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위기가 사랑의 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칼럼] 오동진 영화평론가
할리우드가 그리는 결혼 이야기는 대체로 오랜 부부의 갈등과 싸움에 대한 것이었다. 배우 겸 감독인 대니 드비토의 연출작 (1989)이 그랬고 (1991) (2000) 그리고 비교적 최근작으로는 노아 바움백이 만든 (2019)가 그랬다. 이들 영화는 지독한 사랑 끝에 결혼한 부부일지라도 일상을 수년 혹은 수십 년 같이해 오면서 결국은 서로를 죽고 죽이(고 싶어 하)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을 (심지어 코믹극이라 해도) 참혹한 심정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두 남녀가 해로하며 산다는 것은 수사(修辭)에 불과하다는 것을, 평화롭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에는 특단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결혼의 지혜란 결국, 적절한 시기에는 ‘합의하여 독립하는 것’이 최고임을 역설한다.
결혼 일주일 앞두고 파투나게 된 젊은 연인들
젠데이아, 로버트 패틴슨이 결혼을 일주일 앞둔 커플로 나오는 신작 영화 는 이른바 Z세대(Gen Z,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 초반 사이에 태어난 세대)의 웨딩스토리다. 이들은 결혼 전에 이미 많은 것들을 결정한다. 일단 결혼은 하고, 서로를 견뎌 보고 하는 식은 통하지 않는다. 카페에서 하퍼 엘리슨의 소설 (영화 속 가상 소설로 작가 하퍼 리나 랄프 앨리슨, 루이 말 감독의 를 합성한 설정으로 보인다)를 보고 있는 엠마(젠데이아)에게 매혹당한 찰리(로버트 패틴슨)가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그것이 어찌어찌 성공하여 1년의 교제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된다는 얘기이다. 이제 결혼식까지 일주일이 남았다. 찰리와 엠마 모두 결혼식 스피치 문안을 짜느라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피로연에서 출 춤 연습에도 매진하고 있고 그때의 선곡과 믹싱을 위해 DJ도 고용했는데 그녀가 어두운 길에서 헤로인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보고서 둘은 여자를 해고할까 말까를 놓고 고민에 빠진다.
찰리에게는 오랜 친구인 마이크(마무두 아티)가 있고 그의 아내인 레이첼(알라나 하임)과도 막역한 사이다. 둘은 찰리-엠마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설 계획이다. 어느 날 이들 넷은 피로연에 나올 음식을 테이스팅 하러 만났다가 술을 많이 마신다. 그리고 ‘지난 인생에서 저지른 가장 최악의 짓’에 대해 고백 타임을 갖는다. 이게 화근이 된다. 당장 레이첼은 엠마의 지난 행동에 대해 비난을 퍼부으며 친구 관계를 거의 끝으로 몰아간다. 문제는 찰리인데, 그는 상당히 집요한 성격이어서 아내가 될 엠마가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우지 못한다.
엠마는 루이지애나에서 살던 15살 때 아빠의 소총을 가지고(아빠는 직업군인이다) 학교로 가 총기 난사를 계획한 적이 있다. 실행하지는 않았다. 총 쏘는 연습을 하긴 했다. 격발의 충격 후유증으로 오른쪽 귀를 먹게 됐다. 엠마의 취중 고백은 모두를 경악시켰고 특히 레이첼은 사촌인 샘(안나 바리시니코프. 맞다 영화 에 나온 러시아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딸이다)이 같은 일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사건을 겪은 참이다. 찰리와 엠마의 결혼식은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는 경로에 들어서게 된다. 게다가 찰리는 결혼식에 대한 중압감을 핑계로 울고 짜고 하다가 부하 직원인 미샤(헤일리 게이츠)와 성적 접촉을 시도해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기까지 한다. 아무튼 이 둘의 결혼은 거의 파투가 난다.
