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의 동지들, 안중근에서 김창숙까지 [사람들] 1949년 3월 8일 성균관 명륜당 유도교도원 제1회 입학기념 사진. 앞줄 가운데 안경 쓴 이 세 사람은 왼쪽부터 차례로 정인보 김구 김창숙. 심산이 성균관대학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백범은 심산 편에 서서 큰 도움을 주었다. ⓒ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사람은 누구에게나 친구가 있습니다. 세상을 혼자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친구를 가리켜 금란지교(金蘭之交)라 했고, ‘동무 몰래 먹는 음식은 맛이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전자는 좋은 친구를 벗함이 쇠보다 굳을 뿐 아니라 그 향기 또한 난초와 같다는 말이고, 후자는 그렇게 좋은 친구를 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김구에게 친구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김구의 인간관계를 흥미로운 방법으로 분석한 연구가 있습니다. 전일욱·이가희가 2021년 『한국행정사학지』 제52호에 발표한 「백범일지에 나타난 김구의 인간관계 연구」입니다. 연구자들은 내용분석 방법을 통해 『백범일지』에 기록된 인물들이 언제, 어떻게 김구와 관계를 맺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백범일지』 상권에 등장하는 김구의 주변 인물은 모두 320명이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들을 11개 유형으로 분류했습니다. 김구의 성장에 영향을 준 양성자 11명, 동지자 154명, 촉진자 2명, 수혜자 17명, 가해자 7명, 관심자 30명, 적대자 12명, 도전자 1명, 제안자 9명, 지원자 8명, 그리고 어느 유형에도 넣기 어려운 미평자 69명입니다.
눈에 띄는 것은 154명에 이르는 동지자입니다. 전체 320명의 거의 절반입니다. 연구자들은 여기에서 김구 인간관계의 특징을 찾아냈습니다. 김구의 인간관계는 동지들과 함께하면서 확대되었으며, 이를 하나의 등식으로 표현하면 동지는 친구이며, 일본과 그에 협력하는 자는 적”으로 구분되는 이분법적 인간관계였다는 것입니다. 동학운동 시기에는 동학운동가들이, 계몽운동 시기에는 계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뒤에는 독립운동가들이 그의 인간관계 중심으로 들어왔습니다.
김구는 사람과 친하게 교류하는 기준이 개인적인 친소보다 ‘어느 편에서 무엇을 위해 싸우느냐’를 중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154명의 동지가 모두 같은 의미의 친구였을까요. 함께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사이가 틀어지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반대로 오랫동안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도 결정적인 순간에 같은 선택을 하면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
## 1. 친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안중근
김구와 안중근의 만남은 두 사람의 훗날을 생각하면 극적입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김구는 황해도에서 동학군을 이끌었습니다. 그때 정부군 편에서 동학군을 토벌하던 의려소(義旅所)의 장이었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김구의 인물됨을 전해 듣고 특별히 여겨 그의 목숨을 보호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동학군이 패한 뒤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던 김구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 안태훈의 집에 몸을 의탁했습니다. 그곳에서 세 살 아래 안중근을 만났습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맏아들 중근은 열여섯에 상투를 틀었고 자색 명주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을 메고 노인당과 신상동으로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중근은 영기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서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나는 새와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두 젊은이가 가까워진 것은 같은 학교에 다녔기 때문도, 취미가 같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했고 환경도 매우 달랐지만, 나라가 흔들리고 있던 시대가 두 사람을 만나게 했습니다. 두 사람은 청계동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이듬해 여순(旅順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뒤에도 김구와 안 씨 집안의 관계는 계속됐습니다.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특히 안공근은 김구의 가까운 동지가 되었습니다. 훗날 안정근의 딸 안미생은 김구의 장남 김인과 혼인했습니다. 동지로 만난 두 집안이 사돈이 된 것입니다.
김구에게 친구가 만들어지는 방식의 한 전형이 여기 있습니다. 먼저 뜻이 같았습니다. 같은 의기로 시대를 바라보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신뢰가 쌓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집안의 관계로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뜻으로 만나는가 하는 점입니다.
