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스팅스 이스메이, 권력을 쥐지 않은 군인의 표상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못 생겨 오히려 사랑 받는 반려견 퍼그(Pug) 를 평생 별명으로 달고 산 군인이 있다. 헤이스팅스 라이오넬 이스메이(Hastings Lionel Ismay, 1887~1965). 뭉툭한 얼굴 탓에 사관학교 시절 붙은 별명이라는데, 정작 그는 이 별명을 싫어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서명에도 즐겨 썼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시절 인도 북부 우타라칸드주에 있는 도시 나이니탈(Nainital)에서 태어나 여덟 살에 영국 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이후 평생을 대영제국의 참모로 살았다. 총리도, 국왕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20세기 유럽의 안보질서를 설계한 인물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1945년의 이스메이(위키피디아)
참모로 산다는 것
이스메이는 1905년에 인도군 기병 장교로 입대했고, 아프리카 동북부 소말릴란드(Somaliland)에서 이른바 미친 물라 라 불리던 저항지도자 모하메드 압둘라 하산(Mohammed Abdullah Hassan, 1856~1920)을 상대로 낙타부대와 함께 싸웠다. 그러나 그를 역사에 남긴 것은 전투가 아니라 사무실이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영국 방위위원회 실무를 맡으며 문서와 회의록 속에서 잔뼈가 굵었고, 1940년 5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이 국방장관을 겸한 총리에 오르자 그의 수석 군사보좌관으로 발탁됐다. 이후 6년간 카사블랑카, 테헤란 같은 연합국 정상회담마다 처칠 옆자리를 지켰다.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정이 실행되도록 조율하는 사람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 위치에 오래 있었으면서도 그가 단 한 번도 스스로 정치적 야심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참모로 시작해 참모로 남는 쪽을 택했다.
더글라스 자딘의 『Il Mullah del paese dei somali』 표지에 실린 다 론디니의 모하메드 압둘라 하산 삽화(위키피디아)
그은 것은 선, 잡지 않은 것은 권력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스메이는 영국의 인도총독 루이스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1900~1979)의 참모장이 되어 인도로 돌아갔다. 1947년, 영국은 불과 몇 달 만에 인도대륙을 힌두교 다수의 인도와 무슬림 다수의 파키스탄, 두 나라로 갈라놓고 서둘러 떠났다. 종교와 인구를 기준으로 지도 위에 급하게 그어진 경계선은 수백만 명의 피난과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이스메이는 이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실무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이 대목에서 한반도 사람이라면 자연히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1945년, 미국의 젊은 장교 두 사람이 지도 한 장을 펴놓고 38선을 그은 일 말이다. 제국이 물러나며 남긴 선은 늘 그 선 밖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 인도든 한반도든 마찬가지였다.
이스메이는 그해 남작 작위를 받아 영국 상원의원이 되었지만, 권력중심으로 파고드는 대신 1951년 영연방관계장관을 겨우 여섯 달 맡고는 새로운 자리로 옮긴다.
1976년의 루이스 마운트배튼(위키피디아)
나토를 만든 농담 한 마디
1952년, 처칠의 권유로 이스메이는 새로 만들어진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나토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는다. 본인은 처음에 극구 사양했다. 외교경험도 없고 벌써 예순다섯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처칠은 나토야말로 평화를 지킬 최후의 희망이라며 그를 설득했다. 이스메이는 5년간 조직의 뼈대를 세웠고, 나토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소련은 밖에, 미국은 안에, 독일은 아래에 두기 위해서 라는 말이다. 냉소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이 문장은 이후 수십 년간 나토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표현으로 인용되었다.
1945년, 이스메이(뒷줄 오른쪽)를 포함한 합동참모본부 인사들과 함께한 윈스턴 처칠(위키피디아)
한국이 새겨볼 것
이스메이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에 있다. 그는 평생 군의 최고위직 가까이에 있었고, 총리의 신임을 받았으며, 국제기구의 수장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데도 정치권력을 스스로 움켜쥐려 한 적이 없다. 군인이 참모의 자리에서 벗어나 주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그의 이력 전체를 관통하는 원칙이었다. 2024년 12월 3일 밤,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원칙은 그저 당연한 상식이 아니라 새삼 곱씹어야 할 교훈으로 다가온다. 군복을 입은 사람이 정치의 문턱을 넘지 않는다는 약속은 절로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은 훈련되고, 감시되고, 위반했을 때 반드시 철저한 대가를 치르게 함으로써만 유지되는 규범이다.
또 하나 새겨볼 대목은 동맹이라는 것의 냉정한 얼굴이다. 나토를 만든 그 유명한 문장에서 보듯, 동맹은 낭만이 아니라 각자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계산된 결과물이다. 한미동맹을 두고 우리가 흔히 쓰는 혈맹 이라는 말은 감정을 자극하지만, 정작 동맹의 설계자들은 언제나 냉정한 국익 우선의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스메이의 문장이 새삼 일깨워준다. 동맹에 기대는 것과 동맹에 종속되는 것은 다르다. 그 차이를 아는 것이야말로 지금도 광화문에서 윤 어게인”을 외치며 성조기를 흔드는 이들에게 필요한 감각이 아닐까.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선을 넘지 않은 참모의 이름은 오래 남고, 선을 넘은 이들의 이름은 결국 법정에서 다시 불려 나온다.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루즈벨트, 처칠, 마운트배튼 제독과 함께한 이스메이(뒷줄 왼쪽, 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