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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내사랑 광주…김민기와 광주의 짧지만 뜨거운 인연

내사랑 광주…김민기와 광주의 짧지만 뜨거운 인연
[사람들]
1979년 ‘12·12 군사 반란’으로 군부와 정보기관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1980년 봄이 되면서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을 앞세워 정권 찬탈의 야욕을 노골화했다. 여야의 계엄령 해제 요청을 거부하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3김’에 대한 견제도 강화했다. 노동 및 학생 운동권, 재야인사, 정치인 등 이른바 요시찰 인물에 대한 사찰도 부활했다. 귀향해 농사를 짓는 김민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보름이 한 번 더 지나고, 마을에서 한 해 농사 준비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집주인이 김민기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형사가 찾아왔는데, ‘내(형사)가 피곤해서 미칠 지경이니 김민기를 집에서 내보내’라고 하더란다. 이리 경찰서 관내가 아닌 다른 지방으로 가면 더 좋겠다고도 했다고 한다. 부탁이 아니라 강요였다. 그동안 동네 어른들과도 친해지고, 정도 들었는데…, 아쉬웠다. 그러나 소 돼지보다 힘이 없는, 땅이나 파먹는 농사꾼이 경찰의 강요를 어떻게 버틸까. 눈만 껌벅이며 잠자코 듣던 김민기는 집주인의 하소연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마’라고 답하고는 말없이 짐을 쌌다. 다행히 다음 정처는 곧 생겼다. 여장수 교장에게 부탁했더니, 김제에 소작할 땅이 딸린, 나름 살만한 집이 있다는 전갈이 왔다. ‘내 논에서 내 손으로 농사를 짓고 싶었는데….’ 비로소 하늘이 돕는 것 같았다. 이삿짐이라 봤자, 바퀴 3개짜리 삼륜차 한 대면 충분했다. 삼륜차 밖으로 보이는 김제의 아득한 들판은 일찌감치 몸을 풀고 있었다. 두엄 냄새, 흙냄새와 함께 새파란 싹들이 바람에 떠밀려 파도처럼 일렁였다. 노래란 이럴 때 나와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입에서 노래 한가락 흘러나왔다. ‘나그네 설움’이었다. 머잖아 정처를 찾아 이곳저곳 떠돌아다닐 때 그의 18번이 될 노래였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그렇게 지방도를 타고 30분쯤 가자, 서암리가 나오고, 다시 시골길을 따라 20분쯤 더 가니 드넓은 들판 한 귀퉁이 야산 기슭의 범독골에 이르렀다. 논 6,000평을 어우리(반타작)로 빌려주기로 했다는 조병무 씨 집이었다. 생초보가 그걸 어떻게 지을까 싶었지만, ‘궁즉통(窮卽通)’이라, 궁하면 통하는 법. 게다가 김민기가 누군가? 1980년 서울의 봄…민주화를 요구하며 서울역 광장에 모인 대학생들. 사진출처: 민주로드 80년 봄, 짧게는 유신체제 등장 이후 7년, 길게는 박정희 쿠데타 이후 19년 만에 맞은 ‘봄’, 세상은 온통 들떠 있었다. 따듯한 햇살에 온갖 씨앗들이 싹을 내밀고, 나무들은 봄꽃을 피워올리고…, 백화제방(百花齊放)이었다. 대학가는 물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그동안 쌓여 있던 온갖 주장과 계획과 비전이 난전을 이뤘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이었다. 시민사회에서는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다. 그러나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해도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박정희가 내부의 총질로 비명에 갔는데 설마….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3김’도 마찬가지였다. 광주나 전주에서 범독골로 김민기를 찾아오는 이들이 하나둘 늘었다. 김민기도 마음이 들떴는지, 대처로는 일절 나가지 않겠다던 공언과 달리 가까운 광주나 전주로 출타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던 중 광주에서는, 1979년 11월 창단한 마당극단 ‘광대’가 1980년 3월 창단 공연을 한다는 기별이 왔다. ‘광대’는 전남 해남을 거쳐 1978년 광주로 근거지를 옮긴 소설가 황석영이, 광주와 전남의 문화 운동 패들이 한데 어울려 활동하도록 출범을 지원한 극단이었다. 황석영은 1970년대 말부터 광주로 거처를 옮긴뒤 극단 광대를 만드는 일을 도우면서 , 한편으로는 김민기에게  창단 공연( 돼지풀이)를 돕도록 했다. 