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종언 고한 날…김민기, 기타치며 상록수 불러 [사람들] 1979년은 사방이 불길이었다. 억압을 태워버릴 불길, 유신을 집어삼킬 불길이 사방에서 밀려왔다. 사면초가 속에서 박정희 정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도 써먹어 이제 약발이 다 떨어진 공안 조작과 공포 분위기 조성 그리고 폭력뿐이었다.
그해 4월 강원용 목사가 이끌던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먹이가 됐다. 더는 우려먹을 게 없어 교회까지 친북, 용공 혐의로 엮기 시작한 셈이었다.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과 사회 변화를 바라는 정치‧경제‧사회 엘리트 사이를 매개하려는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중간 집단 육성’을 ‘이적’으로 조작했다. 유신체제가 자멸하기 직전인 10월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라는 거창한 사건을 터트렸다. 북한의 지시를 받아 도시 게릴라전과 폭력혁명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84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조작과 공포와 폭력으로 시민과 노동자를 겁박할 수 없었다. 종교인의 양심을 침묵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해 5월부터 10월까지 정권은 가톨릭 및 개신교 그리고 농민들과 치졸하고도 더러운 싸움까지 벌였다. 이른바 ‘중앙정보부에 의한 오원춘 납치 감금 사건과 진술 조작 사건’이 그 시작이었다.
경북 영양에서 감자 파동이 일어났다. 중앙정보부가 가톨릭농민회 활동가인 오원춘을 납치 감금하고 진술을 조작하려 했다. 가톨릭과 결합한 농민들의 분노와 저항의 기세를 꺾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과 농민은 겁먹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납치, 감금, 조작 사실까지 제기하며 정권과 정면으로 맞섰다. 이제 그들에겐 두려울 게 없었다.
1979년 8월 9일 YH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고 있다. 1979년 8월 연합뉴스
1979년 시민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먹고사는 문제였다. 1974년 1차 석유파동 이후 정부가 주도한 중화학공업 과잉 중복투자는 시민들의 먹고사는 경제를 크게 위축시켰다. 2차 석유파동과 함께 지구적인 경기 침체까지 겹쳐 한국경제는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국가부도였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그들이 요구하는 긴축, 고금리 등 ‘경제안정화정책’을 수용해야 했다. 중소기업, 봉급 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을 쥐어짜는 정책이었다. 특히 고금리 정책은 노동자를 압도적으로 많이 고용하고 있던 중소기업을 한계 상황으로 내몰았다. 부도율과 실업률이 역대 최고치로 솟았다.
딴 주머니를 차고 있던 기업주는 버틸 만했다. 문제는 그런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였다. 그 숫자는, 그리고 그 절박함은 민주주의에 대한 학생 시민들의 목마름과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시점부터 유신체제를 위협하는 최대의 뇌관으로 떠오른 건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이었다.
‘대학가 시위는 이미 사형이나 무기징역으로도 막을 수 없게 되었는데, 거기에 노동자까지 가세한다면….’
정권은 노동계로 번지기 시작한 불길을 잡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쥐꼬리만 한 임금조차 못 받고 일터에서 쫓겨나는 노동자들의 분노를 막을 순 없다. 그들의 분노는 바싹 마른 숲에서 숲으로 옮겨붙은 산불처럼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다. 한쪽을 겨우 잡으면 거기서 튄 불꽃이 여기저기 옮겨붙어 곳곳에서 새로운 주불로 발화했다. 동일방직 똥물 사태에 이어, 유신체제 자체를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낸 ‘YH무역 사건’은 상징적이었다.
가발은 60년대부터 70년대 초중반까지 수출 효자 품목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기울기 시작해 1970년대 후반에는 이미 사양 산업이 되었다. 기업주들은 돈을 벌어들이긴 했지만, 생산 설비를 고도화하거나 부가가치 높은 제품을 개발하는 등 경쟁력을 강화하는데 재투자하지 않았다. 오로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등 노동자의 고혈을 짜내는 것에만 의존했다. 사양화는 피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보다 인건비가 더 싼 후발 개발국의 도전이 거셌다. 여기에 2차 석유파동으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미국 등 주요 수입국이 경기 침체에 빠져 수출 길이 막혔다. 가발, 섬유 등 저임금에 기댄 한국의 수출 산업은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기업주들은 ‘먹튀’할 궁리뿐이었다.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아쉬울 게 없는 이들이었다.
