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지 먹다 엄마와 헤어진 아이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 서너 살 무렵이라 그의 기억은 흐릿하다. 너무 어릴 때의 기억은 대개 특정한 장면으로 남는다. 그의 기억도 그랬다. 그날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갔다. 사람들로 붐비던 시장은 소란스러웠다. 무엇을 팔고 무엇을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또렷하다.
그는 엄마와 함께 소시지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 기다리라’는 엄마와 헤어졌다. 잠깐 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날은 엄마와 끝내 헤어지는 날이었다. 어린아이가 느꼈을 공포는 설명하기 어렵다. 세상은 갑자기 너무 커졌고, 그는 너무 작아졌다.
길을 잃은 아이는 경찰의 손에 의해 춘천 오순절영아원으로 보내졌다. 당시 0세에서 7세 아동들이 머물던 시설이었다. 오순절영아원은 단순히 보호시설만은 아니었다. 당시 입양위탁소 간판을 달고 입양 사업도 진행하며, 춘천 지역의 아동보호소 역할도 담당했다. 또한 해외 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와 연계돼 있어, 강원도 최대 입양기관이었다. 그는 실제 입양될 뻔한 기억이 있다고 말한다.
당시에는 해외 입양을 굉장히 많이 보내던 시기였잖아요. 미아가 되는 경우에도 아이를 찾아 원가족 품으로 돌려보내려는 기본적인 노력 자체가 없었어요. 고아원에서 새로운 신분, 이른바 ‘고아 호적’을 만들어 국내외로 입양 보내버렸습니다. 반면 저는 엄마도 기억하고 집도 기억하니까 집에만 다시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어요. 그 나이의 아이가 입양이라는 제도의 의미를 이해했을 리는 없죠. 저에게 입양이라는 것은 엄마를 영영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였어요. 저는 곧 엄마를 다시 만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잠시 헤어졌을 뿐이었으니까요. 엄마는 분명 나를 찾으러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입양 거부의 대가는 어린 아이에게 너무 가혹했습니다. 입양을 거부할 때마다 뺨을 맞았던 기억이 있어요. 시간이 흘러도 폭력에 대해 몸이 먼저 기억하는 느낌 같은 것입니다. 그 순간의 공포와 억울함은 사라지지 않아요.”
1978년경 춘천 오순절 입양위탁소에 수용 당시 방문객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기억 속에는 엄마의 모습이 남아 있다. 엄마는 20대 초반 정도로, 긴 머리를 하고 있었고, 얼굴이 아주 예뻤다. 집에는 넓은 마당이 있었으며, 큰 개도 키우고 있었다. 가난한 집은 아니었다.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기억이 정확하다면, 중산층 정도의 평범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기억은 거기서 멈춘다. 그는 엄마와 헤어질 당시의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도 소시지를 먹지 않는다.
‘아동권리연대’ 조민호 대표의 이야기이다. 어린 민호처럼 엄마의 기억을 안고 있는 아이들은 입양을 거부했지만 입양을 가겠다는 아이들도 제법 많았으며 실제 입양으로 연결된 아이들도 수십 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입양을 거부하며 집으로 가겠다던 그의 바람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일곱 살까지 오순절 영아원에서 성장했고, 그 이후엔 원주에 있는 성애원으로 마치 군대 자대배치처럼 옮겨져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81년의 일이었다. 약 100여명의 아이들이 그곳에서 머물렀다. 인권은 무참히 짓밟혔다. ‘집에 보내 달라’는 말 한마디에도 곧장 몽둥이가 날아왔다. 그곳은 사실상 ‘수용소’였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나이 많은 형들로부터 구타당하는 게 일상이었고, 원내에서 정해진 작업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야구방망이로 맞기도 했으며, 밥을 안 줘 굶는 일도 다반사였다. 관리자를 통해 고등학생 형들에게 폭력은 대물림됐다. 어릴 때는 피해자였던 아이들이 선배가 되면 가해자가 되는 일도 반복되었다.
시설에는 미아만 들어온 것은 아니었어요. 위탁고아의 경우 부모의 이혼으로 갈 곳이 없어진 아이들도 있었고, 부모가 범죄로 수형생활을 하게 되면서 맡겨진 아이들도 있었죠. 아이들은 부모가 찾아오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다리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알게 됩니다. 부모가 다시 찾아오는 일은 생각보다 드물어요. 당시 사회에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분위기가 있었죠. 그 영향은 시설 안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성애원에 머무는 아이들 가운데 여아가 남아보다 대략 6대 4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부모와 사회가 아이들마저 차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애원에서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굶주림과 폭력, 구타는 상상을 초월한다. 배고픔은 일상이었고, 힘없는 아이들은 더 쉽게 맞았다. 어린아이들에게는 도망갈 곳도,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었다. 그곳에서 죽은 아이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누군가 사라지면 아이들은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설명해주는 어른도 없었다. 어제까지 함께 있던 아이가 어느 날 보이지 않게 되면,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죽음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냥 묻혀버렸다.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누군가의 부재가 슬픔이 아닌 두려움으로 기억됐다. 다음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그 공포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시설 아이들은 학교생활도 일반 아이들과 출발선이 달랐다.