## 2. 가까운 친구라도 원칙이 어긋날 경우 — 안공근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은 김구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었습니다.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의 위험한 일들을 함께했고, 김구가 중요한 일을 모두 맡기는 사람이었습니다. 1935년 한국국민당이 조직될 때도 김구 이동녕 조완구 차리석 엄항섭 등과 함께 당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김구에게 안공근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에는 균열이 생깁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고 남경까지 위험해지자 김구는 임정 계열 가족들을 내륙으로 피난시키기로 했습니다. 김구는 안공근을 상해로 보내, 그곳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위험지역에서 구출해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공근은 그 일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에 있던 김구의 모친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김구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형님인 안중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는데, 그 가족을 어찌 구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건 의인의 가족은 반드시 지켜줘야 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이미 그전에도 균열은 있었습니다. 안공근이 독립운동 자금과 관련된 일에서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신뢰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안공근은 김구의 곁을 떠나 독자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1939년 안공근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의 최후를 둘러싸고 여러 추측이 제기됐습니다. 김구 측근들이 안공근의 실종에 관련됐을 것이라는 의혹까지 거론되었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의 전모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안공근은 한때 김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이 일로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김구에게 친구는 잘못을 눈감아주는 사람이기 이전에 공적인 책임을 다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친구이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이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기준을 견뎌야 합니다. 김구에게 친구란 싸우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대의 안에서 책임을 함께 져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3. 신뢰와 존경이 만들어낸 관계 — 이동녕
친구라고 하면 흔히 비슷한 수평적인 관계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김구의 인간관계에는 그것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석오 이동녕입니다. 1869년생인 이동녕은 김구보다 일곱 살 위였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령, 주석 등 요직을 거듭 맡았습니다. 김구와 이동녕은 임시정부라는 배가 가장 위태로웠던 시기에 함께 노를 저었습니다.
1930년에는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했고,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도피했습니다.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 과정에서 임시정부가 존폐 위기를 맞자 이동녕과 김구 등은 임시정부를 지키는 쪽을 택했고, 그해 11월 한국국민당을 조직했습니다. 이동녕은 이후에도 임시정부 주석을 맡아 김구와 함께 전시체제를 꾸렸습니다.
둘 사이에는 단순한 정치적 협력 이상의 것이 있었습니다. 김구에게 이동녕은 함께 일하는 동지인 동시에 자신보다 앞서 투쟁의 길을 걸은 선배였습니다. 이동녕은 믿을만한 후배에게는 모든 힘을 실어줘 그 후배를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키는 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친구라는 말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여 존경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함께 의논하고, 위기가 닥치면 함께 책임지는 공적인 관계가 최우선인 친구였습니다.
김구와 이동녕의 관계에는 우정과 존경이 함께 있었습니다. 1940년 이동녕은 중국 치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시정부의 오랜 기둥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그가 짊어지고 있던 무게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어깨로 넘어갔고, 김구는 그 무게를 다 짊어졌습니다.
## 4. 가장 복잡했고 예외적이었던 인물 — 이광수
춘원 이광수는 김구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묘한 인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되었습니다. 김구와 이광수는 1919년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황해도 안악 교육 운동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으며, 두 사람 모두 안창호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1919년 상하이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도 독립운동이라는 같은 세계에 있었습니다.
1920년대 이광수의 길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귀국한 뒤 일제강점기 후반 친일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이광수는 김구가 평생 싸운 일제에 협력한 것입니다. 그런데 해방 뒤 역사는 묘한 장면을 만들어냈습니다. 1947년 『백범일지』 출판 과정에 이광수의 손길이 들어갔습니다. 한때 같은 길에 있었고, 이후 전혀 다른 길로 떠났던 사람이 해방 후 김구의 자서전을 펴낼 때 윤문에 가담한 것입니다.
왜 하필 이광수였을까요. 김구의 차남 김신은 훗날 『신동아』(1986년 8월호)와의 인터뷰에서 그 경위를 증언했습니다. 이광수 쪽에서 먼저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청했고, 그의 글솜씨를 아까워한 주변의 권유가 이어져 결국 자리를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단순히 ‘친구’ 또는 ‘적’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같은 뜻으로 만난 사람이 그 뜻을 버렸다면 김구에게 우정은 부차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광수는 다릅니다. 김구에게서 나타나는 ‘동지는 친구이고, 일본과 그 협력자는 적’이라는 등식이 가장 복잡하게 흔들린 경우입니다.
