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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감옥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시인 목사, ‘늦봄’ 문익환

감옥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시인 목사, ‘늦봄’ 문익환
[사람들]
하늘과 별을 노래하던 마을에서 문익환(1918~1994)은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호는 늦봄이다. 봄은 아무리 늦어도 끝내 온다는 믿음이 담긴 이름이다. 그러나 정작 그는 봄을 기다리며 겨울감옥에서 보낸 날이 더 길었다. 이름값을 꽤 비싸게 치른 셈이다. 그는 윤동주(1917~1945)와 같은 마을에서 자랐고 같은 학교를 다녔던 절친 이었다. 동주가 별을 노래하다 서른을 채우지 못하고 떠났다면, 익환은 그 노래를 평생 몸으로 이어 불렀다. 문익환은 목사이자 시인이었고 성서 번역자였다. 1977년 출간된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에도 참여했다. 서로 다른 교파가 함께 성서를 번역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같은 성서를 읽으면서도 하느님과 하나님을 달리 부르는 현실은 종교 안에도 넘기 어려운 담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뒷줄 가운데 문익환, 오른쪽은 윤동주다. 왼쪽은 장준하, 앉은이는 정일권이라는 설이 있지만 아닌것 같다. 하지만 넷은 만주 용정의 광명중학교 동문이다(위키피디아) 설교단에서 거리로 1970년 전태일(1948~1970)의 죽음과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마주하며 문익환은 교회담장을 넘어 거리로 나섰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발표된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투옥됐다. 동생 문동환(1921~2019)도 민주화운동에 나섰으니 형제에게 감옥은 낯선 장소가 아니었다. 군사정권은 그를 거듭 가두었다. 감옥문턱이 하도 닳아 문지기와 안면을 텄을 법하다. 하지만 그가 갇힌 까닭은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1987년 이한열(1966~1987)의 장례식에서도 그는 연단에 올랐다.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잃은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빠뜨리지 않는 것, 그것이 그가 시대를 증언하는 방식이었다. 권력은 숫자를 세지만 시인은 이름을 기억한다. 젊은 시절 문동환과 문익환(늦봄 문익환 아카이브) 잠꼬대가 현실이 되다 1989년 1월, 문익환은 그해가 가기 전에 평양에 가겠다는 뜻을 담은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발표했다. 사람들은 시인의 허풍쯤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3월 25일, 일흔을 넘긴 시인은 실제로 평양 땅을 밟았다. 김일성(1912~1994)을 만나 통일문제를 논의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4월 13일 귀국하자마자 그는 구속됐다. 물론 평양행이 문익환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1972년 이후락(1924~2009)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했고, 남북당국은 7·4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88년 노태우(1932~2021) 정부도 7·7 선언을 통해 남북 교류확대를 내걸었다. 그런데 정부가 접촉하면 외교이고 민간인이 접촉하면 이적이 되는 셈이었다. 그해 9월 11일 노태우 정부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남북연합을 거쳐 통일국가를 이루자는 구상이었다. 정부가 문익환의 주장을 그대로 베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민간인의 방북을 처벌하면서 정부는 통일방안을 내놓는 역설은 분명했다. 이듬해인 1990년 8월 1일에는 남북교류협력법이 제정·공포됐다. 남북왕래와 접촉, 교역과 협력사업을 법률로 규율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문익환의 방북이 이 법을 직접 낳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몸으로 제기한 질문은 이후 남북관계의 제도적 변화와 함께 읽을 만하다. 문익환은 김일성을 만나서 박용수의 겨레말사전 을 선물했다. ⓒ 사단법인 통일의 집 먼저 간 사람의 값 문익환은 1993년 3월 6일 특별가석방으로 풀려났고, 이듬해 1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김일성도 1994년 7월 사망했다. 평양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2000년 김대중(1924~2009)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정일과 만나 6·15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 냈다. 민간인의 평양행을 죄로 다스리던 시대에서 남북정상이 만나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시대로 변한 것이다. 넬슨 만델라(1918~2013)는 인종차별에 저항하다 27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됐다.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는 동방정책으로 동서독 관계 개선을 추진해 1971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평화를 먼저 말한 사람이 당대에는 비난받더라도 훗날 그 생각이 정치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역사는 반복된다. 문익환(나무위키) 오늘 한국이 새겨야 할 것 첫째, 오늘의 금기가 내일의 제도가 될 수 있다. 문익환이 방북으로 처벌받던 시대에도 남북 교류의 필요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치란 이미 가능한 일만 관리하는 기술이 아니다. 지금은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미래에 필요한 길을 상상하고 준비하는 일이다. 둘째, 만남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북한이 통일보다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를 강조한다고 해서 대화 자체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 상대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과 상대를 만나 대화하는 것은 다르다. 이산가족, 인도적 지원, 문화와 학술교류처럼 사람을 잇는 작은 길은 지켜야 한다. 셋째, 남북긴장을 권력의 방패로 삼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저지른 비상계엄 사태는 이 문제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 주었다. 2026년 2월 19일 서울중앙지법은 윤석열에게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군을 국회에 투입해 헌법기관의 기능을 마비시키려 한 행위 등을 내란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다시 심리되고 있다. 별도로 공수처의 체포영장 집행을 방해한 혐의 등에는 대법원이 2026년 7월 징역 7년을 확정했다. 더욱 무거운 쟁점은 북한을 자극해 계엄의 명분을 만들려 했다는 의혹이다. 2026년 6월 1심 법원은 평양 무인기 작전과 관련한 일반이적 혐의 등으로 윤석열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이 역시 별개의 사건으로, 항소심과 확정여부를 구분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판결과 재판은 남북긴장을 국내정치에 이용하려는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낳는지 묻는다. 문익환의 시대에는 대화하려는 사람이 처벌받았다. 오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평화를 위한 만남을 막거나 갈등을 키워 윤석열처럼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행위다. 넷째, 신앙인은 누구의 곁에 서야 하는가. 같은 십자가를 걸고도 어떤 이는 갇힌 사람 곁에서 고통을 함께하고, 어떤 이는 권력의 편에서 약자의 입을 막는다. 늦봄이 보여 준 신앙은 설교단에서 끝나지 않았다. 고통 받는 사람 곁으로 걸어가는 신앙이었다. 문익환은 통일을 완성하지 못했고 남북의 화해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삶이 실패였다고 할 수는 없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먼저 말하고, 그 봄을 위해 자신이 먼저 걸어간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누군가의 잠꼬대처럼 들리는 말이 내일의 정책이 될 수 있다. 법정은 문익환에게 징역을 선고했지만,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1987년 7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치른 이한열 열사 장례식. 연단 위에 선 문익환 목사는 조사 대신 26명의 열사 이름을 부르며 절규한다.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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