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은 사회가 함께 책임 져야 할 일 [뉴스] 그의 고향인 전남 화순의 시골마을은 규모도 작았고 주민들은 서로의 집안 사정을 대개 알고 있었다. 누가 어느 집 아들이고, 부모가 무슨 일을 하는지 숨기기 어려운 동네였다. 그는 그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랐다. 그는 제법 똑똑한 아이였다. 공부도 잘했고 눈치도 빨랐으며, 학교에서는 줄곧 반장을 도맡아 했다. 물론 학교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평범한 농촌 소년이 가질 수 있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미래가 흔들린 건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사건은 너무도 사소하게 시작됐다. 어느 날 친구 아버지가 술기운에 툭 던진 말이었다. 너도 생모 한번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
술주정처럼 지나갈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그 말이 이상하게 뇌리에 남았어요.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물었는데, 아니라고 완강히 부인하더군요. 그때는 부모님 말을 믿고 싶은 마음과 부정하는 마음이 혼란스럽게 교차하던 상황이었죠. 그런데 너무 강하게 아니라고 하니까 오히려 이상했어요. 그때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부모님은 계속 부인했지만, 결국 입양된 사실을 알게 됐어요.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이었습니다. 단지 출생의 비밀을 안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살아온 시간 모두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 부모님만 유난히 나이가 많았을까. 왜 다른 집과 조금 달랐을까. 그동안 스쳐 지나간 기억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돌아오기 시작한 겁니다.”
당시 입양 문화는 지금과 확연히 달랐다.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 농촌 사회에서 입양은 가족 내부의 비밀에 가까웠다. 아이에게 알리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혈연 중심 문화가 강했고, 입양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부모들이 부담스러워하던 시절이었다. 한 개인의 정체성보다 ‘아이가 알게 되면 부모 곁을 떠나지 않을까’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대였다. 하지만 작은 시골마을에서 입양은 절대 비밀이 될 수 없었다. 입양기관이 아닌 사적 입양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렸던 ‘국내입양인 연대’ 민영창(54) 대표의 이야기이다.
프레스공장에서 사고를 당하기 전 10대 후반의 민영창 대표
입양사실을 알게 된 후 공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어요. 교과서를 펼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죠. 성적보다 더 큰 질문 ‘나는 누구인가’가 머릿속을 채웠던 겁니다. 그리고 빨리 독립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살아야 한다고. 어쩌면 그 결심은 그 나이의 상처가 만든 생존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순천의 직업훈련소로 향했습니다. 1년의 훈련을 마친 뒤 김포의 작은 공장에 취업이 됐어요. 이후 두 군데를 더 옮겨 다녔습니다. 아직 10대였죠. 프레스 기계는 쉬지 않고 철판을 찍어냈고, 기계가 내려올 때마다 묵직한 충격음이 공장 전체를 울립니다. 당시 제조업 현장의 안전 의식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안전장치와 규정은 지금보다 훨씬 부족했고, 생산 속도는 사람의 안전보다 우선했습니다. 어린 노동자들도 있었는데, 살기 위해 그 속에서 3~4년을 버텼던 것 같아요.”
그리고 1990년. 두 번째 사건이 찾아왔다. 그 순간은 매우 짧았다. 프레스 작업 중, 기계가 내려와 오른 손목이 눌렸다. 공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사람들이 뛰어왔고 기계는 멈췄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결국 오른 손목을 절단해야 했다. 열아홉 살. 다른 이들은 아직 사회를 배우기 이전 나이였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잃었다.
누구나 어릴 때는 어른을 믿는다. 부모가 하는 말은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은 적어도 아이를 지켜줄 것이라 믿는다. 그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의 삶에는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끝에는 어른들이 있었다. 성인이 된 뒤에야 그는 자신의 출생과 입양 과정을 조금 더 알게 됐다.
그 시절에는 ‘매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의 결혼정보회사 개념과는 달랐다. 중매결혼을 연결하기도 했고, 때로는 양자 입양을 이어주기도 했다. 그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가정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마음에 남았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왜 아무도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질문이었다. 아이를 위해서였다고, 상처받지 않게 하려 했다고 어른들은 말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배제됐다는 사실을 더 크게 기억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두 번째 사건이 찾아왔다. 몸을 잃은 충격도 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더 아프게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사고 이후 주변 어른들의 태도였다. 당시 산업현장에서는 산재 사고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사고가 기록으로 남으면 회사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고, 책임 문제도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고들이 조용히 처리되기도 했다. 그는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봤다.
사고를 당한 것은 자신인데 정작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보다 책임 회피가 우선이었다. 누군가는 문제를 덮으려 했고, 누군가는 불편한 이야기를 피하려 했다. 어른들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아이를 보호한다며 진실을 숨긴 어른들. 책임을 피하려 현실을 덮으려 했던 어른들. 모습은 달랐지만 그에게 남은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훗날 그는 두 사건을 따로 기억하지 않았다.
