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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80년 언론인 강제해직에 대한 국가의 책무

80년 언론인 강제해직에 대한 국가의 책무
[뉴스]
가끔 어떤 중요한 일을 겪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네가 다시 그런 일에 닥친다면 또 그렇게 하겠는가?” 오늘 다시 1980년 광주에서처럼 모든 언론이 통제되어 깜깜한 속에 무고한 시민 수백 명이 살상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평소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이 TV에 웃고 떠드는 쇼 프로와 드라마들을 틀어대고 있을 것인가? 생명까지 걸고 국가범죄에 저항한 언론인들 지난 16일 나는 1980년 신군부 언론탄압으로 강제 해직된 언론인들과 함께 서울중앙지법 재판정에 있었다. 나를 포함,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80년해언협) 소속 해직 언론인과 유족 등 3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46억여 원 규모 손해배상 소송의 첫 변론기일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국가에 대해 해직에 따른 정신적 피해를 배상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개별 피해 사실을 추가로 제출할 것이며, 소멸시효 문제와 관련해서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할 계획이다. 올해 2월 시행된 개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에 따르면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사람은 소멸시효가 완성됐더라도 법 시행일로부터 3년 안에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80년 언론인 강제해직에 대한 국가 사과와 배상 청구소송의 첫 재판이 열린 7월16일 오전 해직언론인들이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정 출입구에 모여 있다. (80년해언협 제공) 신군부는 1980년 초 보안사령부(보안사) 정보처에 언론대책반을 두고 언론 통제 계획을 추진했다. 주요 언론사 간부 회유, 언론인과 언론기관 동향 파악, 언론인 해직, 언론사 통폐합 구상 등이 포함됐다. 5·18민주화운동 이후 언론 통제를 강화하면서 보안사는 보도 검열 비협조자 등 300명 이상의 언론인 명단을 작성했다. 당시 그런 엄혹한 상황에서 나는 왜 권력에 저항했는가? 80년 저항 언론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덤볐다가 상처받은 것이 아니다, 이미 스스로 자기의 행위로 자신의 직업, 재산, 자유시민으로서의 생활,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길 위험성을 익히 인지한 상태에서 일어섰다. 당시 언론사 정문 양편에 시퍼런 대검을 착검한 공수부대원들이 24시간 노려보고 있던 분위기 아래에서 검열 거부와 제작 거부를 감행했다. 실은 그 이전부터 각 언론사엔 정보부와 보안사 요원들이 버젓이 우리와 같이 출근하였는데 내 책상 위에 작성 중인 콘티(프로그램 구성안)를 양해 없이 쓱 채가서 정 PD, 이런 프로 꼭 해야 돼?”라며 반말로 다그치던 표정이 지금도 어제처럼 선하게 떠오른다. 아마 내가 드라마나 예능프로가 아닌 다큐PD였기에 더 많이 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펀성제작국을 한 바퀴 돈 뒤 국장 방에 들어가 커피 마시고 점심 얻어먹으면서 소위 정보보고서란 것을 썼다. 같은 날 두 형제가 같은 이유로 강제해직 당했다 5월 23일 나는 남성우 선배 PD와 TBC TV 편성제작국 비상회의를 주선했다. 국보위의 검열을 거부하고 공정방송을 위배할 경우 제작거부를 감행한다는 결의를 얻어냈다. 회의를 마치고 결의문 작성을 맡아 손글씨로 썼다. 당시엔 곁에 타이프라이터가 상주했으나 위험이 커서 직접 손으로 쓴 뒤 복사하여 사내는 물론 MBC에도 가서 뿌렸다. 당연히 쫒겨날 것을 각오하고 한 일이었다. 7월 30일 당국의 명령이라며 전원 사직원을 제출해야 할 때, 모두가 국장이 불러주는 대로 저는 일신상의 사유로 인하여 사직원을 제출합니다”라고 써서 제출했다. 8월 1일 국장이 남성우 선배와 나만 따로 불렀다. 평소 우리를 아끼던 분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너희 둘이 우리를 구한 셈이다. 