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밤, 마지막 글 사무사 신기독 의 묵향 [사람들] 백범일지 친필 원본. 상권(1928~1929년)은 두 아들에게 자신의 삶을 전하려고 썼고, 하권(1941~1942년)은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을 기록했다.
백범의 붓글씨에는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글자는 큼직큼직하고, 획은 방향을 바꿀 때마다 무게를 담고 있습니다. 먹이 스며든 부분과 붓이 지나가며 남긴 빈틈 사이에는 속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멈춤과 흐름을 바람 소리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동학운동에 실패한 스무살 김창수(당시 김구의 이름)가 성리학자 고능선 스승과 망해가는 조선의 앞날에 관해 밤늦도록 문답을 주고받던 시절, 문밖에 흐르던 소나무 바람 소리가 떠오릅니다.
그의 붓글씨 왼쪽에는 날짜와 서명이 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휘호는 받는 사람의 이름과 백범의 나이까지 적은 글씨도 있습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글씨의 뜻이 중심을 이루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글씨를 쓴 사람의 마음과 당시의 정황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김구라는 이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붓글씨를 마주하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광복과 분단, 경교장에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 무게가 붓글씨를 깊게 보게도 하지만, 때로는 글씨를 자세히 살피는 일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굵은 획은 기개라고, 흔들린 부분은 고난이라고 천편일률적으로 해석하면서 하나하나의 붓글씨를 인물평 속에 묻어버릴 수 있습니다.
백범의 붓글씨를 읽으려면 순서가 필요합니다. 먼저 전체적인 글씨를 보고, 그가 선택한 문장의 뜻을 이해하고, 언제 누구에게 준 글이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들어가면 쓴 이의 마음가짐과 자신을 다스리는 태도, 동료와 후손을 대하는 마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생각하는 자세가 드러납니다.
## 1. 글씨를 배우고 삶을 기록하다
백범김구기념관 연보에 따르면 그는 1887년, 열두 살에 서당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교육에서 글을 읽고 붓으로 쓰는 일은 함께 이루어졌으므로, 그의 글씨 공부 역시 이러한 배움 속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붓글씨를 써서 남기기 시작한 시점은 글을 배우기 시작한 훨씬 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 확인된 백범의 친필 유묵은 약 150여 점인데, 1945년 환국 이후 경교장이나 전국 순방 과정에서 써 준 휘호, 현판, 개인 소장품, 서명 등을 모두 합치면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해지는 백범의 유묵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을축년(1925) 새해를 맞아 이은우·최연순 부부에게 선물한 것으로 추정되는 ‘존심양성(存心養性)’입니다.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고 선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의 ‘존심양성’. 전해지는 백범의 붓글씨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말은 『맹자』 「진심」 상편에서 나옵니다. 남을 헤아리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을 보존하며, 그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자신을 닦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눈여겨볼 것은 ‘보존한다’와 ‘닦는다’는 두 동사입니다. 마음은 한 번 바르게 정했다고 해서 계속 그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흔들리고, 이익에 끌리며, 분노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간직하는 데에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백범의 글씨가 어떤 수련과정을 거쳤고 어떤 축적을 거쳤는지를 살피는데 가장 좋은 자료는 『백범일지』 친필 원고입니다. 『백범일지』 상권은 1928년 집필을 시작해 이듬해 마무리되었습니다. 만년필이나 세필로 쓴 친필 원고에는 필자 특유의 긴장이 있습니다. 작은 글씨가 빼곡히 이어지고, 그 조밀한 밀도 속에서 백범은 자신이 겪은 사건과 당시의 생각, 선택의 이유를 자세히 적었습니다. 친필 원고가 특히 중요한 것은 쓰는 이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고백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일지의 기록과 함께 볼 만한 글씨는 자신의 이름을 크게 쓴 ‘金九’라는 붓글씨입니다. 두 글자는 화선지를 가득 채웁니다. 위아래의 넓은 움직임과 짙은 먹의 덩어리 사이에서 이름은 하나의 형상을 얻고 있습니다. 왼쪽에 작게 쓴 연도 ‘대한민국 29년 원단(元旦)’과 정중하게 찍은 낙관은 ‘金九’라고 쓴 형상을 구체적인 시간 속으로 안내합니다. ‘대한민국 29년 원단’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을 원년으로 헤아린 1947년의 새해 첫날을 뜻합니다. 광복의 기쁨은 컸으나 남과 북에는 서로 다른 군정이 들어서 있었고, 통일된 자주국가를 세우는 일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과제일 때였습니다.