황석영은  임을 위한 행진곡 작사에도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사진은  1988년  4월 극단 광대에서 활동한 박효선(사진 오른쪽)과  서울 미리내소극장에서 열린 금희의 오월  공연을 마친뒤 뒤풀이 때 모습이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제공  : 연극과 인간 창단 공연 준비에는 서울의 채희완, 임진택, 장만철(영화감독 장선우) 그리고 광주의 김남주와 김상윤 등이 울타리가 되고 전남대와 조선대의 놀이 패인 김태종, 이현주, 전용호, 박효선, 김선출, 김윤기 등이 배우나 스태프로 참여했다. 서울의 선배들은 번갈아 내려와 숙식을 같이하며 후배들을 지도했다. 황석영의 뿌리칠 수 없는 회유와 협박에 따라 김민기도 오갔다. 소리굿 를 제작해, 대학가에 마당극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었니, 발을 빼려야 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농한기였고, 서울의 어린이집 설립 기금 마련 공연도 성황리에 끝났으니, 빠져나갈 핑계도 마땅치 않았다. 창단 공연 는 유신정권의 철면피한 농정을 풍자한 마당극이었다. 당시 전국 농민의 등골을 부러트린 ‘돼지 파동’을 극화했다. 1977년 중반 정부는 저곡가로 허덕이는 농가를 도와준답시고 저리로 정책 융자까지 하며 돼지 사육을 권장했다. 그런 정부가 2년 뒤 2차 석유파동이 터지면서 물가가 치솟자, 돌연 돼지고기 시장을 개방해 저렴한 외국산 돼지고기 수입을 무제한 허용했다. 농민들이 빚내서 키운 돼지를 막 출하하려 할 때였다. 물가를 잡겠다며 국내 축산 농가를 희생시킨 것이었다. 돼지 가격은 폭락했고, 농민들은 빚더미 위에 올랐다. 돼지 농가의 아우성은 시위로 변하고, 시위는 육탄전으로 발전했다. 자살하는 농민도 속출했다. 이른바 ‘돼지 파동’이었다. 김민기가 합류하면서 공연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임진택이 연기와 소리를, 채희완이 춤을 지도했으니, 지방 문화운동가들의 창단 공연은 중앙의 전문 극단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당대의 아이돌 양희은과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도 참여했고, 황석영과 김민기의 유명세까지 더해져 는 물론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광대’가 창단 공연에 이어 황석영 원작 를 준비할 때였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협박해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전국 계엄에서는 계엄사령부가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장악했다. 설마 했던 쿠데타였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에서 시민들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다. 김민기는 훗날  공수부대원들이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 모습을 봤다고 회고했다. 사진: 5.18재단(황종건 제공) 이튿날 5월 18일 아침 광주에서는 계엄군이 본보기라도 보이려는 듯 시위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패고 짓밟았다. 학생들은 처절하게 저항했고, 계엄군의 폭력은 더 극악스러워졌다. 보다 못한 시민들이 항의하고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계엄군은 기다렸다는 듯 개머리판, 대검까지 사용해 피바람을 일으켰고, 학생과 시민은 깨지고 찢어지고 쓰러지면서도 물러서기는커녕 더 처절하게 맞섰다. 항쟁의 시작이었다. 광주는 좁았다. 놀이패가 운동권이었고, 운동권이 놀이패였다. 극단 ‘광대’의 연기자와 스태프는 항쟁의 최전선에 섰다. 배우 김태종, 이현주가 대중 연설을 주도하고, 전용호가 홍보 선전 작업에 나서는 등 단원 대부분 항쟁의 일선에 섰다. 박효선, 김선출, 김윤기는 투옥됐고, 나머지는 도피했다. ‘광대’는 이듬해인 1981년 2회 공연이자 창립 1주년을 기념하는 공연 를 끝으로 해산했다. 너무 많은 단원이 희생돼 더 유지할 수 없었다. 황석영은 1977년 에 대하소설 을 연재하던 중 ‘집필’을 위해 해남으로 거처를 옮겼다. 피가 뜨거웠던 그는, 집필보다 지역 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광주, 전남의 지역 민주화운동 역량을 확충하고 지원할 현장 문화 운동 조직을 꾸리는 데 앞장섰다. 