사표가 수리됐다”고 슬퍼하는 그의 등 뒤 TV 화면에 마침 전두환 소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무슨 연설을 하고 있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눈물을 흘리던 국장이 오히려 웃는 나를 보고 의아해 하기에 국장님, 저 놈이 곧 대통령이 된다니 웃음이 안 나옵니까?” 했다. 사람좋은 국장은 일개 육군 소장이 어떻게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단 말이냐!”고 했지만 그 소장은 결국 8월 27일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투표자 2525명 중 찬성 2524명, 99.96% 득표율(무효표가 단 1표 나왔는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지금도 궁금하다). 설상가상이랄까, 우리 집안 두 형제가 이때 동시에 강제해직 당했다. 정원조 형(내외경제 정치부)이 나는 오늘부터 회사 못나간다”고 전화를 해왔다. 자기 신문에서 ‘광주 폭도’라는 제목이 나온 걸 보고 편집회의에서 왜 무고한 시민들을 폭도라고 쓰냐?”하고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 형제가 같은 날 같은 사건으로 쫓겨난 것이다. 연로하신 홀어머니는 몸져 누우셨다. 나는 그동안 착실히 주택부금 부어서 입주했던 새 아파트 팔고 남의 집 문간방에 세를 얻어 입주했다. 재취업은 국보위가 막았다. 80년 강제해직자들의 소식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가까운 친구들도 내 사정을 모를 정도였다. 요즘처럼 시민단체도 없고 유튜브도 없었으니까. 강제해직은 언론통폐합의 전주곡 5.18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은 한 글자도, 한 장면도 보도되지 못했다. 그렇게 무서운 철퇴를 휘두르며 등장한 신군부는 급기야 그 해 11월 30일 언론 역사 이래 유례 없던 방송사 폐방(시청률 1위 TBC와 라디오 청취율 1위 동아방송 폐방, CBS의 보도기능 폐지)을 감행했으며 모든 통신사를 한 개로 통일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문사도 1도 1사만 남기고 나머지는 강제로 없앴는데 그 엄청난 조치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치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넉달 전 700여 명의 강성 언론인들을 소리 없이 쫒아내면서 얻었던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론인 강제해직사건은 한국 언론사에 더욱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다.   80년 당시 언론통폐합을 보도한 신문들. 실제 내가 가까이서 겪은 얘기다. 해직되기 전 중앙매스컴 홍진기 회장과 직원 대표 몇이 대담자리를 가졌던 적이 있는데 내가 돈 많이 버는 TBC이니 제작비 좀 올려달라”고 건의하니까 홍 회장의 답변이 흥미로웠다. 수익이 많이 나는 건 사실이다. 단 우리 회사는 앞으로 호암아트홀에서부터 저 남대문 앞까지 넓은 토지를 확보하여 미래 시대에 걸맞은 종합미디어센터를 건설하기 위해 착실히 자금을 축적중이니 몇 년만 참아 달라.” 나는 당시 홍 회장의 말이 진실이었다고 믿는다. 그는 웃으며 그래서 건물들 벽돌도 (이병철 회장이 좋아하는) 이태리 갈색 대리석으로 통일할 예정이다.” 실제 호암아트홀과 남대문 앞 당시 동방생명과 여의도 인도네시아 앞 TBC 별관 건물이 모두 그 색깔 벽돌로 지어졌다. 그토록 원대했던 계획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고 TBC는 폐방되었다. 이른바 K공작의 일환이었다. 천하의 이병철 삼성 회장이 육군 준위 이상재가 휘둘렀던 총칼의 힘에 무너진 것이었다. 이상재 준위는 전역 후 바로 국회에 입성했다. 철퇴는 무자비하게, 살아남은 자들에겐 당근을 사실 나는 30여 년 전인 1992년 10월 동료 3명과 함께 강제해직 무효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다. 군사정권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당연히 승소는 바라지도 않았으나, 80년 강제해직에 관한 공식기록이 하나도 없었던지라 내 아들 딸과 언론 후배들에게 역사의 조각이나마 남길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약간의 희망이 보이긴 했다. 80년 당시 상황에 대해 여러 관련 증인들을 불러 증언을 들었는데, 인사책임자 포함한 모든 증인들이 이구동성으로 군부 지시를 따라 강제로 해직시켰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 듣고 난 판사의 판결은 역시나였다. 