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화국의 대학 정화, 기억을 지우고 질문을 없애 [사람들] 박정희의 죽음으로 18년 장기집권은 끝났지만, 군사권력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의 지휘권을 장악했습니다.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인과 재야인사, 학생들을 체포했습니다. 다음 날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은 학생과 시민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습니다. 이후 발포와 집단살상이 이어지면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해 계엄군에 맞섰고, 광주는 고립된 채 열흘 동안 저항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약점은 분명했습니다. 권력의 출발이 12·12군사반란과 5·18민주항쟁에 대한 유혈진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정권의 정당성을 묻는 일은 곧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묻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권은 학생의 능력보다 기억을 두려워했습니다. 학생에게 허용된 시간은 미래뿐이었습니다. 입시와 취업을 준비하는 미래였습니다. 광주의 죽음을 돌아보고 국가폭력의 책임을 묻는 순간, 학생은 불순분자가 되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원한 것은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공부하고 경쟁할 능력은 갖추되 5·18을 기억하지 않는 인간, 곧 기억 없는 유능한 학생이었습니다.
■ 기억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학생
● 기억을 지운 국가
전두환 정권은 5·18민주항쟁을 국가폭력에 맞선 시민의 저항이 아니라, 불순분자와 폭도들이 일으킨 소요사태로 몰았습니다. 계엄군의 발포와 시민 학살은 은폐되었고, 언론은 계엄당국이 제공한 발표를 되풀이했습니다. 광주 밖의 국민은 공식 보도를 통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학교에서도 5·18은 가르쳐지지 않았습니다. 광주의 죽음은 교과서 밖으로 밀려났고, 그 진실을 말하는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기억은 질문을 낳기 때문입니다. 광주에서 누가 시민에게 총을 쏘았는가. 국민을 죽인 사람들이 어떻게 국가권력을 차지했는가. 5·18을 기억하는 순간 전두환 정권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정권은 설명하는 대신 기억을 금지했습니다. 5·18의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유언비어 유포자와 불순분자로 몰고, 국가폭력의 책임을 묻는 행위를 범죄로 다루었습니다. 반공주의는 군사반란과 국가폭력으로 세워진 정권을 지키는 방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주의 경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과 유가족의 호소, 종교계와 재야인사들의 기록이 통제의 벽을 넘어 조금씩 퍼져나갔습니다. 정권이 감추려 할수록 광주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밝히려는 노력도 계속되었습니다.
● 대학을 정화한다는 이름으로
5·18을 진압한 신군부는 곧바로 대학을 장악했습니다. 1980년 ‘대학정화조치’를 통해 학생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을 대규모로 제적하고, 비판적인 교수들을 대학에서 쫓아냈습니다. 정권은 군사반란과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을 면학 분위기를 해치는 ‘학원 소요’로 규정했습니다. 학생운동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 공부하지 않는 일부 학생이 일으키는 혼란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국가는 대학을 정화한다는 이름으로 대학에서 질문하는 사람을 제거했습니다.
정권이 그린 대학은 현실을 토론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공론장이 아니라, 학생들이 공부와 취업을 준비하는 공간이었습니다. 학생은 국가와 사회를 판단하는 시민이 아니라 주어진 교육과정을 따르는 학습자로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전두환 정권의 교육정책을 모두 학생의 정치적 관심을 없애기 위한 공작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과열된 입시경쟁과 사교육비는 심각한 사회문제였고, 대학 진학의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도 컸습니다.
7·30교육개혁 내용을 보도한 1980년 7월 31일자 신문.
1980년 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을 발표했습니다. 대학별 본고사와 과외를 금지하고 대학입학 정원을 대폭 늘리는 한편, 졸업정원제를 도입했습니다(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1980.7.30.).
과외금지와 대학입학 정원 확대는 교육비 부담을 줄이고 대학 진학의 문을 넓혔습니다. 대학별 본고사의 폐지는 학생들이 여러 시험을 준비해야 했던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지닌 현실적 필요와 긍정적 효과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교육제도 전체를 위에서 일괄적으로 바꾸었다는 점입니다. 교사와 학교, 대학은 교육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국가가 정한 제도를 집행하는 기관이 되었습니다. 교육개혁이 필요했지만, 그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에는 민주적 토론과 동의가 없었습니다.
