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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노벨 평화상 수상한 제인 애덤스 가장 위험한 여인

노벨 평화상 수상한 제인 애덤스 가장 위험한 여인
[사람들]
별명부터가 심상치 않다 1930년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을 뽑으라면 열에 아홉은 제인 애덤스(Jane Addams, 1860~1935)를 꼽았다. 그런데 같은 시기 어느 애국단체는 그녀에게 전혀 다른 별명을 붙였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 존경과 위험이라는 정반대의 말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붙여진 경우는 흔치 않다. 성녀와 ‘빨갱이’ 사이를 오간 이 여자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지금 한국사회가 개혁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붙이는 딱지와 놀랍도록 닮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1926년경의 제인 애덤스(위키피디아) 빈민가에 차린 이상한 파티 저택 미국 일리노이주 시골마을에서 부유한 사업가의 딸로 태어난 애덤스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의사가 되려다 척추수술과 건강문제로 좌절한 뒤, 스물일곱 나이에 유럽여행길에서 인생 항로가 바뀐다. 영국 런던의 빈민가에 자리한 토인비 홀 이라는 시설이었다. 대학까지 나온 젊은이들이 가난한 이웃과 한 지붕 아래 살면서 함께 배우고 함께 일하는 곳이었다. 애덤스는 이 모습에 완전히 매료됐다. 1889년, 함께 여행했던 친구 엘런 게이츠 스타(Ellen Gates Starr, 1859~1940)와 함께 미국 시카고의 낡은 저택 한 채를 사들였다. 원래 그 집을 지은 사업가 찰스 헐의 성을 따서 헐 하우스 라는 이름을 붙였다. 주변은 이탈리아, 아일랜드, 독일, 유대계 이민자들이 뒤섞여 사는 빈민가였다. 애덤스는 여기서 자선단체 흉내를 내지 않았다. 밥과 옷을 나눠주고 돌아가는 대신, 아예 눌러앉아 유치원과 야학, 미술교실, 공동세탁장, 공동부엌을 차렸다. 시혜가 아니라 동거를 택한 것이다. 이 방식은 이후 세틀먼트 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전역에 퍼졌고, 애덤스는 그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젊은 시절의 제인 애덤스(위키피디아) 쓰레기통을 든 개혁가 애덤스의 개혁은 거창한 연설이 아니라 지루한 통계와 잔소리에서 시작됐다. 헐 하우스 사람들은 동네를 돌며 아동노동 실태와 위생 상태를 하나하나 기록했다. 그러다 애덤스는 급기야 직접 자기구역의 쓰레기 감독관 자리에 지원해 임명받는다. 시카고 시의회가 오물 수거를 엉망으로 방치하자, 이론으로 따지는 대신 스스로 완장을 차고 나선 것이다. 웃음이 나올 법한 이 일화는 오히려 그녀의 방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불평만 하지 않고 제도 안으로 들어가 바꾼다는 것. 이런 끈질김은 결실을 맺었다. 1899년 일리노이주에 미국 최초의 소년법원이 생겼고, 아동노동을 제한하는 법이 하나둘 통과됐다. 애덤스는 여성참정권 운동에도 앞장섰고, 1909년 창설된 흑인 인권단체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와 1920년 창설된 미국시민자유연맹의 산파역할도 했다. 잔소리가 조직이 되고, 조직이 법이 된 셈이다.   1915년의 제인 애덤스(위키피디아) 반전을 외쳤더니 매국노가 되었다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애덤스는 1915년 여성평화당과 국제여성단체를 조직해 각국 정부에 전쟁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훗날 여성국제평화자유연맹으로 이어지는 이 조직에서 그녀는 초대의장을 맡았다. 애국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 전쟁반대를 외치는 여자는 곱게 보이지 않았다. 신문은 그녀를 매국노 취급했고, 한 애국단체는 그녀를 회원명단에서 제명하며 가장 위험한 여자 라는 딱지를 붙였다. 평생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살아온 여자가 하루아침에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결국 그녀 편이었다. 1931년, 애덤스는 컬럼비아대 총장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Nicholas Murray Butler, 1862~1947)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매국노 소리를 듣던 여자가 세계평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로 재조명된 것이다. 이미 건강이 크게 나빠진 뒤였고, 애덤스는 4년 뒤인 1935년 세상을 떠났다. 낙인과 훈장이 이렇게 극적으로 겹치는 생애도 드물다.   제인 애덤스(1906년), 조지 드 포레스트 브러시(1855–1941) 작, 스미스소니언 국립초상화미술관(위키피디아) 한국이 곱씹을 대목 애덤스의 인생에서 정작 눈여겨볼 대목은 그녀가 옳았다는 사실자체가 아니다. 옳은 말을 했다는 이유로 매국노 딱지가 붙었다가, 시간이 지나 다시 존경받게 되는 그 낙차다. 한국에서도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종종 종북 이나 반국가 세력 으로 몰린다. 윤석열 정권시절, 시민사회와 진보언론을 겨냥한 위협적인 언사가 다시 고개를 든 것도 같은 흐름이다. 애덤스의 생애는 그런 낙인이 진실을 지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하나 배울 점은 방법론이다. 애덤스는 구호만 외치지 않았다. 통계를 만들고, 필요하면 직접 쓰레기 감독관 완장까지 차고 제도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의 시민운동 역시 분노와 감정을 넘어 자료와 실무로 무장할 때 더 오래, 더 힘 있게 버틸 수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지금 위험인물로 몰리는 이들 중 누가 훗날의 노벨상 수상자일지, 아무도 미리 알 수 없는 일이다.   미국 일리노이주 시더빌에 있는 제인 애덤스의 묘지(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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