백범에게 1947년의 새해는 되찾은 나라의 앞날을 기대하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때에 크게 써 내려간 ‘金九’라는 두 글자는 자신의 이름 앞에서 자주의 뜻을 새롭게 다지는 행위로 읽힙니다. 자신의 이름을 쓴다는 것은 평범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써서 다른 사람 앞에 내놓을 때에는 책임감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 2. 고전의 문장을 삶에서 실천했는가
백범의 유묵에는 고전에서 가져온 짧은 문장이 자주 등장합니다. ‘존심양성’을 비롯해 ‘지행합일’, ‘사무사’, ‘신기독’ 같은 글씨가 그렇습니다. 익숙한 경구들이지만, 그것을 선택해 쓰고, 타인에게 건네는 순간에는 새로운 맥락이 생깁니다. 백범의 글씨를 보면 마음을 지키는 일과 현실에서 행동하는 일이 자주 만납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앎과 실천이 하나여야 한다는 양명학의 명제입니다. 안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옳은 말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간격이 메워지지는 않습니다. 이 네 글자는 앎이 생활과 선택에서 어떤 모습을 얻었는지 묻고 있습니다.
백범의 생애가 이 말의 온전한 구현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정치가의 판단과 행동은 개별 사건의 조건과 결과 속에서 검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 문장을 써서 남겼다는 사실은, 자신과 타인에게 어떤 기준을 요구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유묵은 쓴 사람의 사유를 이해하는 자료가 될 것입니다.
글씨의 형태도 이 독해에 참여합니다. 획은 종이 위에서 실제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집니다. 붓을 대고, 누르고, 옮기고, 거두는 일이 있어야 한 글자가 완성됩니다. ‘지행합일’을 쓴다는 행위에는 생각한 것을 손의 움직임으로 수행하는 작은 일치가 있습니다. 이 작품 앞에서 생기는 질문은 ‘그렇게 조화로운 일치가 얼마나 일상의 행동까지 이어졌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 3. 글을 주고 받으며 사상을 공유한다
1947년 백범이 심산 김창숙에게 써준 ‘일송오강’(日誦五綱)은 그의 서예를 이해하는 범위를 넓혀줍니다. 한 사람의 좌우명을 통해 사상의 전승과 동지 사이 우정의 교류가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爲天地立心 (위천지립심):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운다.
爲父母立身 (위부모립신): 부모를 위해 몸을 세운다.
爲吾生立道 (위오생입도): 나를 위해 도를 세운다.
爲斯民立極 (위사민입극): 이 백성을 위해 표준을 세운다.
爲萬世立範 (위만세입범): 후세를 위해 규범을 세운다.
이 글의 출전은 송나라의 유학자 장재(張載)의 ‘횡거사구’(橫渠四句)입니다. 장재의 호 ‘횡거’(橫渠)를 따서 횡거사구라고 부릅니다. 유학자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삶의 목적과 정신을 네 문장으로 요약한 유학의 명문장입니다. 이를 구한말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경북 성주 출신의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선생이 유교적 실천 정신에 맞게 재해석해 매일 외우는 다섯 가지 강령인 ‘일송오강’으로 만들었습니다.