## 5. 처음부터 목표가 달랐던 사람 — 이승만
여기서 ‘동지는 친구’라는 등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 이승만입니다. 김구와 이승만은 모두 한국의 독립을 목표로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역사도 공유했습니다. 해방 뒤에도 신탁통치 문제 등에서 같은 목소리를 낸 시기가 있었습니다. 김구는 평생 이승만을 존경했습니다. 해방 후 김구가 지방을 순회할 때 ‘국부 김구 귀국 연설’ 같은 플래카드를 보면 일하는 사람들은 야단쳤습니다. 이 나라에 국부는 이승만 박사 한 사람이며 족하다. 당장 저 깃발을 거둬라!”
그러나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가까운 친구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임정 시절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임정 대통령을 지냈지만, 위임통치 청원과 정부 운영 등을 둘러싸고 임시정부 내부에서 갈등이 계속됐고, 1925년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탄핵했습니다. 그래도 김구는 이승만을 향한 존경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해방 뒤 두 사람은 다시 정치적으로 협력했습니다. 자주독립 국가 수립이라는 목표를 공유했고 반탁운동에서도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1948년 정부 수립 방법을 둘러싸고 두 사람의 노선은 분명하게 갈라졌습니다. 이승만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추진했습니다. 반면 김구는 단선을 추진하면 앞으로 통일이 어려워지고 한반도에는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한 단선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 정치지도자들이 만나 통일정부 수립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는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해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김규식과 함께 남북 정치지도자 회담을 성사시켰습니다. 김구와 이승만은 한때 정치적으로 손을 잡을 수 있었지만, 결정적인 문제에서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승만은 김구의 삶에서 ‘친구의 유형’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이 목표였고, 백범은 자주독립이 목표였습니다. 이승만의 집권 야욕은 김구의 민족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 게임이었습니다.
## 6. 늦게 같은 길을 걸어간 목숨의 동지 — 김규식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가 같은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 결국 정치적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김규식은 다른 사례입니다. 김규식과 김구는 독립운동의 경력과 활동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김규식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될 정도로 국제외교에 강점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후 좌익 조선민족혁명당 등의 정치세력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1930년대 임정을 떠났습니다. 김구는 한인애국단, 한국독립당 계열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끝까지 임정을 지켰습니다.
1946년 2월14일 과도정부 수립 촉진과 한국의 완전 독립 실현을 위해 만들어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개원식에 참석한 김구(왼쪽)와 김규식(오른쪽).
그러나 해방 뒤 분단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두 사람의 정치적 거리는 가까워졌습니다.
1948년 2월 김규식 측은 남북 정치요인회담을 추진했고 김구의 동의를 얻어 김구·김규식 공동명의의 서한을 북측에 보냈습니다. 4월 12일에는 남북협상을 둘러싼 두 사람은 공동 행보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평양으로 갔습니다.
남북협상의 성격과 성과에 대해서는 이후 여러 평가가 제기됐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 생애 후반의 결정적인 순간에 같은 정치적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오래 알아야만 하는 관계는 아닙니다. 함께 보낸 시간의 길이 못지않게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 위험과 책임을 함께 감수했는지가 중요합니다.
김구와 김규식의 관계는 그래서 안중근 집안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안중근과의 인연은 젊은 날 시작되어 집안과 집안으로 이어졌습니다. 김규식과의 정치적 동행은 생애 후반의 국가 수립 문제에서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함께 출발한 사람이 끝까지 같은 길을 가는 것도 아니며,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이 마지막에 같은 길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김구에게 목표 의식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 7. 개결한 정신의 동지 — 김창숙
김구와 심산(心山) 김창숙이 함께 일한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1926년 상하이에서 김창숙은 이동녕·김구와 함께 지내며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꾀했고, 그해 12월 27일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올랐습니다. 그 직후 나석주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김창숙이 국내에서 모은 자금으로 무기를 마련해 나석주에게 건넸습니다. 그 나석주를 김창숙에게 이어 준 사람이 김구였습니다. 이후 심산은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불구의 몸이 되어 평생 다리를 쓰지 못했습니다.
유림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김창숙(오른쪽)은 백범 김구와 함께 해방정국에서 아주 꼿꼿한 원칙주의자로 꼽혔다. 두 사람은 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와 단독정부 수립을 끝까지 반대했다.
