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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다석의 한글철학 ㊿]단재 신채호, 역사 불칼

[다석의 한글철학 ㊿]단재 신채호, 역사 불칼
[칼럼]
세종은 바른소리(正音) 태양이고, 민세 안재홍은 다사리 말뿌리다. 세종은 바른소리 글꼴로 온씨알(百姓)의 말글을 텄고, 민세는 온씨알이 살아가는 삶과 나라와 누리 길을 밝혔다. 그렇다면 이런 물음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온씨알의 말글이 트이고 다사리 길이 열렸다면, 그 말은 무엇을 지켜야 할까? 이 땅을 사는 온씨알의 말은 어떤 얼을 품어야 하는가? 식민지, 나라 잃은 어둠 속에서는 어떻게 ‘제소리’로 설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깊게 품은 이는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다. 그는 그런 물음 속에 있었다. 그 자리가 그의 자리였다.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림1) 중국 뤼순 감옥에 수감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모습이다. 단재는 우리 역사를 크게 살려낸 ‘불칼’이었다. 불이요, 칼이니, 불칼이다. ᄇᆞᆰᄒᆞᆫ으로 불칼이요, 불칼로 불함(不咸)이다. 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았다. 그에겐 투쟁 기록이 곧 역사였다. 역사는 겨레의 ‘얼줄’이요, 민족의 ‘숨빛’이요, 나라 잃은 민중들이 다시 일어서는 ‘속불’일 터이다. 살아 움직이는 민족정신이 역사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단재에게 역사는 책장 속 낡은 글자가 아니라, 빼앗긴 땅을 되찾는 눈이고, 꺾인 겨레를 일으키는 손이며, 고개 숙인 민중을 다시 세우는 ‘불칼’이었다. 그 불칼의 중심에 아(我)”가 있다. 그가 『조선상고사』에서 말한 아”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 자리에 선 삶의 본위이며, 민족이 자기 역사와 자기 말을 통해 스스로를 깨닫는 자리다. 단재에게 역사는 ‘아’가 ‘비아’와 맞서는 심적 활동의 기록이며, 조선사는 조선 민족이 그러한 투쟁 속에서 자기 자신을 형성해 온 기록이었다. 그러므로 단재 역사학은 과거를 정리하는 학문이기 이전에, ‘님꼴(主體)’ 세우는 사상이요 실천이리라. 그는 민족”을 고정된 혈통이나 관념으로만 보지 않았다. 『꿈하늘』(1916)에서 아”의 범위는 시대에 따라 ‘줄고 는다’라고 말했다. 가족주의 시대에는 가족이 아”이고, 국가주의 시대에는 국가가 아”라는 것. 그의 아”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는 구성물이다. 초역사적 실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민족은 닫힌 혈연 공동체일까? 아니다! 아”는 역사 속에서 넓어지고, 또한 깊어진다. 소아(小我)에서 대아(大我)로, 개인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민중으로, 민중에서 세계 자유를 향해 열리는 님꼴이 민족이다! 다석철학 인물지도에서 단재는 ‘민족 숨빛’으로 솟는다. 세종이 다석에게 바른소리 하늘을 열었고, 민세가 다사리 땅을 열었다면, 단재는 그 하늘땅 사이에 겨레 얼로 벼락을 쳤다. 다석이 훗날 제소리로 깬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까닭에는, 단재가 보여준 타협 없는 님꼴 줏대가 깊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그 줏대로 선 말은 이렇다. 남 말로 살지 말라! 남 역사로 생각하지 말라! 남 힘에 기대어 나라를 찾으려 하지 말라! 제 얼로 서라! 제힘으로 일어서라! 제 역사로 깨어나라!   그림2) 1948년 ‘종로서원’에서 펴낸 ‘조선상고사’(372쪽) 초판본이다. 오산, 나라 잃은 시대의 배곧 다석과 단재를 이는 장소는 오산학교였다. 개교 당시 오산학교는 학교 이상의 배움터였다. 남강이 세운 이 배움터는 기독교 민족교육의 터였고, 동시에 나라 잃은 청년들의 숨구멍이었다. 이제 갓 배움터를 연 오산은 청년들에게 묻고 있었다. 