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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부두노동자 출신 사생아가 냉전을 설계하기까지

부두노동자 출신 사생아가 냉전을 설계하기까지
[사회혁신]
여덟 살 고아, 학교는 열한 살에 끝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 1881~1951)은 잉글랜드 서머싯의 윈스퍼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확실치 않고, 어머니는 그가 여덟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복누이 손에 자라다가 열한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농장 일꾼으로 나섰다. 오늘날이라면 아동노동 신고감이지만, 그 시절 영국 시골에서는 흔한 풍경이었다. 열세 살에는 브리스틀로 옮겨 이복형 집에 얹혀살며 음료 배달 일을 했고, 침례교 평신도 설교자로 말솜씨를 키웠다. 훗날 영국 외교를 좌지우지하는 인물이 이런 식으로 컸다는 사실은, 지금 봐도 소설 같은 이야기다.   1942년의 베빈(위키피디아) 부두노동자, 세계최대 노동조합을 만들다 베빈은 브리스틀 부두에서 짐을 나르다가 노동조합운동에 뛰어들었다. 1920년 항만노동 실태를 다룬 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그는 통계자료를 손수 준비해 상대측 변호인단을 압도했는데, 이 활약으로 언론은 그에게 부두노동자들의 나폴레옹 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1922년에는 여러 군소 노동조합을 통합해 운수일반노동자조합을 세우고 사무총장이 되었으니,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노동조합이었다. 학교 문턱도 제대로 못 넘은 사람이 수십만 조합원을 대표하는 조직의 우두머리가 된 셈이다. 1926년 총파업 때는 지도부의 핵심으로 활동했지만, 정작 본인은 파업이 흐지부지 끝나는 과정을 지켜보며 노동운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전해진다.   1920년의 베빈(위키피디아) 처칠 내각의 노동장관, 전쟁을 떠받치다 1940년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이 거국내각을 꾸리며 베빈을 노동 및 국가복무장관(Minister of Labour and National Service)으로 발탁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를 보수당 총리가 각료로 앉힌 것이니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베빈은 산업현장의 인력을 총동원하면서도 파업을 최소화하는 수완을 발휘해 영국의 전시 생산력을 지탱했다. 훗날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두고 총알보다 석탄이 먼저 였다고 평하는데, 그 뒤에는 베빈의 조정력이 있었다.   1945년 5월 8일 유럽 승리의 날(VE Day) , 유럽에서 독일에 대한 승리를 국민에게 방송한 후 화이트홀에서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드는 윈스턴 처칠의 오른쪽에 서 있는 어니스트 베빈(위키피디아) 외무장관, 냉전의 설계도를 그리다 1945년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자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1883~1967) 총리는 베빈을 외무장관에 앉혔다. 애틀리는 그를 두고 저격수가 아니라 전차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고 회고했을 정도로, 베빈은 섬세함보다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소련에 대한 기대를 일찌감치 접고 서유럽 재건에 힘을 쏟아, 1948년 브뤼셀조약과 유럽경제협력기구 창설을 이끌었고, 1949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다. 노동조합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 자본주의 진영의 안보 틀을 짠 것이니,역사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다만 팔레스타인 분할 문제에서는 뚜렷한 해법을 내지 못한 채 물러났다는 한계도 드러냈다.   1945년 클레멘트 애틀리와 함께 한 어니스트 베빈(왼쪽)(위키피디아) 촌철살인, 그러나 그늘도 있었다 베빈의 입담은 유명했다. 외교정책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그는 빅토리아역에 가서 표를 사서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 이라고 답했다. 거창한 이념보다 보통사람의 자유로운 일상을 외교의 잣대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동료 정치인 허버트 모리슨(Herbert Morrison, 1888~1965)과는 앙숙이었는데, 모리슨이 총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내가 살아있는 한 어림 없다 고 잘라 말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다만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뿌리 깊은 반감은 때로 편협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포츠담 회담에서의 베빈, 뒷줄 왼족 두번째(위키피디아) 한국은 무엇을 새길까 베빈의 삶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학벌도 배경도 없는 부두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통해 사회적 발언권을 얻고, 그 발언권이 결국 국가 운영의 자리로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도 노동조합은 종종 기득권의 반대편에서 사회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지만, 정작 노동자 출신이 국정의 중심에 서는 경로는 여전히 좁다. 학력과 인맥이 곧 자격증처럼 통용되는 풍토에서, 베빈 같은 이력은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베빈이 총파업과 노동쟁의라는 격렬한 갈등을 거치면서도 그 힘을 의회민주주의 틀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이다. 갈등을 힘으로 짓누르는 대신 제도 안에서 소화해낸 셈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가 보여주었듯, 사회적 갈등을 군홧발로 짓누르려는 유혹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베빈의 궤적은 그 유혹에 맞서는 방법이 결국 제도와 대화, 그리고 끈질긴 조직화라는 사실을 새삼 일러준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부두에서 시작해 외무성 책상에 앉기까지, 베빈이 걸어간 길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정직했다. 지금 한국사회가 노동과 정치의 거리를 좁히는 문제를 고민한다면, 이 우직한 영국인 노동조합 지도자의 이력서만큼 참고할 만한 자료도 드물다.   런던 남부 서더크에 있는 어니스트 베빈의 흉상(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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