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 흘렀는데 노태우 비자금 압색, 독립몰수제 덕분 [뉴스] 5·18민주화운동 45주년 다음날인 19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참배를 마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배우자인 김옥숙 여사가 아들 노재현씨가 미는 휠체어에 앉아 이동하고 있다. 2025.5.19 연합뉴스 자료사진
검찰이 지난 21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의 서울 연희동 자택, 아들 노재현 주중 대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동아시아문화재단과 노태우센터, 차명 계좌를 제공했다는 의심을 받는 당시 비서관들의 자택 등을 압수수색했다. 노 전 대통령이 지난 2021년 10월 26일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제 와서 압수수색을 벌여 무슨 증거가 남아 있을 것이며, 불법 자금을 환수하는 길이 열리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소정수 부장검사)는 5·18기념재단 등이 김 여사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노재현 대사 등 노 전 대통령 일가가 비자금을 은닉하고 세금을 포탈했다는 취지로 고발한 데 따라 강제 수사에 나선 것이었다.
시곗바늘을 31년 전으로 돌려보자.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1995년10월 박계동 당시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계좌 자료를 폭로하면서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같은 달 27일 노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재임 중 대기업 등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다. 검찰 수사 결과 공식 발표된 비자금 총액은 4100억 원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95년 내란 우두머리와 뇌물 등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심에서 17년으로 감형된 뒤 1997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노 전 대통령 측이 지난 2013년 추징금 2628억 원을 완납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10년 만에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노소영 관장이 2023년 11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의 재산분할 소송 항소심 도중 아버지의 비자금으로 SK 그룹의 종잣돈 을 마련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노 관장 측은 이 돈이 시아버지인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에게 전달돼 태평양증권 인수 등 선경그룹 경영활동과 최태원 회장의 승계작업에 밑천이 됐다고 주장했다.
YTN 화면 갈무리
노 관장 측은 1991년 (주)선경건설 명의로 발행된 300억 원 규모 약속어음과 김옥숙 여사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를 새 증거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 메모에는 선경그룹에 건너간 300억 원을 포함해 904억 원에 이르는 비자금 내역이 적혀 있었다.
최 회장 측은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활동비를 요구하면 주겠다는 약속이었을 뿐 비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2심은 비자금 300억원이 SK그룹에 흘러들어갔다고 인정하고,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재산 분할로 1조 3808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비자금에 대해 뇌물로 보인다 고만 했을 뿐 실제 비자금의 존재 여부는 판단하지 않았다. 비자금이 최 회장 측에 전달됐다 하더라도 불법 자금이어서 재산 분할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봤다.
지난달 파기환송심도 대법원 판단에 따라 노 전 대통령 비자금 300억원을 노 관장 기여분에서 제외했다. 대법원은 원심이 인정한 바와 같이 피고(노 관장)의 부친 노태우가 원고(최 회장)의 부친 최종현에게 300억원 정도의 금전을 지원했다고 보더라도, 이 돈의 출처는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수령한 뇌물로 보인다 고 했다.
우여곡절을 겪고 있는 재산분할 소송과 별개로 노 관장이 폭로한 비자금 내역을 근거로 5·18기념재단은 2024년 10월 노 일가를 대검찰청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처럼 불법 자금을 조성하고 운용한 사람이 세상을 등진 상태에서는 국가가 비자금을 찾아내더라도 이를 되찾아올 방법이 지금까지는 없어 막막하기만 했다.
전날 국회가 2001년 11월 28일 처음 시행된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범죄수익은닉규제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검찰이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압수수색에 나선 것이다. 이번에 개정된 법률은 공포된 지 1년 뒤에 시행된다.
티스토리 융바라기 갈무리
범죄수익은닉규제법 개정안은 당사자가 사망, 국외 도피, 소재 불명 등을 이유로 검찰의 기소가 어렵더라도 범죄수익임이 확인되면 법원에 몰수·추징 명령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의 범죄수익 몰수 제도는 당사자의 기소·유죄 판결을 전제로 하고 있어 신병 확보나 특정이 어려운 경우 환수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에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범죄수익을 가족이나 제3자에게 상속·증여하거나 현저히 낮은 가격으로 넘긴 경우에도 몰수할 수 있도록 했다. 재산을 넘겨받은 사람이 범죄 관련성을 알지 못했더라도 무상 또는 헐값으로 취득했다면 해당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몰수할 수 있게 했다. 독립 몰수·추징 대상에는 보이스피싱과 인터넷 불법도박, 마약범죄를 비롯해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관련 범죄와 디지털 성범죄 등도 포함됐다.
특히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이를 통해 취득한 지위를 이용해 저지른 뇌물·횡령·배임 범죄의 수익은 공소시효가 지났더라도 몰수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규정은 법 시행 이전에 발생한 범죄수익에도 적용된다. 이에 따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를 둘러싼 비자금 의혹에 대한 환수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린다.
검찰은 이에 맞춰 비자금 행방을 찾는 대로, 자산 동결에 나설 방침이다. 노 전 대통령과 최종현 SK 선대 회장 둘 다 사망한 데다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 이전 자료도 들여다봐야 해 실체 규명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김옥숙 여사는 91세 고령이어서 사실관계 확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들 재현씨도 주중 대사라 현재 중국에 있어 조사 일정을 잡는 데 한계가 있다.
범죄수익 은닉죄의 공소시효는 7년이어서 최근까지 범죄수익을 은닉하려 했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1991년 비자금 전달부터 현재까지 자금 흐름 전반을 파악해 비자금 은닉과 승계 과정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은닉 과정뿐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이 최종현 회장에게 비자금을 실제로 전달했는지, 해당 자금이 범죄 수익이 맞는지도 밝혀내야 한다.
노 관장의 이혼 소송 과정에 실체가 드러난 노태우 비자금의 국고 환수가 첫발을 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다만 제대로 범죄수익 환수하는 데 이르려면 여전히 정비해야 할 법령들이 여럿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다 오는 10월 2일 검찰의 수사권이 사라지고 공소청으로 전환되면 관련 수사가 중대범죄수사청으로 이관될 가능성도 있어 얼마나 집중해 관련 수사가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해야 한다. 임병선 에디터 byeongseon1610@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