공부는 무엇을 위해 있는가? 조선 사람은 어떻게 다시 설 것인가? 청년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그곳에 스무 살 다석 류영모가 선생으로 있었다. 남강은 다석의 과학·수학·물리 수재성을 알아보았고 곧바로 초빙했다. 다석에게 오산학교는 생애 큰 불씨가 되었다. 그곳에는 남강 이승훈은 물론이요, 백이행, 춘원 이광수, 시당 여준, 단재 신채호가 있었다. 다석은 그곳에서 톨스토이의 죽음 소식을 들으며 비폭력, 금욕, 무교회 신앙의 길을 깊이 받아들였다. 톨스토이가 새로 쓴 복음서는 다석이 기성 교회 교리에서 벗어나, 내면의 ‘영(靈)’을 통해 한아님을 만나는 ‘님꼴(主體)’ 믿음을 확립하게 된다. 단재는 당시 서른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그는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가였고, 『독사신론』을 쓴 사학자였으며, 애국계몽운동의 불길 속에 있던 사상가였다. 단재에게 교육은 지식 전달만이 아니었다. 그는 교육의 목적을 국권 회복과 근대국가 설립을 위한 방편으로 보았고, 이를 위해 애국 교육과 애국자 양성을 위한 정육교육(情育敎育), 국수(國粹) 교육, 역사서와 위인전기 탐독, 구서(舊書) 간행을 추진했고, 한글을 적극 활용했다. 다석과 단재, 이 둘의 만남은 평범하지 않다. 오산학교는 민족교육의 터였지만, 동시에 조선 역사, 조선 말, 조선 고전, 조선 민족종교, 독립운동이 뒤섞인 사상의 실험장이었다. 다석은 그곳에서 조선 역사와 동양 고전과 민족 얼을 함께 깨우쳤다. 단재는 그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준 사람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대종교는 단재를 통하지 않고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단재는 청년 다석에게 벼락같은 존재였으리라. 벼락은 한순간에 불과하지만, 산을 통째로 밝힌다. 아마도 다석에게 단재는 그런 벼락이었으리라!   그림3)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사연구초’와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상고문화사’이다.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 단재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이야기 하나. 그는 세수할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독립을 바라는 사람이 함부로 머리를 숙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물을 손에 찍어 얼굴에 바르니 옷과 바닥이 젖었다. 곁에서 보면 기이한 버릇이었다. 이것은 몸으로 쓴 독립 선언이다. 청년 다석은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다석 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교양인, 2012)에 그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다석은 이미 단재의 꼿꼿함을 들어 알고 있었다. 단재의 주체성은 문장 속에도 있고, 몸가짐에도 있었다. 생각이 어찌 머릿속에서만 솟겠는가! 믿음이 어찌 입에만 있고, 님꼴이 어찌 글에만 있겠는가! 그는 몸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생각도 굽히지 않았다. 작은 동작 하나조차도 한 사람의 역사관을 드러내는 법이다.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라는 것은, 일본 제국 앞에서 꼿꼿하게 고개를 들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대주의 앞에서도, 중화주의 앞에서도, 낡은 권위 앞에서도, 무기력한 자기비하 앞에서도 꼿꼿하게 서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몸짓으로 그는 ‘남 눈으로 조선을 보지 않겠다! 남 역사로 우리를 재단하지 않겠다! 남 힘으로 독립을 구걸하지 않겠다!’라는 마음을 가졌으리라. 이것이 단재의 꼿꼿함이었다! 