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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내일을 우리가 만들어 나갑시다”…뜻밖의 결기
[사람들]
에워싼 벽이 좁혀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력이 심해지면, 상상력은 그만큼 더 증폭된다고 하지 않던가?” 김민기가 전하는, 을 작곡하고 제작할 때의 상태였다. 각오는 했지만, 그만큼 압박감은 컸다. 작업이 구체화할수록 신경은 날카로워졌고, 긴장감은 더 커졌다. 그러나 긴장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오기가 생기고 더 집중했다. 그에 따라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어차피 한세상 아닌가, ‘두어라, 가자’!” 긴장이 얼마나 컸던지, 막판 결국 폭발했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를 아는 이들로서는 상상도 못 한 일을 그는 저질렀다. 음악극이 끝나는가 싶은데, 유신체제의 주구들이 듣기에 ‘악질적인 선동’이라고 할 문장이 이어진다. 스무 번째 노래 ‘아침 바람 찬바람에’가 끝난 뒤다. 뜻밖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김민기였다. 자 이만한 일로 낙심하지 맙시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한두 번의 실패는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을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구도 해결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이 나라의 살림을 제일 앞에서 책임지고 있는 산업 근로자 여러분, 여러분이 떳떳한 이 나라의 주인으로 행세할 때 이 나라의 내일 또한 떳떳할 것입니다. 노동조합은 바로, 근로자들이 주인행세를 할 수 있는 합법적이고도 효과적인 방편입니다. 막연한 분홍빛 꿈을 깨어나서, 찬란한 내일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갑시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내용은 단호했다. 격문이나 다름없었다. 1979년 2월 박형규 목사의 서울제일교회에서 채희완의 지도로 무대에 오른  공장의 불빛 초연 장면. 사진출처: 나무위키 동영상 갈무리 이 처음 공연된 것은 1979년 2월 서울 중구 서울제일교회(담임목사 박형규) 예배당에서였다. 채희완이 마당극 형태의 노래굿으로 연출하고 안무를 맡았다.마당극 운동 집단인 ‘한두레’의 홍성원, 박우섭, 김봉준, 박종관, 임명구, 이연수 등과 기청탈반(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연합회 탈춤반) 회원들이 대거 출연했다. ‘기청탈반’은 1976년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청년연합회의 문화선교분과가 사회선교를 위해, 대학생 춤꾼들로 꾸린 단체였다. ‘제작자’ 신동수는 이날 공연을, 당시 시판되기 시작한 비디오로 녹화했고, 필요로 하는 단체나 사람들이 저마다 연희와 공연을 조직하는 데 참고할 수 있도록 보급했다. 당시 익산에 머물던 김민기도 공연장을 찾아왔다. 그러나 경찰이 이미 교회를 에워싸고 있어 공연을 보지는 못했다. 경찰은 교회와 마찰을 피하려 공연이 끝나고 나서 제작진을 덮쳤다. 채희완 등 주요 제작진은 경찰의 봉쇄를 알고 공연 끝나기 직전 자리를 떠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제일교회는 정권의 감시와 탄압 그리고 봉쇄 때문에 오갈 데 없는 집회나 행사, 공연이 열릴 수 있었던, 소수의 피난처 가운데 하나였다. 제일교회는 역사적 예수, 해방의 예수를 세상에 전해온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소속이었다. 서울제일교회가 이렇게 대사회 발언의 선봉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박형규 목사의 견결한 헌신 덕분이었다. 박 목사는 4·19혁명 당시 이승만 정권의 흉탄에 맞아 죽어가는 학생들의 피를 보며 개인의 구원에서 벗어나 사회의 구원, 역사의 구원에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박 목사는 세상을 뜰 때까지 이 다짐을 실천했다. 박 목사는 1973년 처음으로 ‘유신체제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을 시작으로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모두 여섯 번 구속됐다. 