백범이 심산 김창숙에게 써준 ‘일송오강’. 송나라 장횡거의 글을 바탕으로 심산의 스승 이승희가 매일 외우는 다섯 가지 강령으로 만들었다. 서예가 하석 박원규는 한학이 체질화된 사람이 가학(家學)으로 쓴 것으로, 백범의 인품이 가장 잘 드러나는 글씨”라고 말했다.
이 ‘일송오강’이 대계의 제자인 심산 김창숙에게 이어졌으며, 사진에서 보는 이 작품은 백범이 심산에게 붓글씨로 써서 선물한 것입니다. 다섯 문장에서 거듭되는 글자는 ‘설 립(立)’입니다. 마음과 몸, 도와 표준과 규범을 세운다. 각 항목은 개인이 서야 할 자리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그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를 넓힙니다. 부모에게서 시작된 책임이 자신의 삶을 거쳐 백성과 후세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혼자 완성할 수 없습니다. 몸을 세우는 일에는 부모가 있고, 표준을 세우는 일에는 백성이 있으며, 규범을 세우는 일에는 아직 만나지 못한 후세가 있습니다. 자기 수양은 관계 안에서 시험받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송오강’을 동지에게 써주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글을 주고받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공유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는 뜻입니다.
백범의 붓글씨 여러 점을 감상한 서예가 하석(何石) 박원규는 백범 선생의 서예는 가학(家學)으로 이룬 것으로 자유롭게 쓴 특징을 보여주는데, 이 ‘일송오강’이 가장 깨끗하고 바른 마음가짐을 보여준다”고 평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감상자들은 백범과 심산의 글 교류에 참여해 마음과 몸을 함께 세우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고전의 생명은 그러한 재해석과 마음의 수양에 있을 것입니다.
1946년 8월 7일 어머니와 함께 찾아온 열일곱 살 한순옥에게 준 김구의 사진과 글씨는 백범의 특별한 면모가 드러납니다. 백범은 자신의 사진 위에 ‘한순옥 세손에게 주노라’는 글을 써주었습니다. 한순옥은 독립운동가 한도원과 홍성실의 딸입니다. 한도원은 김구의 비밀 운동원이었습니다.
김구는 1930년 한도원의 집에서 권총을 다루다 오발 사고를 낸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순옥은 태아였습니다. 김구는 총성에 놀란 임신부와 태중의 아이에게 탈이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오랜 세월 뒤 아이가 자라 찾아오자 옛일을 돌아보는 마음을 사진에 적었습니다. 이 자료의 무게는 이야기의 극적인 성격보다 기억의 구체성에 있습니다. 동지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던 시절, 동지의 아내와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걱정하던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 4. 광복은 됐으나 손을 떨며 쓴다
‘광복조국(光復祖國)’은 백범의 정치적 생애를 가장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글귀입니다. 네 글자는 각기 넓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멀리서도 읽히는 크기와 무게가 문장의 공적인 성격을 뒷받침합니다. 글씨에는 ‘대한민국 29년 8월 15일’이라는 연도와 ‘칠십이세 반탁옹(反託翁) 백범 김구’라는 표현이 보입니다. 1947년 광복절에 쓴 작품인데, 광복 이후에도 ‘광복조국’을 쓰고 그 옆에 ‘반탁옹’이라고 낙관했다는 사실은 식민 통치의 종식과 자주적인 국가를 세우는 과제가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알려줍니다.
3·1운동 29주년을 기념해 송재준에게 써 준 ‘광복조국’.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염원하는 뜻을 담았다.
이순신의 시에서 가져온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에서는 맹세의 규모가 더욱 크게 펼쳐집니다.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준다’는 뜻은 인간의 다짐을 자연 전체가 화답하는 것으로 확산시킵니다. 백범은 이 글을 쓰면서 이순신의 뜻을 이어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선대 인물의 문장은 후대에 자세를 가다듬을 형식을 제공합니다. 그 구절을 쓰는 것은 그 뜻을 지금의 상황에서 감당하겠다는 의사 표시로 읽힙니다.