단재의 정치사상은 자주독립론, 민족주체론, 민중혁명론, 반제도론, 대의실천론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그중 자주독립론은 어느 누구의 도움이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제힘으로 독립하겠다’는 사상이다. 민족주체론은 ‘내 의지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주인의식이며, 민족정신을 회복하고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역사 복원을 우선 과제로 삼은 사상이다. 이 자주독립 정신은 다석에게서 제소리” 공부로 깊어졌다. 다석은 남의 말로 철학하지 않았다. 남의 종교를 그대로 반복하지도 않았다. 기독교를 받았으되 교회에 갇히지 않았고, 불교를 읽었으되 불교인이 되지 않았고, 유교를 깊이 새겼으되 유학자로 멈추지 않았고, 노자를 사랑했으되 노장(老莊)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받은 것을 다시 ‘뜻’으로 태웠다. 바탈(天命:性)로 태웠다. 다석 ‘않’에서 예수는 ‘말숨’이 되었고, 붓다는 ‘큰나(大我)’가 되었고, 노자는 ‘빈탕한데’가 되었고, 세종 정음은 ‘한글경전’이 되었고, 민세의 다사리는 ‘씨알 민주주의’ 말 뿌리가 되었다.그 바탕에는 단재가 님꼴로 세운 ‘불칼’도 있었다.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 남의 역사 앞에 엎드리지 않는 사람! 제 얼로 서는 사람! 다석은 단재의 그 정신을 ‘얼숨’으로 받아들였다. 역사는 애국심의 눈이다 단재는 왜 역사에 매달렸을까? 단재에게 역사 연구는 국권 회복의 길이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면 먼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야 했다. 역사 없는 민족은 제 이름을 잃은 사람과 같았으므로. 제 이름을 잃으면 남이 부르는 이름으로 살게 된다. 단재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자존의 구도자-신채호』(2023)를 쓴 한림대 교수 박근갑은 논문 「단재 신채호와 역사의 발견」에서 단재가 한국 사학사에서 신기원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자산 안확(自山 安廓, 1886~1946)이 단재를 두고 근래 역사의 신견지”를 열었다고 한 평가도 소개한다. 단재는 스스로 신사씨(新史氏)”라는 이름으로 낡은 역사 서술을 심판하려 했다. 그에게 새로운 역사”는 신념이자 자부심이었던 것이다. 또한 단재에게 역사는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눈이었다. 단재는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에서 역사를 버리고 애국심을 구하는 것은 눈을 가리고 보려 하며 다리를 없애고 달리려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국민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려면 먼저 완전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단재 역사학은 교육학이 되고, 정치학이 되고, 수행론이 된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과거를 아는 일이 아니라, 자기 존재 근거를 회복하는 일이지 않는가 단재에게 조선사는 조선이라는 아”가 어떻게 비아”와 맞서 왔는지를 밝히는 정신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 기록은 곧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도 새로운 불씨다. 다석철학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석에게 말은 그저 말소리 따위가 아니다. 말은 숨이다. 말숨이다. 말은 얼 그릇이요, 참 길이다. 말이 죽으면 얼이 흐려지고, 얼이 흐려지면 사람은 남의 소리로 살게 된다. 단재가 역사를 통해 민족의 아”를 일으켰다면, 다석은 말을 통해 사람의 속나”를 깨웠다. 단재의 ‘역사’와 다석의 ‘말숨’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깊이 들어가면 결국 하나로 통한다. 