해남에서 시인 김남주와 ‘더불어농민학교’를 세웠다. 1978년 광주 운남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민청학련의 김상윤, 시인 김남주 등과 녹두서점을 설립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민중문화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 연구소는 광주의 크고 작은 민주화운동의 진원지 구실을 했다. 이후 ‘빵잽이’ 출신들이 모인 민주청년협의회, 광주 최초의 노동야학인 ‘들불야학’, 여성 중심의 송백회, 시민 모임인 양서조합이 잇따라 탄생했다. 이들 모임은 이미 활동하던 기독교계의 농민회, 노동청년회 등과 연결돼 강력한 지역 운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극단 광대는 이런 광주, 전남 민주민중운동의 전위이자 문화선전대로 탄생한 것이었다. 박기순은 광주 전남에 야학운동의 씨를 뿌린 들불야학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그는 광주 전남에서 제1호 위장 취업자이기도 했다.  박기순은 1978년 연탄가스에 중독돼  돌연 세상을 떠났다.  김민기는 김상윤을 만나기 위해 녹두서점에  들었다가 부음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해 상록수를 불렀다. 사진은 들불야학 교실 전경. 왼쪽 앉은 이가 박기순의 생전 모습.  사진출처: 남도일보, 제공: 들불열사기념사업회    ‘광대’가 창단 공연을 준비할 무렵 광주, 전남에 야학 운동의 씨를 뿌린 들불야학의 박기순이 1978년 12월 26일 돌연 세상을 떠났다. 스물두 살이었다. 광주 지역 민주화운동의 전설적 형제인 박화강(전 한겨레 기자), 박형선(민청학련 관련 15년 형 선고받음, 2022년 작고)의 여동생이었다. 박기순은 대학 2년 때 광주의 ‘꼬두매 야학’에서 강학(야학 교사)을 했다. 3학년 때 전남대 교수 11명의 ‘교육지표 사건’과 관련한 학내 시위에서 마이크를 잡았다가 제적당했다. 박기순은 곧 아시아자동차(지금의 기아자동차) 하청 업체인 동신강건 공장에 취업했다. 광주, 전남에서는 첫 ‘위장 취업’이었다고 한다. 공장에 다니면서부터 일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데 골몰했다. ‘꼬두매 야학’의 경험이 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서울로 가서 노동야학인 ‘겨레터 야학’에서 경험도 쌓고, 인맥도 쌓았다. 마침 ‘겨레터’의 활동가 전복길, 김영철, 최기혁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영 통지를 받은 상태에서 광주로 귀향했다. 박기순은 광주에 노동야학을 세우자고 이들을 설득했고 신영일, 임낙평 등을 합류시켜 새로운 야학을 설립했다. 들불야학이었다. 광주항쟁 당시 들불야학 강학들도 대부분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총을 잡은 이도 있고 펜을 든 이도 있었지만, 있는 곳이 어디든 모두 최전선이었다. ‘투사회보’를 필사하던 박용준은 YWCA에서 최후를 맞이했고, 윤상원은 시민군 대변인으로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했으며, 박관현은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교도소 내에서 40여 일의 단식투쟁을 하다 숨졌다. 김영철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들불야학 박기순 장례식의 첫 조사는 황석영의 몫이었다. 그는 그해 2월 박기순의 오빠 박형선과 윤한봉의 동생 윤경자 결혼식의 주례를 섰던 터였으니, 인연치고는 참으로 기구했다. 김민기는 민중문화연구소의 김상윤을 만나기 위해 녹두서점에 왔다가 소식을 듣고는 달려갔다. 문병란 시인의 조사에 이어,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의 홍승기 교수가 조사를 낭독했다. 조사가 끝나자, 참석자들의 눈길은 김민기에게 쏠렸다. 김민기는 아무 말 없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상록수’를 불렀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합동 결혼식을 위해 작곡한 노래는, 푸르디푸른 한 여성 민주화 운동가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노래가 되었다. 박기순이 떠나고 3년 2개월, 광주항쟁이 있고 1년 9개월 뒤, 광주 망월동 공동묘지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광주항쟁 당시 시민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희생된 윤상원과 그보다 먼저 떠난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이었다. 