박 목사와 서울제일교회가 오죽 눈엣가시였으면 전두환 정권은 1983년 깡패와 부랑아 등을 동원해 교회를 점거하고, 박 목사와 신도들을 교회에서 내쫓았다. 그로 말미암아 박 목사와 그를 따르는 신도들은 6년간이나 거리에서 예배를 봐야 했다. 이 전무후무한 ‘노상 예배’를 지켜본 독일의 ‘행동하는 신학자’ 울리히 두흐로 하이델베르크 대학 신학 교수는 이런 내용의 글을 써서 독일과 유럽에 알렸고, 제일교회의 거리 예배는 세계 교회가 주목하는 성소가 되었다. 서울제일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다. 온 우주로 열려 있는 교회다. 이보다 더 큰 교회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은 1979년 말 광주 ‘들불야학’의 1회 졸업식을 기념하는 공연작이 되기도 했다. 1980년 5월 광주 항쟁 때 윤상원 등 대다수 구성원이 최전선에 뛰어들었다가 희생당한 바로 그 야학이다. 야학 졸업생들은 테이프 반주 부분을 틀어놓고, 노래를 배우고 동작을 연습했다. 1980년대 은 이런 식으로 대학가, 노동조합, 기독교 단체 등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 해방과 노동 해방을 추구하던 이들에 의해, 소규모 알음알음으로 꾸준히 공연됐다. 1980년 미국에 유학 중인 김석만은 카세트테이프와 비디오테이프를 반입해 버클리대 학생들과 뮤지컬로 제작해 공연했다. 그 장면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아 한인 TV에 방영했다. 버클리 대학의 아시안 아메리칸학 전공자 일레인 킴 교수는 한동안 이 비디오테이프를 강의 교재로 사용했다고 한다. 2022년 11월 서울 창신동 뭐든지소극장에서 무대에 오른 창신, 공장의 불빛 공연 장면. 사진출처: 국민일보(아트브릿지 제공) 2022년 11월엔 창신동 봉제거리의 ‘뭐든지 소극장’에서 이란 타이틀로 공연됐다. 아트브릿지 대표 신현길, 창신동 주민 연출가 박정근, 40년 넘게 봉제사로 일해온 노동자를 비롯한 지역 주민 그리고 대학로 배우들이 힘을 합쳐 만든 극단이자 공연장이었다. 조촐한 무대였지만, 이 극장 무대에 올려진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김민기는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한다는 말만 듣고 바로, ‘그건 그분들의 삶이고 이야기’라며 공연을 허락했다. 김민기의 작품들이 대개 그랬듯이, 은 그가 출산은 했으되, 그의 호적에 출생 신고조차 못 한 작품이었다. 뮤지컬 연출, 제작자이자 소극장 대표가 되어서도 그는 이 작품을 한 번도 무대에 올리지 못했다. 그는 술 한 잔 마시면 평소 하지 않던 이런 하소연을 몇 차례 했다. (만 생각하면) 불행한 때 태어난 자식을 어디 보육원에 맡겨놓고 아직 못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녹음을 다시 해서라도, 리메이크만은 하고 싶다. 그러나 과연 어떤 음반사가 이 음반을 내겠다고 할 것인지. 더군다나 무대에 올리려면 손해 볼 게 뻔한 데 누가 제작비를 지원해 줄까?” 2004년 정재일이 리메이크한 공장의 불빛 음반 발매 기념 쇼케이스에서 연주자들이 음반 수록곡을 공연하는 모습. 정재일(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 분홍색 옷)이 직접 반주에 참여했다. 2004.10.12  연합뉴스 다행히 의 리메이크 음반은 2004년 10월 ‘DVD와 CD 각 1장 세트’로 제작, 발매됐다. 박정희가 피살되기 1년 전 작업을 시작해 카세트테이프로 제작 배포된 이후 26년 만이었다. DVD는 1978년 처음 복제한 테이프를 음원으로 삼아 소리를 다듬고 음질을 높인(리마스터) 노래를 동일방직 사건 등 당대의 상황을 보여주는 민중미술이나 사진 작품, 현장 기록물 영상과 함께 담은 것이었다. 마스터 테이프가 있었다면 음질이 한결 좋았겠지만, 3부나 제작한 원본은 끝내 한 부도 찾지 못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살리려 해도 되살릴 수 없었다. 원본 3부를 제작한 것은 ‘그들이’ 음원을 가만둘 리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1집 앨범 가 그 꼴을 당했다. LP판은 모두 회수돼 파쇄됐고, 음원은 압수당해 되찾지 못했다. 뒷날 시중에 돌아다니는 건 대부분 복제한 것이었다. 제작 당시 김민기의 큰 고민 가운데 하나도 ‘음원’을 살리는 일이었다. 훗날 을 누가 어떻게 기억할지 몰라도 그 음원은 그의 한 시대, 노동의 한 시대, 나아가 대한민국의 한 시대를 증언하는 ‘역사의 노래’ ‘노래의 역사’가 될 터다. 그래서 마스터 테이프를 3부 제작했고, 그의 어눌한 재주를 다 동원해 ‘그들이’ 찾지 못할 곳에 여기저기 숨겼다. 