역사가 없는 말은 뿌리를 잃을 것이고, 말이 없는 역사는 전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4) 미국 하와이 한인소년회가 발간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한글판 ‘독사신론’(1911)이다. 아와 비아, 좀나와 큰나 단재의 아와 비아”, 다석의 좀나와 큰나”. 이 둘은 서로 다른 말처럼 보이지만, 사상 구조에서는 닮은 꼴이다. 단재에게 아”는 님꼴이다. 그렇지만 아”는 자아도 아니고, 편협한 민족주의도 아니다. 『꿈하늘』에서 아”의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아”는 역사 속에서 넓어지는 님꼴이다! 단재는 소아(小我)를 극복하고 대아(大我)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다석은 소아를 ‘좀나’라 했고 대아를 ‘큰나’라고 했다. 단재에게 ‘대아가 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일이며, 아”가 참 면목을 자각하여 남과 동등하게 마주할 수 있는 님바탈(主體性)을 갖게 됨을 뜻한다. 이 대목은 다석의 겉나”와 속나”도 떠올리게 한다. 다석에게 ‘겉나’는 붙드는 나, 욕망하는 나, 이름과 소유와 체면에 갇힌 나다. ‘속나’는 하늘 바탈과 통하는 나, 참을 향해 비워진 나, 제소리로 깨어난 나다. 단재가 소아를 넘어 대아로 가자고 했다면, 다석은 ‘겉나’를 벗고 ‘속나’로 솟자고 했다. 단재의 ‘대아(大我)’는 역사 속 주체이고, 다석의 ‘속나’는 있꼴(存在) 속 님이다. 단재의 ‘아’는 민족사에서 ‘비아’와 맞서며 커지고, 다석의 ‘속나‘는 ’겉나‘를 태우며 하늘과 통한다. 그렇다고 단재가 ‘바깥’만 보았고 다석은 ‘속’만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단재의 ‘아’는 심적 활동의 님꼴이고, 다석의 ‘속나’는 삶의 역사 속에서 깨어나는 님꼴이다. 단재의 역사는 밖에서 싸우는 싸움이면서 안의 싸움이고, 다석의 수행은 속에서 싸우는 싸움이면서 겉의 삶이다. 생각해 보라! 나는 누구의 눈으로 나를 보는가. 나는 누구의 말로 나를 말하는가. 나는 누구의 역사 속에서 살고 있는가. 필명으로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1908)이다. 국수와 한글, 닫힌 민족주의를 넘어 단재사상을 말할 때 국수(國粹)”를 빼놓을 수 없다[‘국수(國粹)’는 ‘한 나라나 민족이 지닌 고유한 정신적·물질적 장점’을 말한다.]. 그는 한 나라의 역사적 풍습, 습관, 법률, 제도 속에 깃든 ‘정신’을 국수로 보았다. 국수를 한국 문화의 소중함과 자랑스러움을 일깨우고 지켜낼 수 있는 문명의 생식기”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서구 근대 사상도 국수를 바탕으로 ‘님꼴짓’으로 받아 드리고 풀어 밝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다석과 놀랍게 잇닿는다. 다석은 외래 사상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 붓다, 노자, 공자, 맹자, 장자, 에크하르트, 톨스토이, 간디를 두루 읽었다. 인도철학과 희랍철학도 구해서 읽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말로 다시 태웠다. 하느님”, 얼나”, 빈탕한데”, 말숨”, 제나 죽임”,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우” 같은 말들은 외래 사상을 우리말 말숨으로 다시 내고 낳은 결과다. 단재도 그랬다. 단재에게 국수는 외래를 막는 담장이 아니라, 외래를 님꼴짓으로 소화하는 바탕이었다. 우리의 고유한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문과 문물을 님꼴짓으로 계승·발전해 가는 것이 열린 마음일 터. 또한 모든 사상과 철학은 외래 사조와 정신의 수용을 통해 확장되고 발전하는 것이 기본이지 않을까! 단재는 조선 역사와 국문과 국수를 통해 민족의 님꼴을 세우려 했다. 다석은 한글과 우리말을 통해 세계 종교와 철학을 다시 읽었다. 단재는 우리 역사로 세계를 보라”고 했고, 다석은 우리말로 참을 말하라”고 했다. 둘 다 남의 사상과 보편에 종속되지 않는 길을 걸었다. 둘 다 조선의 얼을 통해 세계와 만났다. 이 점에서 단재는 다석에게 열린 님바탈(主體性) 스승이리라. 