민청학련과 관련해 14년 형을 받았던 윤상원은 박기순이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들불야학 강학이었고, 박기순이 떠난 뒤 들불야학을 이끌던 이였다. 앞서 1981년 4월 광주항쟁 1주년이 다가올 무렵 남은 이들은 황석영의 운남동 집에서, 먼저 간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노래극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었다. 앞서 박기순과 윤상원의 가족은 먼저 간 딸과 아들, 누이와 동생이 이승에서 맺지 못한 가약을 저승에서라도 맺도록 하기로 약조했다. 이를 계기로 살아 남은 벗들이 앞서간 이들을 위해 기획한 작품이 였다. 노래극은 2개월여 만에 완성됐다. 극 중 노래는 공안기관의 감시를 피해 황석영의 골방에서 카세트테이프리코더를 이용해 테이프에 담겼다. 자취방에서 녹음한 이 조악한 원판은 2,000여 개의 카세트테이프로 복제돼 전국으로 배포됐다. 1978년 김민기가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제작하고 배포했던 과정을 그대로 따랐다. 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래가 오정묵의 목소리로 녹음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오늘날까지 시련과 영광 사이를 오가며, 앞선 이를 기억하고 뒤따르는 이를 격려해 온 ‘임을 위한 행진곡’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노래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거기에서도 김민기의 흔적이 발견된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광주 시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보다 ‘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죽음을 먼저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 박흥숙이 사형당했던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김민기는 박흥숙이 사형 당한 그날 광주의 싱어송라이터 김종률 등과 무등산에 올랐다. 마침 ‘무등산 타잔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장소, 덕산골을 지나가고 있었다. 1977년 4월 광주시 소속 철거반원에 의해 무허가 움막집 20여 채가 파괴되고 저의 집이 불태워지는 것을 본 박흥숙이 철거반원 4명을 죽인 그 참혹했던 현장이었다. 박흥숙이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그 집터는 흔적마저 사라지고 주춧돌 몇 개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한동안 담배를 피우던 김민기가 김종률에게 이렇게 말하더란다. 너는 민중, 민주화 그리고 자유를 노래하고, 그런 노래를 만들면 좋겠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든 김종률. 그는 광주의 5월을 거치면서 좌절에 빠졌으나  김민기로부터 민중, 민주화 , 자유를 노래하라는 조언을 듣고  노래를 다시 시작하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사진출처: 남도일보 김종률은 대학가요제에서 수상하는 등 촉망받는 싱어송라이터였다. ‘소나기’ ‘영랑과 강진’ 등 주로 서정적인 노래를 짓고 노래했다. 1979년 4월 ‘전일방송 가요제’에서 ‘소나기’로 대상을 받았고, 8월 ‘MBC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으로 은상을 받았다. 레코드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독집 음반까지 냈다. 그러나 이듬해 광주의 5월을 겪으면서 좌절에 빠졌다. 5·18 기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광주에 있으면서 항쟁을 다 봐왔지 않았습니까? 무섭고, 비겁해서 앞장서지 못하고, 뒤에서 돌이나 던지고 도망 다니기 바빴던 저였지만 너무 충격적인 거예요. 나라를 지키라고 세금으로 운영되는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진압을 하고, 결국 시민들을 죽이기까지 하고…. 이 과정을 보면서 공포와 분노, 소심한 성격에 감히 나서지도 못하는 무서운 마음속에 27일 새벽을 맞이하게 된 거죠. 