간에서 만나는 이번 대회가, 조선 국호와 일본 군주 호칭을 둘러싼 논란을 한층 성숙하게 정리하는 좋은 계기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저는 북한을 ‘조선’, 일본 군주를 ‘천황’으로 부르자는 데 기꺼이 ‘한 표’를 던지겠습니다.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ohtak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