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펜, 신성모독·거리 설교로 감옥 가 헌법을 쓰다 [뉴스]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개 초콜릿 통에 그려진 모자 쓴 아저씨를 떠올린다. 그런데 그 상표에 나온 사람은 정작 펜이 아니라 상관도 없는 가상의 퀘이커 캐릭터다. 진짜 펜은 초콜릿과는 거리가 멀고, 대신 감옥과 빚과 헌법 초안으로 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블랙코미디다.
18세기 펜의 초상화(위키피디아)
해군제독 아들이 왜 감옥을 들락거렸나
펜의 아버지는 잉글랜드 해군제독 윌리엄 펜 경(Sir William Penn, 1621~1670)이다. 영국이 청교도 혁명기인 올리버 크롬웰 시절과 왕정복고 시절을 오가며 요령 있게 처신해 재산과 지위를 챙긴 인물로, 아들에게는 무난한 출세길을 열어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들 펜은 어릴 적 다니던 학교에서부터 청교도적 분위기에 물들더니, 옥스퍼드에 들어가서는 국교회 예배를 대놓고 거부하다 결국 퇴학당한다. 아버지가 매질까지 하며 말렸지만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스물두 살 무렵 펜은 퀘이커교 초기 지도자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의 설교에 감화되어 정식으로 퀘이커가 된다. 퀘이커는 모자를 벗지 않고, 법정에서도 맹세를 거부하고, 국교회 성직자에게 십일조 내기를 거부하는 골치 아픈 종파였다. 신분 높은 이 앞에서도 모자를 안 벗는다는 것만으로도 당시에는 충분한 체포 사유가 됐다. 아버지는 아들을 몇 번이나 집에서 내쫓았다가 다시 불러들이기를 반복했는데, 그 와중에도 펜은 꿋꿋이 설교와 저술을 이어갔다.
1668년에는 모래 위에 지은 기초 소책자에서 삼위일체론을 문제 삼았다가 신성모독죄로 런던탑에 갇힌다. 왕실 쪽에서는 취소 선언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회유했지만 펜은 거절했다. 그런데 이 양반은 감옥 안에서 오히려 대표작 십자가 없이 왕관 없다 를 써버린다. 협박한다고 겁먹을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1670년에는 런던 그레이스처치 거리에서 허가 없이 설교했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다. 검사와 판사가 노골적으로 유죄 평결을 강요했지만 배심원단은 끝까지 거부했다. 판사는 배심원들을 음식도 물도 없이 며칠 동안 가둬버렸는데도 이들은 버텼다. 이른바 부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재판은 훗날 영국 배심원의 독립성을 법으로 보장하는 계기가 된다. 감옥에 갇힌 쪽은 펜이었는데, 정작 역사에 남은 건 사법제도의 승리였다.
1644년 펜이 세례를 받은 런던의 올 핼로즈 바이 더 타워 교회(위키피디아)
빚 받으러 갔다가 나라를 받다
아버지는 1670년 세상을 떠나면서 국왕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에게 빌려준 거액의 채권문서를 아들에게 물려준다. 왕실 금고는 늘 비어 있었으니 현금 대신 북미 땅을 떼어준 때가 1681년,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펜실베이니아다. 왕은 이 땅을 아예 펜의 숲 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였는데, 정작 본인은 사람들이 자신을 자랑하려고 이름 붙인 줄 알까 봐 창피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땅을 받은 펜은 이곳을 박해받는 퀘이커와 유럽 각지의 소수종파 신자들을 위한 안식처로 구상하고 스스로 성스러운 실험 이라 불렀다. 1682년 필라델피아를 세우고 통치규약을 반포하는데, 여기에는 종교의 자유 보장, 선출된 의회, 사형 대상 범죄의 대폭 축소가 담겼다. 이어 1701년에는 특권헌장을 통해 의회 권한을 늘리는데, 이 문서는 미국 독립 이전까지 펜실베이니아의 실질적 헌법 역할을 한다.
원주민 레나페 족과는 무력이 아니라 협상과 정당한 대가를 통해 토지거래를 진행했는데, 훗날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 1694~1778)가 이 조약을 두고 칼 없이 맺어진 유일한 조약 이라며 극찬한다. 이런 통치구조는 훗날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 등이 미국 헌법을 설계할 때 참고한 모델 중 하나로 꼽힌다.
정치적 처신도 쉽지 않았다. 국왕 제임스 2세(James II, 1633~1701)와 개인적 친분이 두터웠던 탓에 명예혁명 이후에는 한때 반역 혐의로 의심받아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1689년 관용법이 통과되면서 비국교도 신앙의 자유가 법적으로 어느 정도 보장되는데, 펜의 오랜 저술과 로비가 이런 변화에 힘을 보탰다는 평가를 받는다.
22세 때의 펜을 그린 1666년 초상화(위키피디아)
정작 본인은 쪽박, 나라는 대박
여기서 반전이 나온다. 이렇게 나라를 세운 펜은 정작 그 나라에서 돈을 벌지 못했다. 식민지 경영에 서툴렀고 위임한 대리인에게 회계 사기까지 당해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결국 영국에서 채무자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기억력마저 잃는다. 1718년 버크셔의 작은 집에서 사실상 무일푼으로 눈을 감는다. 자기가 설계한 나라는 훗날 세계 최강국의 심장부가 되었는데, 정작 설계자는 그 열매를 하나도 못 먹은 셈이다.
장 레옹 제롬 페리스가 1680년에 그린 펜실베이니아의 탄생(The Birth of Pennsylvania) 으로, 찰스 2세 국왕을 마주하고 있는 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위키피디아)
한국에 주는 시사점
펜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성인군자라서가 아니다. 그는 사업 감각이 형편없었고, 식민지 경영에서도 실책이 많았으며, 한때 권력자와의 친분 때문에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가 남긴 것은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제도였다. 배심원의 독립, 종교적 관용, 견제 받는 권력이라는 틀을 만들어놓고 본인은 손해를 봤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 선포 이후 한국 사회가 다시 확인한 것도 결국 같은 문제다. 제도가 개인의 선의에 기대면 언제든 무너진다는 것, 그리고 반대로 한 사람의 헌신이 제도로 굳어지면 그 사람이 사라져도 오래 남는다는 것. 펜은 자기 재산도, 정치적 안전도 못 지켰지만 배심원 제도와 관용의 원칙만큼은 지켜냈다. 지금 한국에서 필요한 것도 특정 인물에 대한 환호나 단죄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는 한 사람의 독단으로 헌정 질서가 흔들리지 않도록 만드는 제도적 장치다. 초콜릿 통에 얼굴이 실리느냐 마느냐보다 훨씬 중요한 건 결국 그것이다.
1932년 발행된 윌리엄 펜 3센트 우표(위키피디아0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