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흙으로 빚은 군대가 지켜 서게 만든 진시황 [사회혁신] 조나라 인질의 아들, 왕좌에 앉다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의 본명은 영정(嬴政)이다. 아버지 장양왕이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시절 태어났으니, 시작부터 팔자가 순탄치 않았다. 13세에 진나라 왕위에 올랐을 때만 해도 옆 나라 사람들은 저 꼬맹이가 뭘 하겠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꼬맹이, 법가(法家) 사상가 이사(李斯, 기원전 280~208)를 재상으로 앉히고 10년 만에 한·조·위·초·연·제 여섯 나라를 차례로 집어삼켰다. 기원전 221년, 마침내 천하는 하나가 되었고 영정은 삼황(三皇)의 덕과 오제(五帝)의 공을 겸했다 며 스스로 황제 라는 칭호를 만들어냈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황제, 그래서 시황제(始皇帝) 다.
진시황을 상상해 그린 19세기 그림(위키피디아)
도량형은 통일했는데, 생각까지 통일하려 하니
진시황의 업적 목록은 화려하다. 문자와 도량형과 수레바퀴 폭을 통일했고, 전국시대 여러 나라가 제각각 쌓았던 성벽을 이어 만리장성의 뼈대를 만들었다. 지방호족에게 땅을 나눠주던 낡은 봉건제를 버리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제를 도입했다. 이것이 이후 2천 년 중국 왕조의 기본설계도가 되었으니, 시스템 설계자로서는 확실히 천재였다.
문제는 그가 통일 을 국경선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재상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하가 이미 안정됐는데, 선비들이 옛것만 배워 지금 정치를 헐뜯고 백성을 미혹시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각도 통일합시다 였다. 그 결과가 기원전 213년의 분서(焚書), 농업과 의약 책을 뺀 나머지를 몽땅 불태운 사건이다. 이듬해에는 자신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유생 460여 명을 산 채로 묻어버렸다. 이게 그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다.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扶蘇, ?~기원전 210)가 천하가 겨우 안정됐는데 이런 강경책은 민심을 흔든다 며 말렸지만, 아버지는 듣지 않고 아들을 변방으로 쫓아버렸다. 효도보다 검열이 먼저였던 셈이다.
18세기 진시황 초상화(위키피디아)
불로장생을 좇다 길 위에서 죽다
권력의 정점에 선 인간이 두려워하는 건 딱 하나, 늙어 죽는 것이다. 진시황도 예외는 아니어서 방사(方士)들을 사방에 풀어 불로초를 찾게 했고, 수은을 영약이라 믿고 마셨다는 설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수은이 그를 더 빨리 저승길로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210년, 전국 순행 도중 시황제는 객사한다. 평생 영원 을 좇던 사람이 결국 길바닥에서 숨을 거둔 셈이니, 역사는 가끔 이렇게 잔인한 농담을 던진다.
진시황을 향한 형가(荊軻)의 암살 시도 장면. 형가(왼쪽)가 진시황의 시의(왼쪽 배경)에게 붙잡혀 있고, 암살에 사용된 단검은 기둥에 박혀 있는 모습. 진시황(오른쪽)은 옥벽(玉璧)을 들고 있으며, 그의 병사 중 한 명(맨 오른쪽)이 황제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 3세기 동한 시대의 석각 탁본(위키피디아)
환관과 승상의 야합, 15년 만에 무너진 제국
시황제가 죽자 진짜 드라마가 시작된다. 환관 조고(趙高, ?~기원전 207)는 승상 이사를 꼬드겨 황제의 유서를 조작했다. 원래 후계자였던 부소에게는 가짜 명령을 보내 자결을 강요했고, 대신 어수룩한 막내아들 호해(胡亥, 기원전 230~207)를 2세 황제로 세웠다. 권력을 나눠 가진 조고와 이사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고는 곧 이사마저 모함해 허리를 잘라 죽이고, 나중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 는 지록위마(指鹿爲馬) 고사까지 남기며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진실을 말하는 신하가 사라진 조정에서 나라가 온전할 리 없다.
한편 백성들은 만리장성과 아방궁과 시황제의 무덤, 그 유명한 병마용갱을 짓느라 등골이 휘어졌다. 기원전 209년, 변방으로 끌려가던 농민 진승(陳勝, ?~기원전 208)과 오광(吳廣, ?~기원전 208)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 를 외치며 봉기했다. 불씨는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졌고, 그토록 견고해 보이던 제국은 통일 후 겨우 15년 만에 잿더미가 됐다. 국가를 무너뜨린 건 외적이 아니라 등골이 휜 백성이었다.
황제 순행 중인 진시황을 묘사한 현대 조각상(위키피디아)
한국에서 되새겨볼 것
진시황이 남긴 건 만리장성과 병마용갱만이 아니다. 검열로 여론을 막고, 측근 두 사람이 결탁해 진실을 가리고, 그 자리를 지키려 발버둥 치다 함께 무너진다 는 권력의 고전적 패턴도 함께 남겼다. 비판하는 목소리를 땅에 묻어버리면 당장은 조용해 보여도, 그 침묵은 반드시 다른 곳에서 터진다. 지록위마의 조정에서는 아무도 사슴을 사슴이라 말하지 못했고, 그 대가는 조정 전체의 몰락이었다.
2024년 12월 3일 밤, 한국에서도 국민의 눈과 귀를 막으려는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가 있었다. 다행히 그 밤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권력이 비판을 두려워해 언론과 여론을 틀어막으려 할 때 어떤 역사가 반복되는지는 이미 2천 년도 더 전에 증명이 끝난 셈이다. 시황제의 무덤 곁을 지키는 흙 병사 8천 명은 아무 말이 없지만, 그가 살아 있을 때 침묵을 강요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 읽히고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청나라 말기에 그려진 진시황의 상상도(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