여행경비를 주지 않으니 수학여행을 갈 수가 없었어요. 다른 아이들이 설렘 속에서 여행을 준비할 때, 저에게 수학여행은 애초부터 다른 세상의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학교 갈 때 점심 도시락도 싸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주지 않는 것은 그저 밥을 안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시설이 아이들에게 차별과 학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저를 챙겨주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거의 매일 도시락을 두 개 싸와 저에게 하나를 나눠줬어요. 누군가 저를 챙겨주었다는 작은 행동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에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기도 합니다. 성애원에는 가끔 외부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당시 원주의 연세대 의대생들이 정기적으로 시설을 방문해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시간엔 저도 잠시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어요.”
참고서는 물론이고 작은 학용품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했지만 그는 공부를 곧잘 했다. 중학교 시절까지 성적은 중상위권이었다. 배우는 일에 흥미도 있었고 적성도 있었다.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면 다른 길이 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설은 다른 선택을 강요했다. 그는 원주농고로 보내졌다. 당시 시설 아이들 가운데는 대학 진학을 위해 인문계 고등학교를 희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시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의사보다 시설 운영의 편의와 그들만의 판단이 우선되었다. 공부를 계속할 기회 자체를 막아버린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권리마저 봉쇄당했다. 일상 속 차별은 더 작은 곳에도 숨어 있었다.
1980년 12월경 춘천 오순절 입양위탁소 대통령 부인 이순자씨 방문 후 기념촬영. 둘째줄 맨왼쪽이 조민호싸
원주 학성중학교 다니던 시절인데, 아이들에게 버스 회수권을 하루에 한 장씩만 지급했습니다. 그래서 학교 갈 때는 버스를 탔고, 돌아올 때는 걸어왔어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해야만 했죠.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은 가방을 들고 길 위를 걸어요. 비가 오는 날도 있었고, 눈이 내리는 날도 있었죠. 구타와 보복 때문에 힘들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걷는 것이 일상이 됐습니다. 매일 수 킬로미터씩 이어진 하굣길을 아이들은 걸어서 돌아왔죠. 학교에서 시설로 향하는 길은 멀기만 했고, 어쩌면 제가 원했던 삶에서 조금씩 어긋나는 느낌도 있었죠.”
그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결핍이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 끝내 남아 있는 것은 결핍만이 아니다. 공부를 가르쳐주기 위해 정기적으로 시설을 찾아오던 대학생 누나들은 어린 조민호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학교 선생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선생님은 가능성을 봤고, 어떤 선생님은 조용히 위로해주었으며, 어떤 선생님은 어린 조민호를 입양하기 위해 시설로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시설에서 많은 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시설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 덕분에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학창시절을 지탱한 것은 결국 시설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1990년 원주농고 1학년이던 해, 그는 결심했다. 미래가 없는 그곳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아이는 마침내 탈출을 선택했다. 그것은 단순히 시설을 벗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굶주림과 폭력,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포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한 간절함이었다. 시장에서 엄마 손을 놓친 이후, 처음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 날이기도 했다.
원주 성애원을 탈출한 뒤 그는 춘천으로 향했다. 처음 세상에서 길을 잃었던 곳. 그리고 어쩌면 엄마를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던 곳이다. 그는 살아야 했고, 살아가면서 엄마를 찾고 싶었다. 터미널 벽에는 수많은 구인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그중 눈에 띈 남선플라스틱, 칫솔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전화를 걸어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취업이 결정됐다. 선택한 이유는 숙식을 제공해준다는 말 때문이었다. 먹고 잘 수 있는 곳. 시설을 벗어난 아이에게 그것은 조건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낮에는 칫솔을 만들고, 밤에는 엄마 생각을 했다. 그리고 쉬는 날엔 희미한 기억 속의 시장과 넓은 마당이 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며 엄마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제가 머물렀던 춘천 오순절 영아원을 찾아갔습니다. 기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저의 이름, 발견된 장소, 부모에 대한 단서 같은 작은 정보만 있어도 엄마를 찾는 길이 열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엄마와 저에 관한 기록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자료가 없다는 말과 함께 ‘키워준 은혜도 모르느냐. 배은망덕하다’는 등의 온갖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제가 잃어버린 것은 종이 몇 장이 아니라 제가 누구인지 찾아갈 수 있는 길 자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였을 때는 시장에서 엄마 손을 잃고, 오랜 시간이 지나 찾아간 뒤에는 저를 증명해줄 기록마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희망을 안고 찾아갔지만, 그날만큼은 세상이 다시 막막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엄마를 찾기 위해 왔지만, 돌아온 것은 또 하나의 상실감이었죠. 현재 저에 대한 기록은 1993년 경 춘천시청 부녀아동과를 찾아가서 받은 자료입니다.”