백범의 글씨를 살펴보면 획이 미세하게 떨리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그는 1938년 중국 장사(長沙·창사)에서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총알을 제거하지 않아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몸속에 그대로 두었으며, 이후 총알이 신체 내에서 움직이는 후유증으로 수전증을 앓았습니다. 그 손떨림이 글씨에도 남아 있어 그의 붓글씨를 ‘떨림체’, 또는 ‘총알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백범은 손이 떨리는 가운데서도 붓을 잡고 자신의 뜻을 적어 사람들에게 건넸습니다. 종이에 남은 떨림은 그가 겪은 상처와, 그 불편을 안고도 글씨를 써온 삶의 흔적입니다.
## 5 시를 통한 성찰, ‘그 발자국이 옳았는가’
1948년 남북회담을 위해 평양을 다녀온 후인 10월 26일에 쓴 ‘답설(踏雪)시’는 앞서 본 작품들의 문제를 행동의 책임으로 모은 결정적인 작품입니다. 시의 내용은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발걸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기는 자취가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조선 후기 문인 이양연(李亮淵)의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에 실린 「야설(野雪)」에서 비롯되었으며, 백범의 글씨에는 원문과 일부 다른 글자가 쓰였습니다.
1948년 10월 26일 쓴 답설시. 자신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길잡이가 되므로 함부로 걷지 말라는 내용.
이 시의 무게는 자신이 걷는 방향뿐 아니라 그 길을 따르게 될 사람에게 옮겨집니다. 눈 위에서는 걸음걸이가 드러납니다. 이미 지나온 방향과 잠시 머뭇거린 자리까지 흔적이 됩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갔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뒤따르는 사람에게 어떤 길을 남길 것인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지도자의 행동에는 이러한 문제가 늘 따라옵니다. 결정은 당장의 목적을 향하지만, 그 결정의 방식은 이후에도 남습니다. 무엇을 허용했고 무엇을 거부했는지, 어떤 수단을 썼는지가 다음 판단의 선례가 됩니다. 이 시가 오랫동안 회자하는 까닭은 바로 이 점을 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백범의 생애에 비추어 읽을 때도 이 질문은 유용할 것입니다. 그가 남긴 모든 발자국이 옳았다고 결론 내리는 순간, 시가 요구하는 성찰은 거기서 멈춥니다. 그가 선택한 문장을 통해 그의 행적을 다시 살피고, 그 문장을 읽는 우리의 행동을 돌아보는 것이 이 작품에 충실한 감상일 것입니다. 여기서 백범의 붓글씨를 관통하는 하나의 줄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일은 공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고, 공적인 뜻을 내세우는 사람은 다시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살펴야 합니다. 이런 순환은 그의 마지막 유묵에서도 계속됩니다.
## 6 마지막 밤
1949년 6월 25일 밤,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투사 김승학과 백범의 제자인 대광중 교감 박동엽이 경교장으로 백범을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을 암살하려 한다는 얘기가 시중에 가득 퍼져 있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박 교감이 걱정했습니다. 곁에 있던 김승학도 말을 보탰습니다.
헛소문이 아닙니다. 총독부 앞잡이들이 경교장 근처까지 얼쩡거리는 모습이 여러 번 눈에 띄었습니다. 여기도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김구는 그들의 말을 듣고 껄껄 웃었습니다.
나를 죽인들 민족의 앞길은 막을 수 없소. 내 목숨쯤이야 오래전부터 조국에 바친 것이니, 오로지 통일을 향해 갈 뿐이오.”
거듭 몸조심을 당부하던 이들이 돌아갔습니다. 백범은 붓을 들고 글을 썼습니다. 이날 밤 쓴 글은 ‘사무사’(思無邪)와 ‘신기독’(愼其獨)’입니다.