● 입시경쟁이 교실 안으로 깊어지다
대학별 본고사가 폐지됐지만 경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981학년도부터 대학입학 예비고사와 고교 내신성적을 함께 반영했고, 1982학년도에는 학력고사와 내신성적의 반영 비중을 더욱 높였습니다. 내신의 입시 반영 비중이 커지면서 학교의 시험과 성적 관리가 대학입시에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같은 학교와 교실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대학입시에서는 서로의 등수와 진학 기회를 다투는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내신 경쟁은 고등학교의 일상과 교우관계까지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졸업정원제는 그 경쟁을 대학 안까지 이어갔습니다. 입학생을 졸업정원보다 더 많이 선발한 뒤 일정 인원만 졸업시키도록 설계된 제도 아래에서 학생들은 학점과 졸업을 놓고 경쟁해야 했습니다. 정부는 이를 통해 ‘공부하는 대학’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학생들에게는 입학 이후에도 탈락의 불안이 계속되었습니다.
졸업정원제가 처음부터 학생들의 정치적 관심을 돌리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학정화조치로 토론과 학생운동의 공간이 축소된 자리에 학점과 졸업, 취업을 둘러싼 경쟁이 깊숙히 들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국가는 학생을 공부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치열하게 경쟁하는 학생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그 경쟁을 만들어낸 교육제도와 사회구조, 그리고 그것을 결정한 권력까지 질문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 억압된 정치, 풀려난 소비와 오락
대학 밖에서는 스포츠와 영상, 소비와 오락이 빠르게 확대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훗날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의 머리글자를 딴 ‘3S 정책’으로 불렸습니다. ‘3S 정책’은 당시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용한 정책 명칭이 아니었습니다. 스포츠와 영화, 유흥산업을 하나로 묶은 통합정책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를 두고도 견해가 엇갈립니다. 국민의 관심을 정치 밖으로 돌리려는 치밀한 계획이 일관되게 추진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980년대 대중문화의 성장을 모두 정권의 우민화 정책으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정치적 표현과 언론을 강하게 통제하던 정권이 스포츠와 상업적 대중문화의 확대를 허용하고 지원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정치적 자유가 봉쇄된 사회에서 소비와 오락의 영역은 상대적으로 빠르게 넓어졌습니다. 컬러텔레비전 방송은 1980년 12월 시작됐고, 1982년 1월에는 오랫동안 시민의 밤을 통제했던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습니다. 같은 해 정부의 정책적 지원 아래 프로야구가 출범했습니다. 전두환은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직접 시구했고, 이듬해에는 프로축구와 프로씨름이 시작되었습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도 스포츠를 정권의 성과와 국가적 자부심으로 연결했습니다.
영화와 소비문화도 변했습니다. 1982년 개봉한 《애마부인》을 비롯한 성애영화가 흥행했고, 야간통행금지 해제와 함께 심야영화와 유흥산업이 성장했습니다. 영화와 출판에 대한 검열은 계속됐지만, 정권은 정치적 표현에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서 상업적 성애 표현에는 선택적인 완화를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대중문화가 정권의 의도대로만 움직인 것은 아닙니다. 영화와 음악, 문학과 연극에서는 현실의 모순과 시민의 삶을 다룬 작품들이 등장했습니다. 대중문화의 확대는 소비와 오락을 키웠지만, 새로운 감수성과 비판적 표현이 성장할 공간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1980년대의 변화를 단순히 ‘3S 우민화 정책’으로만 규정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와 문화에 서로 다른 자유가 허용됐다는 사실입니다. 스포츠와 소비, 상업적 오락을 즐기는 자유는 넓어졌지만, 5·18과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말하는 자유는 봉쇄되었습니다. 학생은 성적과 취업을 준비하고, 국민은 스포츠와 영상, 소비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심이 광주의 진실과 국가폭력의 책임으로 향하는 순간, 국가는 다시 폭력과 처벌로 답했습니다.