‘정치적 올바름’ 속에 감춘 엘리트 집단의 비뚤어진 자기애
이런 서사는 어쩌면 약간은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혼 전 젊은 남녀의 좌충우돌 해프닝은 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에서 눈이 가는 부분은 찰리와 엠마, 마이크와 레이첼 부부의 직업과 계층, 계급이다. 이들은 모두 보스턴 지역의 대학(명문이 많다)을 나왔거나 보스턴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인텔리들이다. 런던 출신의 찰리는 케임브리지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이고 엠마 역시 대형 출판사의 문학 에디터이다. 레이첼은 중견 마케터다. 이들은 미국 중상류층 엘리트 집단을 대변하며 정치적으로 꽤 올바른 척을 하지만 사실은 얄팍한 도덕성과 그보다 더한 편협함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잘못된 행태보다는 상대의 문제를 이슈화하거나 ‘조리돌림’에 앞장서는 사람들이다. 민주적이고 사회적으로 올바른 척 계층계급의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
레이첼 등은 엠마의 과거 행적(15살 때의 치기 어린 실수임에도)이 결국에는 큰 사회적 범죄로 이어질 것에 대해 우려하고 지적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찰리의 비서인 미샤는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까지 얘기한다. 그들은 큰 사고를 미리 막아야 한다는 구실로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체를 구하려는 자, 대체로 ‘인간’과 ‘인간성’을 훼손시킨다.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세상을 구하려 한다면 먼저 한 개인을 구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개인에게 야박한 인텔리들의 이기주의와 비뚤어진 자기애가 세상을 지금의 몰골로 만들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공동체 붕괴 예고하는 지식인들의 도덕성 붕괴
그런 점에서 는 노아 바움백의 의 결혼 전 버전이라기보다는 이안 감독이 만든 (1997)의 아우라가 더 짙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중상류층의 고귀함 뒤에는 늘 스노비즘(속물주의)이 깔려 있고 기괴한 공허함이 배어 있다. 은 1970년대 중반(1980년대 레이건 시대를 예고하는) 코네티컷의 신흥 부자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어느 날 이 동네에는 유례없는 아이스 스톰(눈폭풍)이 몰아치는 데 이를 기화로 중산층 가족 몇이 한 집에 모여 와인 파티를 연다. 인문학과 철학, 미술과 역사에 대해 고급스러운 얘기가 꽃을 피우는 척 뒷방에서는 이들끼리의 스와핑(파트너 교환) 섹스의 향연이 벌어진다.
스와핑 상대를 고르는 것은 불특정 남자의 차 키를 집는 것이다. 일명 키 파티다. 유부녀인 제이니(시고니 위버)가 이웃 남자 벤(캘빈 클라인)의 차 키를 집어 들 때의 오묘한 표정은 영화 을 잊지 못하게 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이들 중산층 가정이 집단 섹스의 향연을 벌일 때 제이니의 아들 마이키(엘리야 우드)는 집 밖 눈밭에서 고압전선에 감전돼 죽는다. 아이는 죽고 파티에 참여한 중산층 가정들은 박살이 나며 코네티컷의 마을은 붕괴한다. 미국식 신자유주의, 미국이라는 허울뿐인 풍요사회도 분해된다. 대만 감독 이안이 오래전에 한 영화적 예언이다. 신예급인 크리스토페르 보르글리 감독이 만든 이번 신작 역시 지금의 미국 지식인 사회, 특히 Z세대가 위기에 빠져 있으며 정신적으로 붕괴 직전에 놓여 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사랑 속에 깃든 것은 인내와 포용, 그리고 희생
결혼은 미친 짓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미친 짓이 아니다. 결혼을 하는 두 사람이 혼연일체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얘기는 다 만든 얘기다. 자본주의를 지키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가정이 중요하지만, 사랑이 더 중요하다. 거기에는 정치적 편협함보다 관용과 통합이 더 요구된다. 사랑은 인내하는 것이고 상대의 잘못을 포용하며 그로 인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이건 영화 속 찰리의 대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상대에 대해 여백의 일상을 갖게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위선과 위악의 이중성을 떨쳐 내는 것이다.
는 특히 중산층이나 엘리트 집단이 새겨들을 영화이다. 대사량이 많다. 시나리오가 출중했다는 이야기다. 젠데이아나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가 극 전체를 휘어 감는다. 로버트 패틴슨의 ‘질질 짜고 징징대는’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연인이라면 누구나 처할 법한 위기 상황을 너무나 솔직하게 전달해서 영화 도중 살짝 스크린을 외면하고 싶게까지 만든다. 로버트 패틴슨은 밀레니얼세대(1986년생), 젠데이아는 Z세대(1996년생) 나이이다. 영화 는 지난 9월 9일 개봉했다. 18일 현재까지 약 7만 명의 관객을 모으고 있다. 사진출처 : 배급사 워터홀컴퍼니(주)오동진 ohdjin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