이런 한계 기업의 주력 노동자는 여성이었다. 이들은 집안에서 단순한 ‘한 사람’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당시 ‘남자아이들은 누나가 번 돈으로 학교에 다닐’ 정도로 여성 노동자들은 집안 살림의 기둥이었다. 그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해 정당한 대우를 받으려 했고, 사용자는 이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든든한 뒷배 노릇을 해온 정권의 물리력만 믿었다.
직장폐쇄, 폐업 따위가 잇따랐다. 청춘의 밤을 하얗게 밝히며, 고도성장을 견인했던 ‘공장의 불빛’이 꺼져가자, 여성 노동자들은 더는 물러서지 않았다. 생존의 벼랑 앞에서 이들은 오랫동안 참고 견뎠던 분노를 터트렸다.
YH무역은 1966년 설립됐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노동자 4천여 명에 국내 기업 가운데 수출 순위 15위에 이르는,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체였다. 이런 급성장은 생계비나 겨우 충당할 수 있는 초저임금과 하루 12시간 이상, 용변 보는 것도 통제하며 부려 먹은 여성 노동자의 착취 덕택이었다.
노동자들은 참다못해 노동자를 대변할 노동조합 결성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그러나 정부의 비호 속에서 자행된 기업주의 방해와 폭력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1975년이 되어서야 정부와 기업주의 방해 공작을 뚫고 조합 결성에 성공했다.
사용자는 주는 대로 받던 노동자들에게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멋대로 강요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 ‘무지렁이’들과 마주 앉아 임금협상을 하고, 또 근무 형태 및 복지 문제를 협의해야 한다는 게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가발 산업은 수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용자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동자를 강제로 퇴사시키고, 일감을 하청에 맡겼다. 노조가 반발하면 위장 휴업을 했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다 결국 1979년 3월 29일 공장폐쇄와 종업원 5백여 명에 대한 해고를 예고했다.
노동자들은 농성에 들어갔다. 동일방직 사태를 지켜봤던 학생과 시민사회가 연대해 사회문제화하기 시작했다. 기업주의 시커먼 비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영진은 5월 노조와 정상화 약속을 하고 공장 문을 열기로 했다가, 7월 기습적으로 폐업 선언을 했다. 공장 문을 걸어 잠그고, 열쇠를 깡패 조직이나 다름없는 경비 용역회사에 맡겼다. 오갈 데 없었던 노동자들은 기숙사에서 철야농성을 하다가 8월 9일 서울 신민당 중앙당사 강당으로 농성 장소를 옮겼다.
경찰은 11일 기동대를 신민당사에 투입했다. 신민당 당직자와 당원들이 저지했지만, 노동자 172명을 연행하고 농성을 강제로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 씨가 경찰 체포조를 피하려다 강당 창문 밖으로 떨어져 숨졌다(8월 11일). 경찰은 김 씨가 손목동맥을 끊고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신민당은 경찰의 폭력적 침탈에 항의해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김영삼 총재의 비서 김덕룡은 ‘YH 백서’를 제작해 시민사회에 배포했다. 정권의 꼭두각시 사법부는 김덕룡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김영삼 총재 등 신민당 총재단에 대한 직무 정지 가처분을 인용했다(9월 8일). 김영삼과 제1 야당에 대한 파괴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자 김영삼은 와의 기자회견(9월 16일자)을 통해 이렇게 맞섰다. 이란 팔레비 정권 붕괴의 전철을 밟지 말라.” 그해 2월 이란의 철권 독재자 팔레비 정권이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으로 몰락하고, 팔레비는 미국으로 도주했다. 박정희와 유신체제를 그런 팔레비에 빗댄 것이다. 게다가 김영삼은 한국에 대한 원조 제공을 중단하고 한국 정부에 민주화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취하라”고 미국 정부를 압박했다.
YH 무역 여성노동자 신민당사 농성과 김영삼 총재 제명으로 촉발된 정치 충돌은 대정부 투쟁으로 비화됐다. 사진은 1979년 10월 부산 서면 일대를 가득 메운 부산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16일부터 시작된 부마항쟁 열흘후에 18년 박정희 독재 정권은 막을 내렸다. 사진출처: 시빅뉴스 (김돈탁씨 제공)
정권은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딱히 쓸 칼이 없었다. 자신을 벨 수 있는 양날의 칼이라도 동원해야 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의 발언이 ‘국가 모독’이라며, 공화당과 유정회를 동원해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을 날치기 처리했다(10월 4일). 이에 맞서 신민당 의원 79명은 전원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10월 13일).