생각을 세워보라. 제 얼이 있어야 남과 만난다! 제 말이 있어야 세계와 말한다! 제 역사가 있어야 보편을 향해 걸을 수 있다!   그림6) 2007년 7월 8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펴낸 ‘단재신채호전집(전10권)’이다. 고토(古土), 다물(多勿), 그리고 갇집 깨기 단재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 만주, 연해주에 섰다. 조선 역사가 한반도 안에만 갇혀 있다는 식민사관의 좁은 울타리를 깨고자 했다. 중국 사서가 잘못 적은 것을 따져 물었고, 조선 옛 강역을 다시 밝혔다. 단재가 만주와 고토(古土)를 말한 까닭은 영토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겨레의 상상력을 넓히는 일이었다. 단재의 영토 인식은 『꿈하늘』에 잘 드러난다. 그는 발해를 우리 역사에 편입해 기술했고, 고려가 두만강 이북 공험진(公嶮鎭)을 영유했음을 언급했으며, 이러한 내용은 중국 문헌을 읽고 실증적으로 제시한 역사다. 『꿈하늘』에서 고토 회복의 ‘다물정신’은 개인이 민족 님꼴로 거듭나 아와 비아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문제와 이어진다. 또 다른 대목에서 단재는 단군 삼경(三京)을 비정하면서 우리 영토가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에 이르렀음을 강조하고, 화랑의 낭가사상(郎家思想)을 바탕으로 고토를 회복하자는 다물정신을 드러냈다. 『꿈하늘』 전반부에 고구려와 수나라의 싸움을 전면화한 것도 ‘상무정신(尙武精神)’과 고토 회복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리라. 다석철학도 ‘갇집(囚獄)’을 깨는 철학이다. 좀나를 깨고 큰나로 솟는 길이다. 겉나를 깨고 속나로 들어가는 길이다. 제나를 깨고 얼나로 빛나는 길이다. 단재가 식민사관의 갇집을 깨고 겨레 역사의 큰 들판을 열었다면, 다석은 종교와 언어와 존재의 갇집을 깨고 얼생명의 큰 하늘을 열었다. 단재는 민족의 갇집을 깼고, 다석은 사람 좀나의 갇집을 깼다. 그러나 둘은 다른 길이 아니다. ‘갇집 깨기’라는 큰 숨이다. 단재에게 고토는 잃어버린 정신의 넓이였다. 다석에게 속나는 하늘땅사람을 잇는 생명의 넓이였다. 단재가 조선은 이렇게 좁지 않았다”고 말했다면, 다석은 사람은 이렇게 작지 않다”고 말했다. 하나는 민족의 넓이를 되찾는 길이고, 하나는 사람의 깊이를 되찾는 길이다. 『꿈하늘』, 역사 불칼의 문학적 형상 단재의 문학은 사상 실천의 또 다른 길이었다. 단재를 사상가, 역사학자, 언론인, 작가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지만, 어떤 방법으로 접근하든 그의 글쓰기 목적은 결국 국가와 민족이라는 하나의 지점으로 귀결된다. 『꿈하늘』은 이 점에서 중요하다. 『꿈하늘』은 주인공 한놈”이 꿈속에서 을지문덕을 만나 님의 나라” 전쟁터를 지나 ‘님나라’로 가는 이야기다. 친구들은 고통, 돈, 시기, 좌절, 미인계 앞에서 하나씩 이탈하지만, 한놈은 시련을 겪고 지옥에서 강감찬의 교화를 받은 뒤 님나라에 도달한다. 단재는 이를 통해 강렬한 투쟁정신과 진취성을 읽고, 신라 화랑의 상무정신을 예찬하며, 저항과 항거의 논리를 강화한다. 그는 『꿈하늘』에서 인간에게는 싸움뿐이라. 싸움에 이기면 살고 지면 죽나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제국주의 시대를 약육강식의 질서로 인식하고, 민족의식에 바탕을 둔 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한 말이다. 다석의 언어로 바꾸면, 『꿈하늘』은 역사 불칼의 수행담이다. 한놈”은 좀나에서 큰나로 가는 사람이다. 그는 겉나의 유혹을 겪는다. 고통, 돈, 시기, 미인계, 좌절은 모두 겉나의 시험이다. 한놈이 님나라에 이르는 길은 다석식으로 말하면 큰나로 솟는 길이다. 물론 단재의 님나라”와 다석의 하느님 나라”를 곧장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둘 다 현재의 속박을 넘어서는 길이며, 주체가 스스로 깨어나는 길이라는 점에서 만난다. 흥미로운 것은 『꿈하늘』에서 현세와 내세가 갈라지지 않는 점이다. 단재는 을지문덕의 말을 통해 현세와 내세를 일원적 연속체로 인식한다. 