그는 서울로 향했다. 더 나은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사람에게 선택지는 대개 많지 않다. 그러나 선택지가 작다고 해서 꿈까지 작은 것은 아니었다. 상경 후, 생계를 위해 신문보급소 일을 시작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거리에서 신문 뭉치를 들고 골목을 오갔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대문 앞마다 하루의 소식을 전했다. 겨울이면 손끝이 얼어붙었고, 여름이면 이른 시간부터 등에 땀이 흘렀다. 사람들은 문을 열고 신문을 집어 들었지만, 그 신문이 어떤 손을 거쳐 왔는지 알지 못했다. 신문을 배달하는 동안 자신의 하루도 함께 배달하고 있었다. 주경야독의 시간이 이어졌다. 잠이 부족한 날도 많았다. 새벽 노동이 끝나면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피곤은 몸보다 먼저 눈꺼풀을 덮쳤지만 그는 버텨냈다. 배움이야말로 자신을 다른 곳으로 데려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77년 춘천지방법원에서 만들어진 조민호씨의 고아호적 원본. 당시 시설장의 요청으로 수많은 고아호적이 만들어져 지금도 뿌리찾기를 방해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
마침내 검정고시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시험 통과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세상이 잠시 제 노력을 인정해줬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나 인생은 한 번의 합격으로 해피엔딩이 되는 것은 아니더군요. 대학 입시는 또 다른 문이었습니다. 몇 번의 실패가 이어졌고,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할 때마다 좌절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새벽은 여전히 찾아왔고, 신문도 여전히 배달해야 했으며, 공부도 계속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5년간의 도전 끝에 대학 합격이라는 소식을 받아들었죠.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 하나가 마침내 열린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가끔 가장 기쁜 순간 뒤에 다른 시험지를 내민다. IMF 외환위기는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거리의 간판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직장은 흔들렸으며,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안이 드리워졌다. 어렵게 열린 길도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순탄하지 않은 인생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하지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그의 인생을 설명하는 것은 실패나 시련이 아니라 어쩌면 새벽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멈추지 않았던 걸음. 차가운 골목길에서 다음 날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던 발걸음 말이다. 그가 대학생이었던 IMF 이후 대한민국사회는 크게 요동쳤다. 해고자가 쏟아지면서 비정규직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그 시대 상황을 보면서 서서히 노동자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87년, 그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원주에서 그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던 연세대 학생 누나들이 있었다. 공부를 알려주고, 책을 권해주고, 세상을 이야기해주던 사람들이었다. 어린 학생에게 대학생은 조금 먼 미래의 모습이기도 했고, 세상을 많이 아는 사람처럼 보이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 해 봄과 여름, 원주 거리의 분위기도 이전과 달랐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누군가는 구호를 외쳤고, 누군가는 손에 전단을 쥐고 있었다.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왔고, 시대는 빠르게 흔들렸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함성은 교실과 캠퍼스를 넘어 광장으로 번져갔다. 그는 그 누나들과 함께 시위 현장으로 향했다. 어린 학생이 그 시대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날의 풍경만은 선명하게 남았다. 넥타이 부대라고 불린 직장인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높이 올라간 주먹들. 쉼 없이 울려 퍼지던 함성.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에 서려 있던 절박함. 그 기억은 오래도록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책을 통해 배우고, 어떤 사람은 경험을 통해 배우는데, 그에게 당시 거리는 하나의 배움터였다.
중학생 시절, 시위에 참여했던 강렬한 경험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노동 현장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녹록치 않은 세상이, 저에게는 지나치게 불공평해 보였죠. 노동운동에 투신했습니다. 노동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사업장 단위마다 조직을 만들고, 사람들과 함께 움직였어요. 참여연대,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에서 활동가로 일하며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거리와 회의실, 농성과 집회 현장이 일상이 되었어요. 노동운동은 일종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인생에는 때때로 한 사람의 신념을 흔드는 사건이 찾아오더군요.”