입양과 사고. 전혀 다른 사건 같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10대의 그는 그렇게 두 번 무너졌다. 처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흔들렸고, 두 번째는 세상이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뒤로 그는 조금 일찍 어른이 됐다. 어떤 상처는 몸에 남고, 어떤 상처는 사람에 대한 신뢰로 남는다. 중학교 시절 입양 사실을 알게 됐던 날이 자신의 존재를 흔들었다면, 열아홉의 공장 사고는 자신의 미래를 흔들어 놓았다.
10대에 두 번 무너진 것이다. 한 번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또 한 번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잃었을 때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의 인생은 무너진 자리에서 끝나지 않고 그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의 인생도 그랬다.
스무 살을 넘기면서 그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열아홉에 오른 손목을 잃은 뒤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몸의 상처보다 더 깊었던 것은 마음속 질문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약간의 방황을 거친 후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싶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보려 했다. 몸에 무리가 적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책상 앞에 다시 앉으면서 마음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한 번 포기했던 공부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중학교 시절 입양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놓아버렸던 공부였다. 사고로 멈춘 인생을 다시 이어 붙일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공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로를 바꿔 대학 입시에 도전하기 위해 먼저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그리고 수능시험을 치렀다.
한때 학교를 떠났던 사람이 다시 교과서를 펼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공부하는 방법부터 잊어버린 상태였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기 어려웠다. 학원비와 등록금,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공부하면서 동시에 일을 시작했다. 새벽에는 우유를 돌렸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거리에서 차가운 우유 상자를 들고 골목을 다녔다. 우유 배달이 끝나면 신문을 돌리기도 했다. 잠든 도시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 그는 이미 하루 일과 하나를 끝낸 상태였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그 시간을 이렇게 떠올렸다.
입양관련 세미나에서 토론 중인 국내외 입양인과 입양부모들
살기 위해 공부한 것 같아요. 하루 세 시간도 못 자는 날이 많았습니다. 새벽 노동과 공부가 반복됐어요. 몸은 늘 피곤했고 눈꺼풀은 무거웠습니다. 잠시 눈을 붙이려다 책상 위에서 그대로 잠든 날도 있었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10대 시절 너무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이제 처음 제 힘으로 무언가를 얻고 싶었어요. 결국 대학 입시에 합격했습니다. 서울의 야간대학교 컴퓨터공학과입니다. 공장 기계 앞에 서 있던 청년이 이번에는 컴퓨터 앞에 앉게 된 것이죠. 그러나 대학 생활도 힘들었어요. 등록금은 계속 필요했고 생활비도 해결해야죠.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여전히 함께 했습니다. 저에게 대학생활은 생존투쟁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졸업 후 은행 전산실에 입사했다. 누군가 도움을 준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길을 만들어준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만든 결과였다. 그가 얻은 것은 단순히 직장 하나가 아니었다. 열아홉 살 오른손과 함께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미래를 되찾은 일이었다. 새벽 세 시. 누군가는 깊이 잠들어 있던 시간. 그는 우유와 신문을 들고 골목을 걸었다. 그리고 그 골목 끝에서, 한 청년은 조금씩 자신의 인생을 다시 쓰고 있었다.
2019년, 그는 ‘국내입양인 연대’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처음부터 거창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큰 선언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입고 살아가는 상처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작은 결심이었다. 시작은 훨씬 조용했다. 혼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서로를 찾기 시작한 일이었다.
그보다 앞서 그는 해외입양인을 돕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해외로 입양된 사람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돌아오는 과정을 지켜봤다. 가족을 찾고, 기록을 뒤지고, 자신의 출생을 확인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을 보면서 그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멀리 떠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국내에 남아 있던 입양인들 역시 비슷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계기는 2018년 어느 입양 관련 세미나에서 찾아왔다. 그곳에서 한 입양부모의 권유를 받았다.
국내 입양인들도 서로 만나야 하는 것 아니냐.”
사실 그때까지도 그는 조심스러웠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공개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혹시라도 부모님이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입양을 숨기며 살아왔던 세대의 부모들에게 그것은 여전히 민감한 문제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난 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있던 질문을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조모임 하나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고, 어떤 이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울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람들이 모였다. 지금은 20대부터 70대까지 회원이 약 30명이다.
