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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도를 다시 그린 초원의 지배자 칭기즈칸
[뉴스]
세계사에서 이 사람 한 명 때문에 지도가 통째로 다시 그려졌다 고 할 만한 인물은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칭기즈칸(Genghis Khan, 1162년경~1227년)이 그 중 첫 손가락에 꼽힌다.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심지어 히틀러도 이 사내가 정복한 땅의 넓이 앞에서는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 한창 때 몽골제국의 영토는 아시아와 유럽을 합쳐 지구 육지면적의 5분의 1에 육박했다니, 지금으로 치면 한 사람이 미국과 중국, 러시아를 동시에 접수한 셈이다. 그런데 이 사내, 시작은 정말 초라했다. . 원 나라 시대 화첩에 수록된 1278년 칭기즈칸 초상화(위키피디아). 버림받은 소년, 초원을 접수하다 본명은 테무친. 아버지 예수게이는 그가 아홉 살 때 원수 부족에게 독살 당했고, 어머니 호엘룬은 부족들에게 버림 받아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떠나야 했다. 요즘 말로 하면 한부모 가정에 재산도 인맥도 없는 완벽한 흙수저였던 셈이다. 초원에서 다람쥐과에 속하는 포유류 동물인 마멋(Marmot)을 잡고 나무뿌리를 캐먹으며 컸다는 이 소년은 심지어 이복형을 활로 쏴 죽인 전력까지 있는, 결코 순한 성정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원수 같던 부족들을 하나하나 접수하고 동맹을 맺고 배신하고 또 접수하기를 반복하더니, 1206년 몽골 북동부와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을 흐르는 오논 강(Onon River) 변에서 열린 쿠릴타이(부족장 회의)에서 마침내 칭기즈칸 , 즉 우주의 지배자 라는 칭호를 받는다. 흙수저에서 황제로 가는 데 걸린 시간이 50년이었다. 요즘이라면 자기계발서 표지에 큼직하게 실릴 이야기지만, 정작 본인은 평생 문맹이었다는 점도 짚어둘 만하다. 글도 못 읽던 사내가 대제국의 설계도를 머릿속에서 그려낸 셈이니, 학벌이 곧 능력이라 믿는 이들에게는 다소 민망한 반례다.   테무친괴 토굴 칸, 15세기 자미 알타와리흐(Jami Al-tawarikh) 필사본애 실린 그림(위키피디아). 정복자, 그런데 조폭 두목만은 아니었다 칭기즈칸 하면 살육과 파괴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실제로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이란)의 호라즘 제국을 짓밟을 때는 저항한 도시를 통째로 지워버리는 식으로 응징했으니 틀린 이미지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상당한 행정가이기도 했다. 야사라는 대법전을 만들어 왕족이든 평민이든 같은 죄에 같은 벌을 적용하도록 했고, 능력만 있으면 출신 부족을 따지지 않고 장군 지위를 맡겼다. 주요 도로마다 일정 간격으로 역(驛)과 참(站)을 설치하여 공문서 전달, 군사정보 수송, 관리숙박, 물자운송을 지원하게 했다. 국가 교통·통신체계인 역참제(驛站制)를 완성해 며칠이면 제국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소식이 전해지게 했고, 종교는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불교든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들은 그의 치세를 두고 한 여인이 금덩이를 이고 제국을 횡단해도 안전하다 고 떠들었을 정도다. 물론 그 안전을 위해 저항한 도시는 초토화됐으니, 공포와 질서가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 있었던 셈이다. 훗날 이 길을 따라 유럽 상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원나라 궁정까지 찾아와 견문록을 남긴 것도 칭기즈칸이 깔아놓은 이 안전망 덕분이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후손들이 사업을 착실히 확장했다. 셋째 아들 오고타이칸(Ögedei Khan, 1186~1241)은 헝가리와 폴란드 코앞까지 밀고 들어갔고, 손자 쿠빌라이칸(Kublai Khan, 1215~1294)은 1271년 원나라를 세워 중국대륙까지 통째로 삼켰다. 