사무사. 생각에 그릇됨이 없다는 뜻입니다. 공자는 옛 시를 모은 『시경』의 정신을 이 세 글자로 요약했습니다. 이후 ‘사무사’는 자신의 마음이 바른지 돌아보게 하는 경구로 읽혀왔습니다. 뜻은 지켜야 할 기준을 눈앞에 두고 자신을 살피라고 것입니다. 분노와 두려움, 억울함과 조바심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 감정이 판단을 흐리지는 않는지, 옳다고 믿는 뜻에 사사로운 욕심이 섞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이 가르침은 먼저 자신에게 향해야 합니다.
신기독. 홀로 있을 때도 스스로 삼가라는 뜻입니다. 『대학』과 『중용』에서 강조하는 신독의 가르침은 남이 보지 않는 행동과 자신만이 아는 마음까지 살피도록 요구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명분과 사정을 들어 행동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홀로 있을 때도 그 설명이 진실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잘못을 모르는 척하지 않는 것, 신기독은 그 엄격함을 요구합니다.
백범은 오랜 세월 사람을 만나고 뜻을 모으며 살아왔습니다. 그 과정에는 결단과 성취가 있었고, 상실과 좌절도 있었습니다. 이 글씨를 쓰면서 어떤 일을 떠올렸는지, 누구의 이름 앞에서 마음이 멈추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두 문장이 요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두 작품의 오른쪽에는 글을 받을 사람의 이름과 기념으로 간직해 달라는 뜻의 ‘존념(存念)’이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사무사」에 쓴 이름은 ‘정세석군(鄭世錫君)’, 「신기독」에 쓴 이름은 남인석 송운군(南仁錫 松雲君)’으로 읽히는데,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왼쪽에는 두 작품 모두 ‘대한민국 삼십일년(1949년) 유월, 한양성 서쪽 경교장’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칠십사세(한국 나이) 김구 백범’이라는 서명을 남겼습니다. 서명 아래에는 두 과의 낙관인이 찍혀 있는데, 위쪽은 김구의 이름을 새긴 성명인, 아래쪽은 백범이라는 호를 새긴 아호인입니다.
1949년 6월 25일 밤에 쓴 ‘신기독’.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라’는 뜻.
백범이 이 말들을 홀로 곱씹은 그 밤을 떠올려봅니다. 세상의 어둠은 그의 곁까지 밀려왔고, 백범은 붓을 들어 자신이 지킬 말을 적었습니다. ‘홀로 있을 때도 스스로 삼간다.’ 글귀를 쓰고 읽는 순간, 그 말은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기준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위험이 몰려온다고 제자들이 찾아와 알려줬음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던 그 시간,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고 써 내려간 글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삶을 지키려는 다짐으로 읽힙니다. 그 밤에 피어오르던 묵향(墨香)은 위협 속에서도 자신을 가다듬고 타인에게 뜻을 전하려던 사람의 담백한 의지였을 것입니다.
이튿날인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경교장 2층 창가에 놓인 책상 앞에서 안두희의 총격으로 숨졌습니다. ‘사무사’와 ‘신기독’은 당시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가장자리에 혈흔이 남은 두 작품은 역사적·상징적 가치를 보여줍니다. 두 작품은 2009년 문화재로 등록되었습니다.
이들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혈흔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됩니다. 먹과 혈흔은 같은 종이를 적셨으나 생겨난 시간과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먹은 백범이 지키려 한 삶의 원칙을, 혈흔은 그 삶을 끊은 폭력을 증언합니다. 자신을 삼가라는 글과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흔적이 한 종이에 남아, 그가 세우려 했던 인간의 도리와 그것을 무너뜨린 현실을 함께 보여줍니다.
백범은 붓글씨로 마음을 지키고, 아는 것을 실천하며, 뒷사람에게 남길 길을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유묵인 ‘사무사’와 ‘신기독’은 그 모든 것의 출발이 자신을 살피는 데 있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생각에 그릇됨은 없는지, 남이 보지 않는 자리에서도 바르게 행동하는지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밤의 묵향은 자신을 돌아보는 고요함 속에서 피어오릅니다.
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