함께 모이면 서로 다른 시대가 한 방에 있는 느낌이다. 현재의 20대는 공개입양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자신의 입양 사실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알고 성장한 세대다. 하지만 30대 후반 이후부터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대부분 비밀입양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이다. 너무 늦게 자기 삶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이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혹은 사회적 시선 때문이라는 이유로, 가장 중요한 사실이 감춰졌던 세대다. 그 상처는 생각보다 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50대 초반에 자신의 입양사실을 알게 된 회원인데, 당시 치매를 앓던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말을 꺼냈다고 합니다. 평생 숨겨왔던 비밀이었겠죠. 병이 기억을 지워버리면서 오히려 새로운 비밀이 흘러나온 셈이죠. 그날 이후 무척 혼란스러운 삶이 이어졌다고 하더군요. 수십 년간 믿어온 자신의 이야기가 갑자기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 겁니다. 일흔이 넘은 노인의 사례도 있어요. 그는 서른이 넘어서야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겁니다. 충격이 심해 우울증 약을 복용해야 할 정도였답니다. 평생 고민하며 살아야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자조모임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게 참 행복하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자조모임으로 함께한 국내입양인 연대 회원들.
민영창 대표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0대에는 살아남기 위해 세상과 싸웠고, 20대에는 다시 공부하기 위해 싸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싸움의 방향이 바뀌었다.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다. 단체를 만들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그는 점점 한 가지 사실을 더 분명하게 느끼게 됐다. 개인의 상처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며, 입양인의 혼란과 고통은 단지 각자의 사연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오랫동안 유지된 구조와 제도가 있었다. 과거 한국의 입양 시스템은 대부분 민간기관 중심으로 운영됐다. 기관들이 입양 절차를 진행하고, 아이를 연결하고, 기록을 관리했다. 그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여러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기록이 충분히 남지 않거나 조작된 경우도 있었다. 입양 당사자가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사실을 찾으려 할 때 벽에 부딪히는 일도 반복됐다. 입양이 지나치게 이익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그는 입양인들의 삶을 보면서 생각했다. 입양은 누군가의 선의에만 맡겨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아이의 삶과 정체성이 걸린 문제라면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 그는 여러 단체들과 함께 목소리를 냈다. 관련 활동가들이 함께 움직였다. 한 사람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서로 연결되면서 조금씩 힘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 민영창 대표가 바라본 입양제도는 차갑고 불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의 시선은 입양이라는 행위 자체보다 그 제도가 지나온 역사와 구조를 향해 있었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입양은 국가보다 민간기관 중심으로 운영돼 왔고,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종종 뒤로 밀려났다. 입양인들이 겪은 정체성의 혼란, 가족과의 단절, 절차 속에서 생긴 상처들은 그에게 입양제도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이유였다. 초기의 그는 입양 확대보다 제도의 문제를 먼저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생각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변화는 논리나 정책 문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시작됐다. 그는 수많은 입양인들을 만났다.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 입양으로 인해 아픔을 경험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족 안에서 삶을 이어온 사람들, 서로 다른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입양부모들도 만났다.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긴 시간을 기다리고, 양육의 어려움과 책임을 함께 감당하는 이들의 모습도 접하게 됐다.
그 만남들은 단순히 ‘입양이 좋다’ 혹은 ‘입양은 나쁘다’는 식의 이분법을 무너뜨렸다. 입양은 선하거나 악한 제도가 아니라, 어떻게 운영되는가에 따라 누군가의 삶을 지키기도 하고 상처 입히기도 하는 제도라는 사실을 보게 된 것이다. 결정적인 변화는 시설에서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찾아왔다. 고아원 등의 보호시설에서 성장한 피해 경험자들의 증언은 그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고아원의 아이들이 겪는 고립, 폭력, 방치의 현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아이들이 모두 시설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 흔들렸다.
그때부터 그의 질문은 달라졌다. ‘어떻게 입양을 없앨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입양이어야 하는가’로 바뀌었다. 그가 도달한 답은 공적 입양제도였다. 입양기관이나 민간 영역에 의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가가 입양의 전 과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입양 전 상담과 심사, 매칭 과정, 사후관리까지 국가가 직접 관여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입양은 개인의 선의나 민간의 역할에만 맡겨둘 문제가 아니라, 아동의 권리를 중심에 둔 공공의 책임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때 입양제도에 비판적이었던 시선은 그렇게 제도의 폐지가 아닌 제도의 재구성으로 향했다. 반대에서 찬성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를 중심에 두는 더 엄격한 조건과 더 강한 국가 책임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그의 생각이 옮겨간 것이었다. 사람들의 삶이 그의 생각을 바꿨고, 그 변화는 결국 입양이 필요하냐는 질문보다 사회가 어떻게 아이들을 책임질 것인가라는 더 큰 질문으로 이어졌다.