육계의 싸움이 그치지 않으면 영계의 싸움도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다석과 깊이 통한다. 다석에게 하늘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숨으로 살아야 할 자리다. 참은 내세의 약속이 아니라 오늘의 몸맘얼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꿈하늘』은 단재의 역사관, 종교관, 문학관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글이다. 역사 불칼이 꿈의 서사가 되고, 민족의 싸움이 영혼 싸움이 되고, 문학이 민중을 깨우는 수행의 장이 되는 서사다.   그림7) 2019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서대전 광장에 세운 단재 신채호 선생의 동상이다. 삼일운동 1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세웠다. 선생의 탄생지는 그동안 충청도 공주목 회덕현, 충남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림리,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번지였으나,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 229번지 47로 최종 확인되었다. 영웅에서 민중으로, 불칼의 방향이 바뀌다 단재는 전통 유학자에서 애국 계몽기의 역사 전기 작가로, 민족주의 사학자에서 독립운동가로, 다시 민중혁명론과 무정부주의 사상으로 나아갔다. 단재의 삶은 전통 유학에서 영웅사관으로, 영웅사관에서 민중사관으로, 민중사관에서 다시 아나키스트로”라는 흐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초기에 단재는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 같은 역사적 영웅을 불러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망명객이 된 단재는 한 영웅의 힘보다 민중의 힘에 더 기대게 된다. 『천고(天鼓)』 창간사에서 그는 안으로는 민중의 기세가 날로 뻗어나가 암살과 폭동의 장렬한 거조가 연속하여 끊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단재가 결국 한 영웅보다 민중의 힘에 기대게 되었으며, 『꿈하늘』에 한놈, 유화, 궁예, 정을진, 예쁜이 등 상대적으로 초라한 인물들을 전면화한 것도 이러한 변화의 결과일 터이다. 이 변화는 다석 류영모-신천 함석헌의 ‘씨알 사상’으로 이어지는 사상사 길목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단재가 민족 주체를 세웠다면, 그 주체는 점차 영웅에서 민중으로 내려왔다. 다석은 이 민중의 자리를 씨알” 영성으로 더 깊이 내렸다. 함석헌은 그 씨알을 역사 해석의 중심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단재의 역사 불칼, 다석의 말숨, 함석헌의 씨알은 한 얼줄 위에 놓인다고 할 수 있으리라. 단재가 역사 없는 민족은 설 수 없다”고 했다면, 다석은 제소리 없는 사람은 깰 수 없다”고 했고, 함석헌은 씨알 없는 역사는 뜻이 없다”고 했다. 단재에게 민족은 역사의 아”였고, 다석에게 사람은 큰나로 솟아야 할 존재였으며, 함석헌에게 씨알은 고난 속에서 뜻을 낳는 역사 주체였다. 이 셋은 한국 근현대 사상사의 큰 산맥이다.   그림8)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은 1923년 중국 북경에 망명 중이던 단재 신채호 선생이 비밀 항일결사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의 선언문으로 작성한 글이다. 파괴와 건설, 혁명과 수행 단재는 ‘파괴’를 말했다. 그것은 허무한 파괴가 아니다. 낡은 사상, 낡은 제도, 낡은 습속, 낡은 권위가 사람을 억누를 때, 그것을 깨지 않고 새 세상은 오지 않는다. 단재에게 파괴는 건설의 앞문이었다. 파괴라는 칼은 건설의 깃발이었다. 단재의 민중혁명론은 민중이 민중의 자유를 위해, 혁명을 통해 자유를 실현하는 사상이다. 무정부주의론은 기존의 불합리한 온갖 제도를 부인하는 데 있다. 그의 정치사상은 주체의식을 가진 민중이 직접 하는 혁명이며, 기존의 불합리한 권위와 제도를 부인하고 새로운 세상을 희구하는 성격을 가진다. 문학에서도 이 변화는 뚜렷하다.