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 필사본을 찾는 기이한 추적 드라마 [뉴스] 오동진 영화평론가
단테 (알리기에리)’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단테를 정확히 아는 사람도 없다. 단테의 『신곡』은 (한국 같은 곳에서라면) 대학입시에 나오는 책 제목이기 때문에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이 『신곡』을 제대로 읽은 사람 역시 많지 않다.
예술의 영성을 찾아가는 지루할지도 모르는 여정
새 영화 을 만든 줄리안 슈나벨은 장 미셸 바스키아와 동시대의 화가이다. 슈나벨도 요절한 바스키아처럼 기존의 캔버스 개념을 탈피해 자신만의 캔버스를 만들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미술과 그림은 어디든 존재할 수 있다, 곧 깨진 접시 같은 곳에도 구현될 수 있다는 식이었다. 슈나벨은 바스키아 등과 함께 미국 현대 미술계의 신표현주의 시대를 열었다. 슈나벨이 유명 영화감독이 된 것은, 그림과 영화가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예술적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과 예술이 추구하는 영성은 사람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줄리안 슈나벨은 그 문제에 천착한 듯 보이고 은 그 해법을 찾아가는 여정 같은 작품인 셈이다. 닉 토시즈가 2002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도 닉 토시즈인데 아마 그런 빙의(憑依)의 느낌이 슈나벨을 매료시켰을 것이다. 자신도 종종 자신이 그리는 극중 인물과 깊숙한 동일화를 경험하곤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 은 단테의 『신곡』 같은 운명이 될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에 대해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를 2시간 반 동안(정확한 러닝타임 153분) 집중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줄리안 슈나벨의 영화적 명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을 정작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부 사람들은 이 영화가 지루하다고 말한다.
마피아 킬러와 함께 『신곡』 원본 찾아나선 퇴락 작가
영화는 두 개의 시대 배경 속에서 진행되는 척하지만 사실 주 시대 배경은 1998년~2001년이다. 뉴욕에 사는 주인공 닉 토시즈(오스카 아이작)에게 마피아 두목인 조 블랙(존 말코비치)이 접근해 어떤 일을 맡기려 하고 닉이 그들로부터 도망쳐 호텔에 숨어 지낼 때 TV에서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알카에다의 비행기 자폭 테러가 벌어지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닉이 마피아 보스 조에게 의뢰받는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테의 『신곡』 원본의 진품 여부를 감정하는 일이다. 닉은 한때 할리우드 영화 각본을 써 돈을 벌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냥 퇴락한 작가일 뿐이다. 다만 그는 단테 전문가로 단테에 미쳐 있고 『신곡』의 시구를 줄줄 외는 인물이다.
어쨌든 닉 토시즈는 조가 짜 놓고 계획한 대로 잔혹한 킬러인 루이(제라드 버틀러)와 함께 또 다른 마피아인 돈 레코(프랑코 네로)가 가지고 있다는 『신곡』을 감정하기 위해 시칠리아로 가 원본을 탈취하고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살해한다. 심지어 자는 개까지 죽인다. 물론 이 살인 행위는 모두 루이가 벌인다. 닉과 루이가 탄 차가 시칠리아의 낡고 오래된 저택 입구에 들어서는 시퀀스는 명백히 코폴라의 영화 에서 비토 코를레오네(로버트 드니로)가 자신이 죽여야 할 시칠리아 마피아 돈 치치오의 집에 도착해 벌이는 학살 장면에서 가져온 것이다. 마치 그 장면의 오마주처럼 찍었다는 얘기이다.
영화 은 현재를 그릴 때는 흑백이었다가 단테의 시대인 1308년~1321년인 700년 전을 보여 줄 때는 컬러로 바뀐다. 현재가 흑백화면인 것은 아마도 살벌한 폭력 장면들이 난무하는 갱스터 무비 분위기여서 이걸 필름 누아르 풍으로 찍겠다는 것이 감독 슈나벨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단테의 시대가 1308년~1321년으로 특정된 것은 그가 교황의 절대권력에 도전하며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다가 행정관 자리에서 파직되고 피렌체에서 추방된 후 이탈리아 전역을 떠돌며 신곡 3부작, 곧 지옥 연옥 천국 편을 집필한 기간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1321년 죽었다.