YH 노동자의 쟁의에서 비롯된 충돌은 정치적 충돌로 확대됐고, 정치적 충돌은 순식간에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대정부 투쟁으로 번졌다. 부산에선 10월 16일 해방 이래 최대 규모라는 부산대생 5천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그들이 가투를 벌이는 동안 다른 대학 학생과 시민들이 동조해 경찰이 손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18일부터는 마산에서도 수출공단 노동자와 시민들이 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순한 시위를 넘어서 공화당사, 파출소, 방송사, 신문사 등을 공격했다.
10월 18일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 시내에 탱크와 함께 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된 모습. 사진출처: 대한민국정책브리핑( 촬영: 전광삼 전 부산일보기자, 제공: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박정희는 다시 한번 부산에 계엄령을, 마산에는 위수령을 선포해야 했다. 정권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형수의 소개로 친척 집에 잠시 머물던 김민기는 1979년 2월 14일 석암리 21번지 이완우 씨 댁 문간방으로 옮겼다. 지금의 익산 제2 일반산업단지가 있는 곳이었다. 익산에서 삼례 행 버스를 타고 30분쯤 가면 도착하는, ‘돌바우골’로 불리던 곳이었다.
불현듯 내가 태어나기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묻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내가 농사지었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외람된 말이고, 나는 그저 농사짓는 흉내만 냈다. 내가 가겠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반(半) 강제적인 것이었다. 핑계 같지만, 당시 서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상적이라면 미술이나 음악을 해야겠지만, 무엇도 할 수 없었고 또 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먹고는 살아야겠고, 그래서 농사를 짓게 된 것이다.”(월간 1987년 8월호 인터뷰)
김민기가 1978년 겨울 고향 익산으로 내려가 농삿일을 배웠던 석암리 살림집. 월간 마드모아젤은 1987년 8월호 사진설명에서 김민기가 처음으로 농촌 생활을 경험한 익산 집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월간 마드모아젤 제공)
마침 정월 대보름이 지나고 농사 준비가 한창일 때였다. 이웃 농가의 농기구도 손 보고, 파종할 씨도 챙기고, 논밭에 퇴비도 뿌리고, 마른 잡초가 많은 곳엔 쥐불도 놓아 벌레와 잡초씨를 태웠다. 5월 영농철이 되자 이 씨의 주선으로 마을 공동 작업장에 나가, 모판에서 모를 찌어 논으로 나르기(모쟁이)도 하고, 논에 미리 농약을 치기도 했다. 한여름에는 논이나 콩밭에서 김을 맸다. 농사꾼 수련기였다.
그런 삶이 김민기에겐 그렇게 속 편했던가 보다. 마음도 부풀었다. 연립주택 짓던 공사장에서 막노동하면서 절망적으로 느꼈던 ‘노동의 소외’ 따위란 그곳에 없었다. 눈앞에서 어둠이 걷히고, 희망이 살아나는 듯했다.
공장(삼진통상)에서 나오고서 막노동판을 다닐 때였다. 일당 오천 원인가를 받고 연립주택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일당 받고 죽으라고 일해봤자 내가 짓고 있는 이 집에서 살 수 있을까?’ 도저히 살 수 없겠더라고. 퍼뜩 마르크스의 명제 가운데 하나인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란 말이 떠올랐지. 내가 만든 것을 내가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지배되어 산다는 뜻이지. 집 짓는 노동자가 어떻게 그 집에서 살 수 있겠어. 그 일당으로는 평생 죽도록 일해봤자 전세나 살 수 있을까? 어딘가에서 머슴으로 살더라도, 비록 내가 생산한 것을 소유하지는 못해도 내 입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일을 하고 싶었어. 아니, 그걸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지. 그래서 농사를 지으러 갈 생각을 한 거지. 그런데 한심했던 게, 내려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이런 공상을 하고 있더라고. ‘창조’니 ‘생산’이니 하는 추상적인 단어를 늘어놓는 지식인 놀음, 말이야.”(주철환과의 인터뷰, 2004.3.)
한 마을에 전화가 한두 대밖에 없는 벽촌에 박혀 있었지만, 정보기관의 감시는 계속됐다. 익산(이리) 형사들이 그 시골까지 찾아와 주인집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주인을 닦달해, 김민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언제 어떤 사람이 오갔는지, 무얼 하고 갔는지 따위를 캐물었다. 심지어 그가 방을 비우면 슬그머니 김민기의 문간방 세간살이를 뒤지기도 했다. 그가 읍내에라도 나갈 때면 따라붙기도 했다. 오가며 캐묻는 것도 귀찮았는지, 알아서 보고하라고 주인을 윽박질렀다.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주인은 견디다 못해 이런 사정을 김민기에게 털어놓았다. 김민기는 자기 때문에 그 꼴을 당하는 집주인에게 미안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그 사람들 시키는 대로 하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이 그렇게 뒤를 캐건 말건, 세간살이를 뒤지건 말건, 감시하건 말건 걸릴 게 없었으니, 마음은 편했다. 주인이 겪는 마음고생 말고는 신경 쓸 게 없었다.