● 군대로 끌고 가 생각을 바꾸다
경쟁과 오락만으로 모든 학생을 침묵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대학정화조치가 비판적인 학생을 학교 밖으로 밀어냈다면,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은 그 학생의 생각과 인간관계까지 국가가 직접 통제하려 한 공작이었습니다. 학생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은 수사기관에 연행된 뒤 정상적인 입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군대로 보내졌습니다. 휴학계나 입영지원서를 강제로 쓰게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군에서는 폭행과 협박, 사상교육을 통해 학생운동을 포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군 당국은 학생운동 관련자의 사상을 ‘순화’한다는 명목으로 이러한 공작을 ‘녹화사업’이라고 불렀습니다. 보안사는 학생들에게 함께 활동했던 동료의 이름과 조직의 내부 정보를 적게 했습니다. 휴가나 전역 뒤에는 학생운동 조직에 다시 접근해 동향을 보고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비판적인 학생을 군대에 가두고, 동료를 감시하는 정보원으로 만들려 한 것입니다. 강제징집과 프락치 강요 공작은 전두환 정권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기인 1971년부터 시작돼 노태우 정권 초기인 1990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1980년대 초 ‘녹화사업’이라는 조직적인 사상전향 공작으로 확대했고, 이후에는 ‘선도공작’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했습니다.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강제징집과 녹화·선도 공작 관련자 2,921명의 명단을 확인했습니다. 2022년에는 이 가운데 신청인 187명에 대해 처음으로 개인별 피해 사실을 인정했고, 이후 추가 진실규명 결정이 이어졌습니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대학생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 공작 사건」 진실규명 결정, 2022∼2024).
학교와 군대, 정보기관이 하나의 통제체제로 연결되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교련과 학도호국단을 통해 학생을 국가안보의 예비전력으로 길렀다면, 전두환 정권은 군대를 이용해 비판적인 학생의 생각과 인간관계까지 파괴하려 했습니다. 학생은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 복종을 거부하면 학교에서 쫓겨났고, 군대로 끌려갔으며, 동료를 배신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 침묵을 거부한 학생들
그러나 광주의 진실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과 유가족의 호소, 종교계와 재야인사들의 기록, 학생들이 만든 유인물과 사진이 통제의 벽을 넘어 퍼져나갔습니다. 대학가에서 5·18의 진실을 알리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일은 곧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정치적 행동이 되었습니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도중,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같은 학교 학생 이종창이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어가는 이한열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당시 로이터통신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이 그 순간을 촬영했다. 이한열의 머리는 뒤로 젖혀져 있고, 피는 얼굴을 타고 흐른다. 마스크를 쓴 이종창은 쓰러지는 동료를 붙들면서도 전투경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국가폭력과 인간의 연대가 한 화면 안에 함께 들어 있다. 사진은 외신을 통해 먼저 알려졌고 국내 언론에도 보도됐다.
1980년대 대학은 시위의 공간만이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그 시절 대학을 다니며 많은 책을 읽고, 학회와 독서모임에서 한국사회와 세계를 밤늦도록 논쟁했습니다. 당시 많은 학생이 그러한 공부와 토론을 통해 5·18과 군사독재, 노동과 분단, 한미관계와 한국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 논의는 대학을 넘어 지식인과 종교계, 노동현장과 시민사회로 이어졌습니다. 학생들의 문제의식은 한미관계로도 확대되었습니다. 미국이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 장악과 5·18민주항쟁 진압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이후 군사정권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과 1985년 5월 23일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은 그러한 문제의식이 행동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건의 방식과 결과는 구분해서 평가해야 합니다.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은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지만,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는 무고한 대학생 한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한 폭력적 행동이었습니다. 사건이 제기한 정치적 질문이 정당하다고 해서 그 수단과 희생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의 모든 주장과 행동이 옳았던 것도 아닙니다. 일부에는 이념적 경직성과 잘못된 정세인식이 있었고, 폭력적인 투쟁방식이 시민의 공감을 잃게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가르친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사회와 역사를 해석하려 했던 경험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정권은 대학을 공부와 취업의 공간으로 한정하려 했지만, 그 안에서는 국가와 사회, 세계의 구조를 묻는 시민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 고문실에서 거리로 나온 진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말로 사건을 은폐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부검의의 증언과 언론의 취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를 통해 고문과 은폐의 실상이 드러났습니다. 박종철의 죽음은 한 학생에게 가해진 우발적인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불법연행과 고문, 조작된 자백에 의존해온 국가폭력이 고문실 안에서 한 학생을 죽인 사건이었습니다.