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는 민중이 저항과 반역 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천상에는 상제와 천사들이 있고, 지상에는 인간이 있다. 지상의 인간은 부자와 빈자로 나뉘며, 부자는 강국의 민중으로, 빈자는 식민지 민중으로 그려진다. 상제는 강국이 식민지를 착취하게 하며 지배 질서를 유지하지만, 결국 민중 반란이 일어난다. 민중의 역동성과 저항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다석도 갇집을 깨야 한다고 보았다. 내 안의 좀나, 겉나는 물론이요, 욕망이 들끓는 갇집, 교리에 붙박인 갇집, 이름만 좇는 갇집, 앎에 빠진 갇집을 향했다. 단재가 식민지와 사대주의와 낡은 권위의 갇집을 깨려 했다면, 다석은 사람 속 깊은 갇집을 깨려 했다. 단재의 칼은 밖으로 번쩍였고, 다석의 불은 속으로 타올랐다. 그러나 칼과 불은 한뜻을 품었다. 갇힌 집을 깨고 참으로 가는 길! 그러므로 단재와 다석은 아주 가깝다. 단재가 실천한 혁명은 민족과 민중이 제힘으로 서는 길이었다. 다석이 나날로 닦아간 수행은 사람이 겉나를 태우고 큰나로 솟는 길이었다. 하나는 역사 속 혁명이고, 하나는 속나의 혁명이다. 하나는 나라를 되찾는 길이고, 하나는 참나를 되찾는 길이다. 그런데 나라를 잃은 사람에게 참나가 온전할 수 있을까. 참나를 잃은 사람이 나라를 제대로 세울 수 있을까. 둘은 서로 물고 돈다. 대종교, 단군, 한얼의 자리 나철이 다시 세운 대종교는 단군을 민족의 뿌리로 받들었다. 단군은 신화가 아니다. 나라 잃은 조선 사람들에게 단군은 우리는 누구인가”를 되묻게 하는 첫 얼굴이다. 대종교의 한얼 사상은 민족종교 꼴을 띠었으나, 그 속에는 잃어버린 얼을 되찾으려는 종교적 갈망이 있었다. 단재는 조선을 조선되게 한 정신을 낭가사상에서 보았고, 민족의 님바탈 회복은 낭가사상을 발굴해 민족정기를 고취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또한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단재는 사대 유학파 김부식에 대한 비판을 통해 민족자주적인 낭가사상을 인식하고, 중세적 유교사관을 넘어 근대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한국 고대사를 정립하려 했다. 다석은 예수를 깊이 사랑했다. 예수는 말씀이 몸이 된 사람, 참을 몸으로 산 사람, 하늘 뜻을 땅에서 산 사람이었다. 그런 다석에게 단군과 예수의 만남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단군이 겨레 얼의 첫 얼굴이라면, 예수는 하늘 말숨이 몸이 된 얼굴이다. 한얼과 말숨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한얼은 겨레 속에서 하늘을 찾는 말이고, 말숨은 사람 속에서 참을 밝히는 말이다. 겨레에는 얼이 있다. 말에는 얼이 있다. 역사에는 얼이 있다. 사람에게는 얼나가 있다. 얼을 잃으면 사람도 남의 것이 되고, 나라도 남의 것이 된다. 단재의 민족 얼은 다석 안에서 얼생명으로 깊어졌다.   그림9) 상해 망명 당시의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왼쪽부터 신채호, 신석우, 신규식. 1919년경. 단재에서 다석으로, 다석에서 함석헌으로 단재의 역사 불칼은 다석을 거쳐 함석헌에게서 다시 타올랐다. 함석헌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역사를 뜻의 자리로 읽었다. 민족의 고난을 하늘 뜻의 길로 읽고, 씨알의 고난을 세계사의 물음으로 밀고 나갔다. 단재가 민족사를 식민사관의 갇집에서 꺼냈다면, 함석헌은 그 민족사를 씨알과 세계사의 뜻으로 다시 읽었다. 그 사이에 다석이 있다. 다석은 함석헌의 스승이다. 다석에게 배운 함석헌은 역사 속으로 나아갔다. 단재의 역사 불칼, 다석의 말숨, 함석헌의 씨알 역사화가 하나의 얼줄로 이어진다. 사상사의 깊은 층위에서는, 한 시대의 물음이 다른 사람 안에서 다른 말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단재는 조선은 누구인가”를 물었다. 다석은 사람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함석헌은 씨알은 역사 속에서 무엇을 뜻하는가”를 물었다. 세 물음은 다르지만, 모두 제 얼로 서는 주체”를 향한다. 