두 사람은 투쟁 전선에 아들을 잃고도 겉으로 슬픔을 드러내지 않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김창숙의 장남 환기는 열일곱에 아버지를 찾아 북경에 왔다가 다음 해인 1926년 아버지의 밀명을 받고 국내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독립운동모금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숨졌습니다. 차남 찬기는 1943년 김창숙이 비밀리에 임시정부로 보낸 뒤 중국에서 병사했습니다. 유해는 2차 환국 때 임정 요인들이 안고 돌아왔습니다. 김구의 큰아들 인도 1945년 3월 충칭에서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사람은 큰 슬픔을 내색하지 않고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해방 후 김창숙은 김구의 날카로운 비판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1946년 민주의원이 출범할 때 그는 의원직을 거부했습니다. 이승만이 의장을 차지하는 순간 임정이 유명무실해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판의 칼끝은 김구를 향했으나, 그가 지키려 한 것은 임정이었습니다. 1948년 3월에는 김구·김규식·조소앙·홍명희 등과 함께 남북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회담을 지지하는 7거두 성명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949년 김구가 총탄에 쓰러지자 김창숙은 크게 절망했지만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1956년 이승만 정권이 효창공원의 독립운동가 묘역을 옮기고 그 자리에 운동장을 지으려 하자, 그는 ‘효창공원을 통곡함’이라는 시를 발표하고 공사 현장의 불도저 앞에 드러누웠습니다. 국회가 공사 중지 건의안을 의결하며 첫 시도는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1959년 이승만 정권은 아시아 축구대회 유치를 구실로 다시 밀어붙였고, 운동장은 끝내 들어섰습니다. 독립운동가 묘역은 효창운동장에 가려 입구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초라한 꼴로 보존돼 있습니다.
1960년 김창숙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의 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효창원에서 열린 공식 추도식에서는 ‘백범 선생 살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암살의 진상을 밝히는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이때 심산은 여든을 넘긴 몸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가까이서 활동한 것은 시기적으로는 짧습니다. 그러나 둘의 강력한 투쟁 정신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찬연히 연결돼 있습니다. 둘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굽히지 않고 걸어간 정신의 동지였습니다.
## 8. 김구와 가장 가까웠던 세 사람
『백범일지』 상권에서 연구자들이 분류한 동지는 154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김구와 특별히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교류의 깊이를 수로 헤아리거나 순위를 매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함께한 기간, 생사를 함께 하는 미더움, 하는 일의 중요성, 위기를 돌파하는 행동 등의 기준으로 보면 세 사람의 관계가 특히 흥미롭습니다. 이동녕, 안공근, 엄항섭입니다.
이동녕은 임시정부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함께 정부를 지켰고 1930년 한국독립당, 1935년 한국국민당에서도 김구와 같은 정치적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이동녕과 김구의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존경을 바탕으로 한 신뢰입니다.
안공근은 다른 의미에서 가까웠습니다. 그는 집안과의 오랜 인연 위에서 김구의 위험한 활동에 깊숙이 참여했습니다. 그만큼 맡은 일이 많았고, 기대도 컸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끝까지 평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둘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깊이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했을 때 갈등도 깊어질 수 있지만, 그 이후 김구는 함구함으로써 그늘을 덮었습니다.
엄항섭은 평생 김구를 표시 내지 않고 도운 사람입니다. 그는 굶주리는 백범을 위해 돈을 벌었고, 1935년 한국국민당 창당에 핵심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엄항섭은 화려하게 앞에 나서기보다 임시정부와 김구의 곁에서 실무를 맡았습니다. 해방 뒤에도 김구와 함께 정치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949년 6월 김구가 암살됐을 때 그가 한독당을 대표해 장례식장에서 발표한 조사는 시대의 문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백범이 세 사람과 발전시킨 관계의 모습은 서로 다릅니다. 이동녕에게서는 존경을, 안공근에게서는 위험한 일을 맡기는 신뢰를, 엄항섭에게서는 오랜 세월 곁을 지키는 지극한 정성의 시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동(大同)을 위한 헌신’입니다. 이들 세 사람 곁에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유형에 들어가지 않는, 그러나 김구의 궤도를 끝까지 벗어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 9. 김구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직언한 동지 — 조완구
위 세 사람의 이름을 꼽고 나면 남는 이름이 있습니다. 김구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항상 마주치게 되는 조완구입니다. 그는 김구보다 다섯 살 아래지만 임정에는 더 일찍부터 몸담은 원로였습니다.
1947년 5월 경교장 앞뜰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조완구(왼쪽)와 김구. 미국 LIFE 지 사진기자 존 플로리아(John Florea)가 촬영했다.