그러나 아무리 잘 숨긴들, 그가 기억하고 있다면 중정의 고문에 실토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알 수 없는 곳에’ 감췄다. 숨기고는 숨긴 곳을 기억 속에서 지우기 위해 자기 체면을 걸고 또 걸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전두환의 군사 독재까지 종식되고, 민주 노조 설립 운동이 노동계를 휩쓸고, 노동권의 법적, 제도적 보호장치와 적정 임금 쟁취를 위한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복각 요청이 쏟아졌다. 그동안 재생한 테이프를 복제하고 또 복제하다 보니 음질이 엉망이었다. 그러나 마스터 테이프는 오리무중, 아무도 찾아낼 수 없었다. 얼마나 집요하게 지웠는지, 김민기는 마스터 테이프 숨긴 곳의 기억을 되살릴 수 없었다. 훗날 1부를 맡았다는 사람이 자수했다. ‘제작자’ 신동수였다. 문제는 1970년대 주요 운동의 배후이기도 했던 신동수였던 탓에 그는 ‘기억해서는 안 될 기억을 분쇄하는데’ 도사였다는 것이었다. 그가 기억이 멀쩡한 상태에서 체포되면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다쳤다. 신동수도 마스터테이프를 찾기 위해 고심참담 애를 썼지만, 끝내 기억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복제본을 복제하는 일을 막으려면 김민기가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아 녹음하면 됐다. 비용은 들겠지만, 그 정도 추렴하지 못할 김민기가 아니고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침묵하기만 했다. 사람들은 궁금했다. 은 돌아보고도 싶지 않은 ‘자식’이라도 되는 걸까? 그가 침묵을 깬 건, 눈여겨보던 정재일의 음악성을 확인한 뒤였다. 정재일은 18살 때인 2000년대 초 ‘긱스’ 시절, 가수 이적이 들려줬던 김민기의 ‘백구’를 듣고 ‘벼락 맞은 느낌’을 받았다는 청년 음악인이었다. 다음은 정재일이 2019년 JTBC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음악을 멋지고 심오하고 장대하게 하는 데 심취해 있었는데, 김민기 음악은 기타 하나, 목소리 하나만으로 100명의 오케스트라를 뛰어넘는 감동을 줬다.” 정재일은 10대 중반부터 그룹 ‘긱스’ ‘푸리’ 등에서 활동하며, 음악계에서 ‘못 다루는 악기가 없고, 작곡 편곡까지 잘하는 천재 소년’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나이 16살 때인 1998년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의 영화음악 제작에 참여했다. 노래 ‘백구’의 충격을 계기로 정재일은 학전 콘서트의 무대에 서기 시작했고, 아예 공연팀으로 들어가 라이브 밴드로 활동했다. 2003년엔 애니메이션 의 영화음악을 맡았다. 김민기가 2004년 10월 12일 서울 삼성동 백범아트홀에서 열린 정재일 버전 공장의 불빛 발매 , 도서 김민기 출판 기념행사에서  미소를 머금고 공장의 불빛 쇼케이스를 지켜보고 있다. 2004.10.12 연합뉴스  정재일과의 만남은 김민기의 음악 인생에서도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2003년 의 리메이크를 부탁했다. 당시 그는 원작은 생각도 하지 말고 ‘정재일 본’으로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김민기는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마음을 썩이던 과제를 해결할 인물을 비로소 찾은 것이다. 그는 이 이미 자기 손에서 떠났다고 생각했다. 노래도 시대와 역사의 산물. ‘김민기의 ’은 1970년대 유신체제라는 괴물의 야만적인 노동 탄압 속에서 탄생한 ‘노래굿’이었다. 그때의 감성과 시각과 열정으로 돌아갈 수도 없거니와 그런 식으로 다시 손질된 노래라면 2000년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때 그 노래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보존하되. 지금의 시대와 감성 그리고 시각에 맞게 개조되어야 한다. 그 적임자가 바로 정재일이었다. 이와 관련해 김민기는 2018년 을 연장공연에서도 손을 뗐다. 대신 정재일에게 음악감독을 맡겼다. 그가 제작한 은 아이엠에프 사태가 덮쳤던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의 자화상이었다. 따라서 새로 출발하는 이라면 2000년대의 사회상이어야 했다. 눈에 띄는 건 김민기가 리메이크를 맡기면서 사실 자신의 뒤를 이어갈 사람으로 정재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정재일은 연장공연에 이어 2021년엔 김민기의 번안 뮤지컬 의 주제곡을 다시 작곡하고 배경음악도 지으며 학전의 음악감독으로서 그 역할을 넓혀가고 있었다. 