또 다른 손자 훌라구 칸(Hulagu Khan, 1218년경~1265년)은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시켜 500년 이슬람 문명의 심장을 멈춰 세웠다. 한 가문의 유전자가 이토록 넓은 땅을 갈아엎은 사례는 인류사에 다시 없다.   테무친이 칭기즈칸으로 추대되는 모습. 15세기 자미 알타와리흐 (Jami al-tawarikh) 필사본의 그림. 오른쪽에 야크나 말의 꼬리로 만든 깃발인 투크 (tuq)가 세워져 있는데, 그림 속의 흰색 투크는 평화를 상징하며 검은색 투크는 전쟁을 상징한다.(위키피디아) 고려도 피해가지 못했다 남의 나라 옛날 이야기로만 여기면 곤란하다. 고려도 1231년부터 몽골의 침입을 받아 이듬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항전에 들어갔다. 왕실과 무신정권은 섬 안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지냈지만, 본토 백성들은 스물여덟 해 동안 아홉 차례에 걸친 침공에 그대로 노출됐다. 논밭은 불탔고 사람들은 끌려갔다. 이 와중에 1238년에는 경주의 황룡사 구층목탑이 통째로 불탔다.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져 600년 가까이 나라를 지켜준다고 믿었던 상징물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된 것이다. 결국 1259년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었는데, 그마저 항복을 거부한 삼별초가 1270~1273년 강화도, 진도, 제주도를 옮겨 다니며 마지막 저항을 이어갔다. 배중손이 이끈 이 항쟁은 끝내 여몽 연합군에 진압됐지만, 오늘날까지도 외세에 맞선 항쟁으로 기억된다. 이후 충렬왕(재위 1274~1308)은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어 왕조를 유지했고, 고려는 원나라의 두 차례 일본 원정에 배와 군사와 뱃사공까지 강제로 동원해야 했다. 지배층은 새 질서에 편입돼 부마국이라는 지위로 명맥을 이었지만, 그 청구서는 고스란히 백성이 떠안았다. 800년 전 불탑이 불에 타 사라진 절터가 힘없는 나라가 치른 대가를 무심하게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산악 지대에서 중국군과 싸우는 칭기즈칸의 모습이다. 이는 14세기 서사시 모음집에 포함된 아흐마드 타브리지(Ahmad Tabrizi)의 샤한샤나마(Shahanshahnama) 속 한 장면을 묘사한 세밀화이다. 위키피디아 오늘 한국에 남기는 질문 칭기즈칸의 성공비결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혈연과 출신을 따지지 않은 인사, 다른 하나는 지배층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한 법이었다. 초원의 서자였던 사내가 세운 이 두 원칙 앞에서는 왕족이든 평민이든 재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지금 한국사회를 돌아보면 이 두 가지가 여전히 낯설다. 학연, 지연, 혈연이 능력보다 앞서는 인사 관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에서 드러났듯 법 위에 서려 한 이들도 있었다. 800년 전 몽골초원에서 만들어진 그 단순한 두 문장, 능력 있으면 되고, 법은 위아래가 없다 는 원칙이 지금도 한국사회의 숙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검찰이든 군대든 재벌이든, 자기 식구는 봐주고 바깥사람에게만 엄격한 이중 잣대가 여전히 뉴스를 채우는 걸 보면, 초원의 정복자가 오히려 더 공정했던 것 아니냐는 질문도 던져볼 만하다. 칭기즈칸의 제국은 그의 사후 백 년도 못 가 후손들의 다툼 속에 갈라지고 흩어졌다. 아무리 넓은 정복지도, 아무리 정교한 법전도 후계자들이 그 원칙을 저버리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교훈이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초원의 정복자에게도, 오늘의 권력자에게도 마찬가지다.   15세기 마르코 폴로의 ‘경이의 서 (Livre des merveilles) 필사본에 포함된 삽화. 임종을 앞둔 칭기즈칸이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모습을 그렸다. (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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