5시 전 일어나서 온종일 일하고, 드러누우면 완전히 뻗어서 자고, 충만한 삶을 살았다. 바쁘고 힘들긴 했지만, 꽉 차서 살았다. 하루 24시간이 살아있다는 걸 느꼈고. 지금도 그때가 그립다.”
다만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곤 했다. 어머니는 때마다 그의 오두막으로 찾아오셨다. 마른반찬도 해오시고, 입을 거리도 들고 오셨다. 그가 사는 걸 보시고는 돌아서 눈물짓곤 했다.
집주인 이완우 씨의 이야기다.
한 번은 둘이 앉아 술 한잔하는데, (김민기가) 갑자기 그야말로 닭똥 같은 눈물을 죽죽 흘리더라구. 세상에 눈물도 그런 눈물은 첨 봤어. 어머니가 불쌍하다는 거야. 그리고 자기는 데모꾼도 아닌데 왜 저렇게들 난리를 쳐, 어머니를 걱정하게 만드는지 답답해 죽겠다고 하더라고.”
그건 그가 이리를 떠나 김제로, 전곡으로 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씨를 포함해 이웃들은 궁금했다. ‘저렇게 여린 사람이 권력자들 시키는 대로 살지 왜 제 고집대로 살아 저도 어머니도 힘들게 할까?’ 그 이유를 김민기는 KBS ‘한수진과의 인터뷰’에서 잠깐 내비쳤다.
운동의 현장에 서 있는 것이 속 편하지 않았나요?”
그래요. 그때도 그렇게 사는 게 떳떳하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래서 권력에 맞서 앞장서는 이들에게 죄스러웠죠.”
왜 그러지 않았죠?”
워낙 통제받았으니, 나설 수도 없었죠. 어딜 가든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말이죠. 그러나 그보다는 내가 원래 그런 것 같아요. 앞장서 운동을 하는 성격이 못되죠. 이렇게라도(농사를 지으면서라도) 열심히 사는 게 내 주제에 맞았던 거죠. 노동하면서 꽉 찬 삶을 사는 거.”
바쁘고 힘들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 고향에서 떠났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도 가끔은 있었다. 그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는 여장수 전 백제고등학교 교장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김민기보다 일곱 살이 많아 꼬마 시절 김민기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이였다. 말도 잘하고 인물도 좋고 똑똑했던 아이여서, 크리스마스 때면 교회 행사의 오프닝 멘트는 꼭 민기가 했다던가….
여 씨는 김민기가 석암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가끔은 이리 중앙동에서 화실을 운영하던 김영규 화백 화실에서 술 한잔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그곳에서 미쳐 날뛰던 유신체제의 발버둥을 전해 듣기도 했다.
계엄령 및 위수령과 함께 부산과 마산에 동원된 특전사와 해병대는 시민들의 시위를 장갑차와 총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그건 온몸으로 퍼진 악성 종양에 연고를 바르는 것에 불과했다. 학생과 시민 그리고 노동자의 분노와 저항은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전국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게다가 유신 정권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자, 권력 내부에선 그동안 쌓여있던 갈등과 모순이 표면화하고 있었다. 내부 모순까지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진압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김민기가 익산에 머물던 1979년 11월 3일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부르고 있는 모습. 사진을 제공한 여장수 전 백제고 교장의 증언에 따르면 노래를 부른 날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이 열린 11월 3일이라고 한다. 사진출처:서울신문( 여장수 제공 )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가에서 5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박정희의 18년 독재도, 7년 간의 유신체제도 그와 함께 종언을 고했다. 카메라 앞에서는 농부와 막걸리를, 으슥한 곳에선 젊은 여자를 끼고 양주 시바스 리갈을 즐겨 마시던 박정희는, 2인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알에 맞아 즉사했다. 유신의 그 추접스런 종말은 노래 부르고 술 따르던 가수 심수봉과 익명의 여대생이 지켜봤다.
박정희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1979년 11월 3일, 이리의 김민기와 여 전 교장은 김영규 화백의 화실에서 오래도록 술을 마셨다. 그날따라 민기는 두 사람 앞에서 기타를 치며 말없이 를 부르더란다. 여간해선 노래를 부르지 않던 그였다. 망나니 같았던 박정희와 유신체제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밀려오는 만감을 누르기 힘들었을 것이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