공적입양체계 도입 후 함께 한 남인순 의원과 입양관련단체 회원들
그렇게 오랜 시간 이어진 질문이 결국 제도 변화로 이어졌다. 입양 절차를 국가가 책임지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현재는 국가기관인 ‘아동권리보장원’을 중심으로 입양 절차가 진행되는 체계가 마련됐다. 민간 중심이었던 구조를 국가 책임 체계로 전환하려는 변화였다. 또 하나의 변화도 있었다. 해외입양 중단을 향한 흐름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해외입양을 가장 많이 보낸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경제 성장의 이면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보내졌다. 그 과정에서 가족과 언어, 뿌리와 단절되는 문제들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입양인들과 관련 단체들은 오래전부터 질문해왔다. 정말 아이를 보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는지, 아이들이 자신이 태어난 사회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수는 없었는지, 그런 질문들이 조금씩 사회를 움직인 것이다.
민영창 대표의 개인 이야기는 입양사실을 알게 된 청소년기의 혼란스런 상황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더 길고 복잡한 이야기는 성인이 된 이후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입양 과정을 좀 더 소상히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조각처럼 흩어져 있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이어졌다. 생모는 광주의 여러 식당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으며, 두 살 위 누나와 어린 민영창 두 남매를 경로당 같은 곳에 맡겨가며 혼자 키우고 있었다.
생모는 아이 둘을 홀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버거웠을 겁니다. 그 시절은 지금보다 더 가난했고, 미혼모나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게 사회적 시선 역시 훨씬 냉혹했잖아요. 당시 매파를 통해 처음 들어온 제안은 남매를 함께 입양하는 것이었답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는 않았죠. 두 살 위 누나는 어느 정도 자아가 형성된 상태였고, 아이가 과거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걱정이 컸다고 합니다. 결국 생후 12개월 무렵, 부모님은 저만 입양하게 됐죠. 제가 초등학교 2~3학년 무렵에 생모가 저를 만나러 학교 운동회 때 찾아온 적도 있다고 하더군요. 모친께서 당장 돌아가라고 호통을 쳤답니다. 가끔 ‘두 살 위인 누나까지 함께 입양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짧은 질문이지만 그 안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들어 있다. 함께 자랐다면 어땠을까. 답은 없지만, 인생에는 확인할 수 없는 가정들이 있다. 그저 마음 속에 오래 남아 있을 뿐이다. 성인이 된 뒤 그는 자신의 생모를 찾으려 했다. 누군가를 원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돈이나 책임을 요구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알고 싶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왜 그런 선택이 이루어졌는지. 그것은 입양인 당사자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주변 반응은 달랐다. 가까운 사람들과 친척들은 만류하면서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괜히 찾지 말라.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데 왜 굳이 꺼내려 하느냐.” 한편, 매파라는 사람도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생모가 일했다는 식당 주변을 수소문했지만, 그는 결국 생모뿐만 아니라 생모를 아는 사람조차 만나지 못했다. 대신 DNA 등록을 해놓은 채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하지만 기다림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몇 년 전에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했어요. 국내입양인으로 살아오며 겪었던 정체성 혼란을 이야기했습니다. 입양된 사실과, 내가 누구인지 묻고 싶은 마음, 뿌리를 찾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은 혼란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는데,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 같은 류의 댓글이 너무 많았던 겁니다. 제가 키워준 부모를 배신하는 사람 같은 느낌의 댓글을 남기더군요. 하지만 감사와 혼란은 서로 반대되는 감정이 아닙니다.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과 그 분들을 존경하는 마음은 항상 있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 건 또 다른 문제잖아요.”
그는 늘 이상하다고 느꼈다. 해외입양인이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미안해 한다. 국가와 사회가 그들을 너무 멀리 보냈다는 감정이 작동한다. 하지만 국내입양인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 반응은 달라진다.
감사할 줄 알아야지. 잘 키워줬으면 된 거 아니냐.”
마치 정체성을 찾고 싶다는 말이 곧 부모를 부정하는 행동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순간들이다. 그러나 민영창 대표는 그것이 전혀 다른 문제이며, 국내외 입양인을 가릴 것 없이 두 감정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받은 기억과 혼란, 감사와 상실감, 행복했던 시간과 설명할 수 없는 공백. 그것들은 서로 대립되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뿌리 찾기를 TV드라마나 영화처럼 상상한다. 막장드라마의 모습이나, 극적으로 만나 눈물을 흘리거나, 숨겨진 사연이 밝혀지거나, 잃어버린 가족이 다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로 결론지으려 한다.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생모나 생부는 여전히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경우가 많다. 가난 속에 살아가기도 하고, 오랜 세월 상처를 안고 살아온 사람들도 있다. 입양인들의 뿌리 찾기는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책임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를 닮았는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것은 비난받아야 할 질문이 아니며, 입양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비난보다 이해, 의심보다 위로, 판단보다 격려. 누군가 자신의 삶의 시작을 알고 싶어 하는 일은,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마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이득신 작가 dsshine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