그는 어려울 때도 김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독립기념관 자료는 조완구가 1932년 내무장으로서 이동녕, 김구, 조소앙, 김철 등과 함께 윤봉길 의거를 극비리에 수행했다고 정리합니다. 의거 뒤에는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함께 가흥과 항주로 몸을 피했습니다. 1935년 민족혁명당이 결성되며 임정이 해체될 위기에 놓였을 때, 조완구는 임정 해체를 전제로 한 단일 신당운동에 처음부터 반대했습니다. 송병조, 차리석과 함께 임정을 지켰고, 그해 11월 재정비된 정부에서는 이동녕 주석, 조완구 내무장, 김구 외무장의 체제가 짜였습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국국민당도 만들어졌습니다.
김구와 조완구는 대조적입니다. 조완구는 작은 키에 몸은 수척했지만, 강단 있는 선비형이었습니다. 신장 180cm를 넘는 김구와 나란히 서면 체구의 대비가 컸고, 성정도 달랐습니다. 김구는 과묵했고, 조완구는 참지 못하는 쪽이었습니다. 김구가 안공근을 지나치게 감싸면 곧바로 직언을 퍼부었습니다. 1945년 8월 일제 패망 직후 임정 내 소수파인 김원봉 계에서 임정 개조와 국무위원 총사직을 요구하자, 그는 우리가 27년간 임정을 지킨 것은 잘나서가 아니라 못나서 지킨 것”이라며 중대한 시기에 터져 나오는 분열적인 소리를 봉쇄했습니다.
중국 임정에서 김구와 뜻을 같이 한 동지들. 앞줄 왼쪽부터 조완구 신익희 조소앙, 뒷줄 최동호 엄항섭. 1946년 미국 라이프 지 아이젠스타트(Alfred Eisenstaedt)가 촬영한 사진이다.
조완구는 김구 곁에서 조직과 돈을 조용히 관리했습니다. 결정적인 장면은 1948년입니다. 남한 단독선거를 둘러싸고 한독당 안에서도 의견이 갈렸을 때 남북협상 참여를 이끈 중심에는 김구, 조완구, 엄항섭이 있었습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됐을 때 조완구는 한국독립당의 책임을 맡아 당을 수습했습니다. 신성모 국방방관이 백범의 빈소에 가장 먼저 나타나자 동태를 살피기 위한 방문임을 간파한 조완구는 울부짖으며 항의하다 까무러쳤습니다. 백범만 죽이지 말고 우리도 다 죽여 함께 묻어라!” 이듬해 한국전쟁 중에 납북된 그는 1954년 10월 27일 평양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고, 통일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한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10. 김구에게 친구란 무엇인가
김구에게는 수많은 동지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스승 같은 사람이 있었고, 정치적 협력자가 있었으며, 실무를 맡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까웠다가 멀어진 사람도 있었고, 같은 길에서 출발했다가 갈라선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다른 길을 걷다가 생애 후반 결정적인 순간에 같은 길에서 만난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과 긴 교류의 과정에서 김구는 항상 공적인 것을 우선했습니다. 그는 사사로운 걸 표현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가 자식들에게 ‘지금은 어려운 시기이니 우리 집안을 번성하게 만들어라’ 혹은 ‘내가 죽기 전에 너희를 보고 싶다’는 식의 사사로운 감정을 담아 쓴 글은 지금껏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그의 차남 김신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곤명에 있는 서남연합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때 김구는 멀리 떠나는 아들을 위해 윤봉길 의거 후에 알게 된 서남연합대학 교수 차량초(査良釗 자량자오)에게 명함 뒤 공백에 메모를 써주었다고 합니다.
돈아(豚兒)가 학교를 그쪽으로 가는데, 아무것도 모르니 잘 돌봐주십시오.” 김구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자식을 부탁한 경우는 그때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김신은 이 대학에 다니며 빈대와 이 때문에 큰 고생을 했고, 말라리아를 100번 정도는 앓은 것 같다고 회고록에 썼습니다.
김구에게 진정한 친구는 오래 알고 지내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독립이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정치적으로 협력하는 건 기본입니다. 그에게 친구란 사사로운 것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으며, 올곧은 방향과 행동이 필요했습니다. 이 시간 속에서 김구와 그의 친구들은 모진 고통을 견디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기록들이 말해주는 바 우리 근·현대사에서 민족 앞에 자신을 내놓은 가장 으뜸가는 사람은 단연 백범이라는 사실입니다.
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