2014년 봄, 바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을 전했다. 보호받아야 할 생명들이 어른들의 잘못 속에서 세월호의 차가운 바다 아래로 사라졌다. 오랫동안 거리에서 사람들의 권리를 이야기해왔지만, 그 사건 앞에서는 어떤 구호도 충분해 보이지 않을 만큼 그는 경악했다. 이후 그는 노동운동 현장을 떠났다. 조용히 모습을 감추고 은신하듯 지내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것은 도망이 아니었다. 너무 큰 충격 앞에서, 다시 자신을 붙들기 위한 시간이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다 개인의 기억이 사회의 문제와 연결되는 순간을 만난다. 그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자신의 삶과 세월호의 아이들을 연결하며 삶의 궤적을 되짚어보던 그는 점점 한 가지 질문 앞에 머물게 되었다. 왜 어떤 아이들은 국가의 구조조차 받지 못한 채 하늘의 별이 되었으며, 또 어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이름과 가족, 삶의 출발점마저 잃어야 했는가. 그 질문은 결국 행동으로 이어졌다.
입양 또는 다른시설로 보내기 위해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일곱 살 무렵의 조민호씨
2021년 경, 아동권리연대를 설립했습니다. 시작은 단체의 조직화가 아니었어요. 그 이전부터 저와 비슷한 처지의 시설 출신 당사자들, 그리고 해외입양 피해를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먼저였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개인의 상처 뒤에 거대한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각자의 불행처럼 보였지만 이야기가 쌓일수록 공통점이 드러나더군요. 많은 아이들이 시설로 가기도 하고, 국경을 넘어 새로운 가정으로 보내졌어요. 문제는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기록들입니다. 이른바 ‘고아호적’인데, 서류에는 새로운 성과 본관이 기록됩니다. 실제 부모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문서상으로 아이들은 가족이 없는 존재가 되죠. 그렇게 조작된 기록이 만들어지면 원래 기록을 갖고 있는 아이들은 뿌리찾기 자체를 차단당합니다. 저도 역시 그렇게 새로운 이름과 본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서류에는 1974년생 춘천 조씨 조민호라고 적혀 있지만, 그 기록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미아 상태로 발견된 아이들. 거리에서 놀다가 보호시설로 보내진 아이들. 경제적 사정으로 잠시 맡겨졌던 아이들. 시간이 흐른 뒤 자신들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한 시설출신자들과 입양인들은 문서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발견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실제 고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고, 어떤 사람은 가족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수십 년 뒤에야 찾아내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들은 수십 년 동안 흩어진 채 존재했다.
한국은 약 70년 해외입양 역사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외입양을 보낸 국가로 기록된다. 약 30만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자신들의 기록이 조작되거나 사라진지도 모른 채 이국으로 팔려갔다. 고아원 출신 당사자들도 100만명에 이른다. 누군가는 그것이 전쟁과 빈곤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복지 체계가 부재했던 시대가 가장 약한 존재들에게 남긴 상처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시간을 통과해온 사람들은 여전히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시설 출신자들과 국내외입양 당사자들이 반복해서 꺼내는 질문은 결국 하나로 수렴된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단지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문제가 아니다. 누가 자신의 삶을 결정했는지, 왜 자신의 이름이 바뀌었는지, 왜 자신의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는지 묻는 일이다.
어느 부부에 관한 이야기인데, 두 사람은 같은 시설에서 만났고, 비슷한 시간을 견디며 자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죠. 결국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관계가 깨지면서 결국 이혼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들의 아이들이 다시 시설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개인의 삶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부모와 가족의 관계 속에서 아이는 사랑받는 방식과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야 하는데, 시설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그런 방법을 배울 기회가 없어요. 부모와 함께 살아본 기억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는 혼자 감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 거죠. 시설 출신자들은 어린 시절 부모의 빈자리가 성인이 된 뒤에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설출신자들의 이야기는 종종 시설을 나온 뒤부터가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그 부부의 경우 이혼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셈이죠.”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한때 전국 곳곳에 존재했던 대형 고아수용시설은 486곳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250곳이 채 되지 않는다. 저출생이라는 시대적 변화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숫자의 변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또 다른 흐름도 있다. 적어도 과거처럼 사회 구조가 대량으로 아이들을 가족과 분리해 시설로 흘러가게 만들던 시대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시설의 숫자가 줄었다고 해서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진실규명을 위해 진화위 2기 당시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5박스 분량의 자료들을 조사관에게 보냈지만, 당시 뉴라이트 성향의 박선영, 김광동 등이 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과거사 규명이 유야무야되었으며 수용시설의 피해 사례도 제대로 조사되지 못했다. 현재 그는 진화위 3기 출범과 진행 과정에 크고 작은 도움을 이어가고 있다. 해외입양인과 수용시설 피해 문제를 국가폭력 조사 범주에 포함시키기 위한 법 개정과 시행령 마련에도 힘을 보탰고, 지금은 진화위 3기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의견과 조언을 제공하고 있다.
과거에는 거리에서 싸웠고, 이후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지금은 제도와 기록의 영역에서 또 다른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기록되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고 싶은 마음이 그를 계속 활동가로 머물게 하고 있다. 너무 오래 침묵 속에 남겨졌던 이야기들이 다시 사라지지 않도록.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면서.이득신 시민기자 dsshine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