그 과정을 거치면서 노래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더라고요. (노래는) 총칼 앞에서,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하는 것(음악)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너무 충격적이어서 ‘노래를 하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한 거죠.” 그렇게 상심했을 때 김종률은 박흥숙의 집터에서 김민기로부터 그런 조언을 들었다. 김종률에게 김민기는 ‘밥 딜런’과 함께 세상에 단 둘뿐인 우상이었다. 김민기와 무등산 등산 이후 김종률은 다시 노래로 돌아왔다. 그러나 노래의 색깔은 180도 바뀌어 있었다. 김종률은 이듬해 3월 14일 상무관 옆 남도예술회관에서 두 번째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발표회 다섯 번째 마당의 부제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부쳐’였다. 그는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맨발로 무대에 올라 자작곡 ‘검은 리본 달았지’를 불렀다. 이 작곡 발표회에도 김민기의 손길이 미쳤다. 공연 기획을 맡은 임영희는 김민기에게 연락했고, 김민기는 바로 임영희 자택으로 와 공연 기획을 도왔다. 임영희는 극단 ‘광대’ 출신으로 문화 운동을 통해 광주항쟁을 세상에 알리고, 구속된 이들과 그 가족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이 공연은 5·18민주화운동 이후 5월을 주제로 다룬 최초의 저항 음악회로 기록됐다” (노래 ‘검은 리본 달았지’는) 광주항쟁의 피해자들을 처음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위로했던 노래였다.”(정유하 5·18연구소 연구원) 1981년 김종률이 만든 임을위한 행진곡  원본 악보. 사진출처: 위키백과, 김종률 제공 아무도 5·18을 말할 수 없고, 그 피해자들을 위로할 수 없었을 때, 그 자리에 참석했던 희생자 가족과 부상자, 피해자들은 비로소 가슴에 꾹꾹 눌러둬야 했던 눈물을 쏟아낼 수 있었다. 김종률은 이어 4월 노래극 의 제작에 참여했다. 황석영이 짠 대본에 따르면 창작곡 7곡이 필요했다. 앞의 6곡은 확보됐다. 마지막을 장식할 행진곡풍의 노래가 비어 있었다. 당시 제작진이 가장 고민했던 노래였다. 앞서간 이들이 남은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고, 남은 이들이 앞선 이의 유지를 이어가겠다는 다짐의 노래…. 고민하던 기획팀은 백기완 선생이 광주항쟁을 소재로 쓴 장편 서사시 에서 한 대목을 발견했고, 이것을 다듬어달라고 황석영에게 건넸다. 황석영이 정리한 가사에 멜로디를 입히는 작업은 김종률에게 맡겨졌다. 김종률은 희생자를 생각할 때마다 입안에서 떠돌던 주제 두 마디를 바탕으로 4시간여 만에 노래 한 곡을 완성했다고 한다. 민중의 애국가요, 민주항쟁의 주제가요, 가시밭길 역사의 행진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노래가 완성되자 김종률을 비롯해 전용호, 오정묵, 윤만식, 김선출, 임영희, 임희숙 등 노래꾼들은 광주시 북구 운암동 황석영 작가의 자택에서 1박 2일 만에 노래극 ‘넋풀이’ 카세트테이프 제작을 완료했다. 1982년 2월 박기순의 유해를 망월동 묘지에 있는 윤상원과 합장하면서 거행된 영혼 결혼식에서 김상윤이 제를 올리는 모습.  이 자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공식적으로 불렸다고 한다. 사진출처: 남도일보 ,제공: 윤상원 기념사업회 노래는 그해 여름부터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고 노동 및 학생 운동 현장에서 불리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탄생 과정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열이면 아홉 구전 가요로만 알고 불렀다. 공식적인 행사에 등장한 것은 이듬해 초, 1982년 2월 박기순의 유해를 망월동 묘지의 윤상원 묘에 합장하면서 거행한 두 사람의 영혼 결혼식에서였다. 김민기의 ‘상록수’가 역경에 처한 이들이 어깨를 겯고 서로를 위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행진곡이라면 백기완-황석영-김종률의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앞장서 피투성이로 역경을 헤쳐 나간 이들을 위한 송가이자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의 행진곡이 되었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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