증언의 내용과는 완전히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해직 후 시일이 12년이 지났고, 퇴직금을 수령하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음은 사직의사가 있었음을 반증하므로 모두 기각하고 소송비는 패소한 원고 부담으로 판결한다.” 분명히 하자. 강제해직자의 제소대상은 언론사주가 아니라 국가이다. 국가가 명확히 바로 잡고 사과하고 배상해야 할 사안이다. 불쌍한 피해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생활지원금이 아니다. 내가 지금 늙어서 어디 아프든, 아내가 무슨 생업을 하든, 생활난을 기준으로 보태고 뺄 사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해직 당시 근무 1년 미만 신입 언론인이므로 배상금 0원은 어불성설이다. 강제해직사건의 의미는 앞날이 창창한 청년 저널리스트의 앞길을 막았다는 것이지, 1년 동안 생활비를 벌지 못하게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쁜 독재정권의 공통점은 철퇴는 무자비하게, 당근은 각개격파식으로 피해자들을 적전분열시키는 수법을 쓴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 1980년 당시 살아남은 기자들에게 기자아파트, 자녀 학자금 지원, 해외연수 기회까지 베풀고 월급여의 20%를 세금 면제해준 사실을 간과하거나 잊은 사람들이 많다. 이 특혜는 10여 년간 지속되다가 일부 양심있는 언론인들의 문제 제기로 폐지됐다. 실제 내가 1990년 전국PD연합회 사무국장으로 공정방송운동을 하고 있을 때 진지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모처라고만 하면서 이미 기자들에겐 갑근세(그는 그렇게 표현)를 면제해주는 거 아시죠?”라기에 금시초문이라니까 PD들에게도 혜택을 주려고 한다”면서 신이 나서 예능이나 드라마는 빼고 교양다큐PD에만 국한하려 한다”며 생색까지 내는 게 아닌가. 내가 관등성명을 대라, 당신이 뭔데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인 세금납부에 인심을 쓰는거냐?” 호통을 쳤더니 그냥 전화를 끊은 기억이 새롭다.   20일 국회에서는 80년 언론인 강제해직의 역사성에 대한 국민대토론회가 열린다. 국가기관 법원은 국가의 역사를 바로 세우라 80언론인들의 저항과 강제해직 사건 관련 소송은 매우 명료한 것이 다른 사건들과 다르다. 피해자들의 직종, 당시 사회상, 행동 사유는 물론 해직 후 계속된 피해사례 등이 거의 같으며 대상도 국가로 단일하다. 마치 3.1운동이나 4.19나 5.18항쟁이 참가자(피해자)와 소구대상이 분명함과 같다. 따라서 재판 역시 질질 끌며 법리를 따지고 자구 수정으로 세월 보낼 이유가 없다. 이미 46년이 흐르지 않았는가. 역사성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아픔을 딛고 발전함을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 12.3계엄을 발동한 윤석열이 한겨레, 경향신문, MBC, JTBC 등을 봉쇄하고 단전단수 하라”고 지시한 것은 5.18 광주를 앞둔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통폐합에서 배운 것이라면, 당일 밤 계산 없이 뛰쳐나온 시민들이 맨손으로 그 무서운 특수부대를 막은 것은 광주시민들의 용기에서 배운 것 아니겠는가. 또한 그 정신은 80년 해직 언론인들의 저항 정신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정훈 80년 해직 전 TBC 다큐PD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의 국회 제안 설명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80년 5월이 2024년 12월을 구했다. 5.18 민중항쟁은 일부 지역주의와 퇴행적 극우집단에 의해 폄훼되기도 했으나, 대다수 국민의 염원에 따른 국회 합의에 맞춰 그 의미를 바로 세운 바 이제 강제해직 언론인들에 대한 국가 사과와 올바른 배상 실현이 민주헌정 수호의 마침돌이 될 것이다.”  정훈 80년 해직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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