같은 해 6월 9일에는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이한열이 피를 흘리며 동료 학생에게 부축된 사진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고문실 안에서 은폐되던 국가폭력이 이번에는 거리 한복판에서 시민의 눈앞에 드러났습니다. 박종철의 죽음은 고문실에 숨겨진 국가폭력을, 이한열이 피 흘리며 쓰러진 모습은 거리의 시민에게 가해지는 국가폭력을 드러냈습니다. 다음 날인 6월 10일 전국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한 국민대회가 열렸습니다. 학생과 시민은 대통령 직선제만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민을 감시하고 고문하며 죽인 권력에 책임을 물었습니다.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회사원과 상인, 노동자와 종교인, 평범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1987년 7월 9일,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지 한 달 만에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이한열의 영결식이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장례행렬은 신촌과 서울시청 앞 노제를 거쳐 이어졌으며, 당시 기록은 학생·노동자·시민 등 각계각층 약 100만 명이 서울 도심에 모인 것으로 전한다. 이한열의 운구는 고향 광주로 옮겨져 망월동 묘역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은 6월민주항쟁의 대단원을 장식한 시민적 의식이자, 한 학생에게 가해진 국가폭력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바꾼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은 6·29선언 이후에도 민주화 요구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고, 이후 국가폭력의 진상규명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운동의 상징으로 남았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6월 29일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약속하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한열은 그로부터 엿새 뒤인 7월 5일 끝내 숨졌습니다. 7월 9일 그의 장례행렬에는 수많은 시민이 참여했습니다. 정권이 길러내려 한 것은 성적과 취업을 위해 경쟁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기억했고, 질문했으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1987년 6월 거리에 등장한 것은 침묵하는 학생이 아니라 권력을 심판하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이었습니다.
■ 결론- 국가는 국민 을 원했고 시민 을 두려워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이 요구한 인간형은 서로 달랐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분단과 전쟁을 앞세워 반공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을 원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빈곤 극복과 경제개발을 내세워 생산하고 수출하는 산업역군을 길러내려 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입시와 취업을 위해 경쟁하되 5·18과 권력의 정당성은 묻지 않는 학생을 원했습니다. 세 정권은 모두 무능한 국민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반공국가를 지키고, 산업현장에서 생산하며, 입시와 취업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능한 국민이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능력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 능력을 왜,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 판단할 권리를 국민에게 허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국가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지는 묻지 못하게 했습니다. 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실었지만 독재권력을 심판하는 시민의 행동은 범죄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권력이 원하는 인간만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반공국가의 학도는 4·19혁명에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시민이 되었습니다. 산업역군으로 호명된 노동자와 학생은 인간다운 삶과 민주주의를 요구했습니다. 광주의 기억을 빼앗긴 학생들은 5·18의 진실을 되찾고 6월민주항쟁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국가는 복종하는 국민을 만들려 했지만, 학생과 국민은 권력을 심판하는 시민으로 나섰습니다. 교과서에 적힌 민주주의와 현실의 독재 사이에서 모순을 발견했고, 국가가 정한 목표와 자신의 삶 사이에서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질문하는 시민이 거리로 나왔을 때 독재체제는 흔들렸습니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은 국가가 국민에게 일방적으로 복종을 요구하던 체제를 흔들고 정치적 민주화의 문을 연 결정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의 민주화가 곧바로 학교의 민주화와 시민교육의 확립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주화 이후 반공의 전사와 산업역군, 침묵하는 학생이라는 국가의 명령은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의 시민교육이 그 자리를 충분히 채우지는 못했습니다. 세계화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학교와 사회에는 새로운 인간형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더 좋은 대학과 직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성공과 실패를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며, 공동체보다 개인의 생존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1987년 이후 세계화와 외환위기가 학교와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국가가 명령하던 인간형이 약해진 자리에 왜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아니라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개인이 들어섰는지를 묻겠습니다.
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