단재를 다석철학 인물지도에 놓는 까닭은 단재가 다석 안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 그리고 다석을 지나 함석헌의 씨알 사상으로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보는 일에 있다. 단재는 다석의 한글철학에 민족의 심장을 심었다. 다석은 단재의 역사 불칼을 말숨으로 깊게 했다. 함석헌은 그 말숨을 씨알의 역사로 밀고 나갔다. 역사 불칼이 말숨이 되다 단재는 다석에게 무엇이었을까? 첫째, 단재는 다석에게 민족 주체의 불칼이었다. 남의 힘에 기대지 말라. 남의 역사에 속지 말라. 남의 말로 자신을 규정하지 말라. 이것은 다석의 한글철학에서 제소리”가 되는 밑불이다. 둘째, 단재는 다석에게 갇집 깨기의 역사였다. 식민사관의 갇집, 사대주의의 갇집, 낡은 제도의 갇집을 깨야 한다는 단재 정신은 다석에게서 제나와 겉나와 교리의 갇집을 깨는 수행으로 깊어졌다. 셋째, 단재는 다석에게 열린 국수의 길이었다. 단재는 조선의 국수와 국문과 역사를 통해 민족 님꼴을 세우려 했지만, 그것은 외래를 막는 폐쇄가 아니었다. 제 얼이 있어야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열린 님꼴의 길이었다. 다석의 한글철학도 그렇다. 그는 세계 종교와 철학을 우리말로 다시 낳았다. 넷째, 단재는 다석에게 역사와 얼이 하나라는 깨우침이었다. 역사는 바깥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사람과 겨레가 제 얼을 잃고 되찾는 길이다. 다석의 말숨도 그러하다. 말은 소리만이 아니라 얼의 숨이다. 얼이 없는 말은 빈 껍데기요, 말이 없는 얼은 전해지지 않는다. 오산에서의 짧은 만남은 그렇게 길어졌다. 한 교무실, 한 마당, 한 저녁의 대화였을지 모른다. 혹은 몇 번의 마주침과 몇 번의 길고 긴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상사의 만남은 시간으로만 재지 않는다. 어떤 만남은 한순간에 한 생애를 바꾼다. 어떤 눈빛은 한 사람 속에서 평생 꺼지지 않는다. 단재는 다석에게 그런 눈빛이었으리라.   그림10) 충북 청주시 낭성면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당, 묘소, 기념관이 있다. 이 세숫대야는 기념관에 있다. 단재는 세수할 때 허리와 고개를 굽히지 않고 서서 손으로 물을 찍어 얼굴에 발랐다. 일제 식민지하, 그는 결코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다. 꼿꼿하게 자존과 절개를 지켰다. ‘단재(丹齎)’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지은 ‘단심가’에서 따온 말이다. 그가 왜 세수를 서서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하리라. 나는 누구의 역사로 나를 보고 있는가! 나는 누구의 말로 나를 말하고 있는가! 나는 누구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 내 안의 식민지는 어디에 남아 있는가! 내 안의 갇집은 무엇인가! 단재는 말한다. 고개를 들라! 제 역사로 서라! 제 얼로 깨어나라! 다석은 말한다. 겉나를 태워라! 말숨으로 살아라! 속나로 솟아라! 말숨은 다시 씨알 속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단재를 읽는 까닭은 우리 안의 고개 숙인 마음을 보기 위해서 이리라. 남의 역사, 남의 말, 남의 제도, 남의 욕망에 길든 나를 깨우기 위해서 이리라. 단재는 다석에게 민족 숨빛이었다. 다석은 단재의 불칼을 말숨으로 다시 살렸다. 그 불칼은 아직 식지 않았다. 다음은 시당 여준이다. 오산의 또 다른 숨빛, 동양 고전과 독립운동의 길목에서 다석에게 노자와 불경의 문을 열어준 사람. 시당은 오산 깊은 곳에서 다석에게 동양 고전의 숨문을 열어준 조용한 등불이었다. - 참고한 책 - 단재신채호전집편찬위원회, 『단재신채호전집』 7 (독립기념관, 2007) - 김현주, 『단재 신채호 소설 연구』 (소명출판, 2015) - 박근갑, 『자존의 구도자 신채호』 (한림대학교 지식미디어센터, 2023)  김종길 다석한글철학 연구자 gjg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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