정재일 판본 CD에는 정재일이 편곡하고 이지영, 이소은, 이적, 이승열, 전인권 그리고 합창단 A, B가 연주한 노래들이 담겼다. DVD엔 카세트테이프 속 노래 21곡이 그대로 리메이크돼 담겼지만, 정재일 판본 CD엔 20곡이 담긴 건 그 때문이다. 정재일 판본에선 절정부인 ‘노조 설립’을 전인권, 정재일과 두 합창단이 노래했고, 마지막 곡 ‘이 세상 어딘가에 2’는 이소은, 정재일, 이승열, 이지영과 합창단 B가 노래했다. 정재일이 2004년 리메이크한 노래굿 공장의 불빛 앨범 이미지. 리메이크 앨범이 나온 뒤 김민기는 이렇게 말했다. 은 그동안 낳아 놓기만 하고 마치 보육원에 버린 기분이 드는 ‘내 마음의 빚’이었다. 다른 작품은 앨범으로나 무대로나 출생 신고를 했는데 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아직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모양을 갖춘 앨범으로 나오니 그래도 마음이 좀 가볍다.” 은 26년 만에 호적에 오르긴 했지만, 김민기가 세상 떠날 때까지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김민기의 가장 큰 아쉬움 가운데 하나였다. 정재일은 연장공연 이후 아카데미상 수상작인 (2019년) (2021년)의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세계에 그 이름을 알렸다. 2023년 영국의 유명 클래식 음반사 데카(Decca)에서 앨범 ‘리슨(Listen)’을 발매했고, 10월엔 런던 바비칸 센터에서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 런던 심포니와 협연했다. 정재일이 2023년 12월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가진 단독 콘서트에서 김민기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사람 노랫말에 맞춰 기타 반주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클래식비즈    2023년 12월 정재일 콘서트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렸다. 공연은 런던 공연과 대동소이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의 OST와 그가 작곡한 피아노곡, 그리고 국악 연주자들과 함께 한 곡들까지, 전천후 음악가로서 자신의 면모를 보여줬다. 연주곡 하나하나가 인상적이지만,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앙코르 연주 때였다. 정재일의 기타 반주로 김민기의 노래 ‘아름다운 사람’ 인트로가 흘러나왔다. 다들 정재일이 부르겠거니 했는데, 난데없이 낮고 담담하고 따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민기였다. 객석은 술렁였다. 무대엔 김민기가 없었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도 김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김민기의 육성을 샘플링한 노래에 정재일이 기타로 반주한 것이었다. 당시 김민기는 말기 암과 투병하고 있었다. 공개적인 자리엔 평소보다 더 나타나지도 않고 나타나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청중은 정재일을 통해 이 사실을 알았고, 극장 안은 바다에 깔린 달빛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김민기는 그날 공연장에 있었다. 뒷자리 한구석에서 모자와 마스크로 정체를 감춘 채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SBS 김수현 문화담당 전문기자가 그런 그를 목격했다. 당시 김수현 기자는 SBS 방송프로그램 ‘커튼콜’에서 이런 소감을 전했다. 정재일의 기타 하나와 김민기의 목소리 하나로 100명의 오케스트라를 뛰어넘는 감동을 줬습니다. 그러고 보니 김민기가 곧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구’를 처음 들었을 때 정재일이 받은 느낌을 그대로 소환한 것이었다. 정재일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것도 김수현과의 그 대담 자리에서였다. (그분은) 어린 시절 여러 음악을 찾아 방황하던 시기에 나를 새로운 음악의 세계로 이끈 예술가였습니다” 선생님은 내 음악의 아버지였습니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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