탐욕으로 버무려진 사기행각과 폭력, 그리고 만난 사랑
영화의 기둥 줄거리는 닉 토시즈의 사기(궁극적으로 마피아로부터도 단테의 필사본을 가로채려는 것)와 살인청부업자 루이가 가차 없이 저지르는 폭력으로 채워진다. 여기에 또 다른 폭력이 하나 더 얹히는데, 루이보다 더 잔인하고 보다 전문적인 킬러 로사리오(제이슨 모모아)가 저지르는 일들이다. 로사리오는 결국 닉을 잡아 와 단테의 필사본이 어디 있는지를 캐물으며 그의 손톱을 뽑고 전기고문을 한다. 닉은 로사리오에게 잡히기 전 자신에게 필사본을 맡겼던 마피아 조 블랙과 폭력배 루이를 죽인다. 이 장면에서 닉도 가차 없다. 그는 둘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된다는 걸 안다. 닉이 둘을 죽이는 건 생존본능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자신과 친구 사이인, 마피아 똘마니 레프티(루이스 칸셀미)까지 죽이는 것은, 『신곡』의 필사본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아는 자는 살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마피아식 논리와 같은 것이다. 닉은 단테의 유물을 지키려는 양, 자신 역시 탐욕스러운 존재일 뿐임을 드러낸다.
닉이 변하는 것은 여자 때문이다. 닉은 원본을 탈취하고 도망 다니는 와중에 줄리에타(갤 가돗)를 만나게 되는데 단테에 미쳐 있는 닉의 눈에는 그녀가 1300년대 이전 어린 시절의 단테가 흠모했던 베아트리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아이 단테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일찍 죽었고, 성인이 되어 피렌체의 고위직 행정관에 오른 단테(오스카 아이작)는 젬마(갤 가돗)를 아내로 맞아 살아간다. 과거 시대의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환상이거나 이상이고 젬마는 현실이다. 그가 교황에 맞서 피렌체의 자치권을 주장하는 것은 이상이고 추방 후 전역을 떠도는 지옥의 삶은 현실이다.
현재 시대의 닉 토시즈는 모든 일을 일단락 짓고(극 중 닉 주변의 인물은 모두 죽는다) 남태평양에 있는 보라보라섬에 은둔해서야 단테가 사랑하는 여인이 베아트리체가 아닌 젬마였음을 깨닫는다. 닉에게 줄리에타가 나타난 것은 자기 비서인 안나가 임신중독증에 걸려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인데 안나는 영화 속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며 줄리에타도 처음엔 전화선의 목소리로만 나오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눈앞에 나타나 자신이 결국 지켜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현재나 과거에서나 인간의 구원은 자각된 사랑에서 나오는 것
보라보라섬 백사장에서 닉은 줄리에타를 ‘젬마’라고 부른다. 줄리에타 역시 닉을 ‘내 사랑 단테’라고 부른다. 둘은 단테 시대의 반지 두 개를 각각 나누어 낀다. 닉은 해변에서 줄리에타를 만나기 전, 이제는 그만 예술적 매춘 행위를 끝내겠다고 중얼거린다. 둘은 해변에서 ‘템푸스 푸짓(Tempus Fugit)’에 대해 얘기한다. 라틴어로 ‘시간은 날아간다’는 뜻이다. 닉은 날개가 달린 건 시간이 아니라 숨결(유한한 생명)이라고 말한다. 줄리에타는 이제는 그만 찾으라고, 이제는 그만 탐구의 무덤에서 나오라고 말한다. 닉과 줄리에타는 이제 단테와 젬마가 된다. 영화의 현재와 과거는 그렇게 겹친다. 인간의 구원은 결국 자각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얘기한다.
닉과 줄리에타가 나누는 대화, ‘템푸스 푸짓’은 700여 년 전 단테가 만났던 유대인 예언자 이사야(마틴 스코세이지)가 했던 말이다. 이사야는 삶의 지혜를 시 안에 가두지 말라고 한다. 삶의 모든 순간을 자네의 영혼 속 모든 풀잎 향기로 채우라고 말한다. 시(예술)는 결국 삶의 본질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한 번의 숨결 같은 순간이나마 진짜 삶의 느낌을 만끽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시이고 예술이라는 얘기이다. 줄리안 슈나벨은 결국 예술의 비(非) 영속성, 삶의 무한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신이 지금껏 이룬 그림과 영화, 모든 예술 행위는 삶이 지니는 끝없는 오묘함을 감히 표현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예술은 무엇인가. 삶은 무엇인가.
영화의 엔딩 곡은 닉 케이브의 「인투 마이 암스, Into my arms」이다. 난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신 따위는 믿지 않아. 하지만 내 사랑, 당신이 믿는다는 건 알아(I don t believe in an interventionist God. But I know, darling, that you do)” 등의 가사로 되어 있는 노래이다. 영화 이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영적인 구원, 사랑의 힘에 대해 같은 뜻을 지닌 노래이다. 영화는 현재 넷플릭스에 공개돼 있다. 알 파치노, 존 말코비치, 프랑코 네로, 오스카 아이작, 제라드 버틀러, 갤 가돗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초호화 캐스팅이지만 호불호가 많이 엇갈리고 있는 작품이다.오동진 ohdjin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