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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고속도 깔았지만 헌법 걷어찬 독재자 박정희

고속도 깔았지만 헌법 걷어찬 독재자 박정희
[뉴스]
박정희(1917~1979)는 경북 선산의 가난한 농가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문경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만주로 건너가 군관학교에 지원했다. 당시 신문은 혈서까지 썼다고 전한다. 이름도 다카키 마사오로 바꾸었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만주군 장교가 되었다. 해방 뒤에는 국군장교로 살았으나 남로당 연루로 사형위기에 몰렸다가 수사에 협조한 끝에 살아남았다. 일제 말에는 일본왕에게, 해방직후에는 좌익조직에, 훗날에는 반공에 충성했으니 충성의 대상은 바뀌어도 충성하는 자세만큼은 한결같았다. 훗날 독재자가 될 사람은 일찌감치 윗사람 모시는 법 부터 몸에 익혔던 셈이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 시절 박정희의 졸업 사진(위키피디아) 한강을 건넌 새벽 1961년 5월 16일 새벽, 소장 박정희는 병력 3600여 명을 이끌고 한강을 건넜다. 장면(1899~1966) 내각은 별 저항 없이 무너졌다. 군사정변세력은 곧 민간에 정권을 넘기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곧 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동갑내기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가 민정 이양을 재촉하자 박정희는 군복을 양복으로 갈아입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 윤보선(1897~1990)을 15만 표 남짓 차이로 눌렀다. 군복을 벗는 데는 2년이 걸렸는데, 대통령 자리를 내려놓는 데는 16년이 걸렸고 그마저 본인 뜻이 아니었다.   5.16쿠데타 발생 4일 후인 5월 20일 촬영된 군사혁명위원회 지도부의 모습: 장도영 의장(왼쪽)과 박정희 부의장(오른쪽)(위키피디아) 가난을 벗긴 손, 입을 막은 손 독재자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밀어붙였고 경부고속도로를 뚫었다. 1964년 서독을 찾아서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1897~1977) 총리 앞에서 광부와 간호사들과 함께 눈물을 쏟았다. 1965년에는 국민의 반대를 계엄령으로 누르며 일본과 국교를 맺었고, 베트남에는 연인원 32만 명의 젊은이들을 총알받이로 보냈다.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고, 1인당 국민소득은 대략 80달러대에서 1600달러대로 뛰었다. 이 성적표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다만 성적표 뒷면에는 사람이 있었다. 전태일(1948~1970)은 1970년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제 몸에 불을 붙였다. 고속도로는 길었으나 노동시간은 더 길었다. 시인 김지하(1941~2022)는 재벌과 고관을 도둑에 빗댄 「오적」으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풍자가 범죄이던 시대였으니, 이 글을 내가 그 시절 독재자 박정희 정권 때 썼다면 나는 이미 남산 중앙정보부 고문실로 끌려가 중정요원들에게 둘러싸여 몽둥이로 매 타작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청계천8가에 있는 전태일 동상(위키피디아) 독재자가 만든 99.9%의 나라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윤석열 보다 훨씬 전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으며 헌법의 효력을 멈추게 했다. 이른바 ‘10월유신’이다. 스스로 법 위에 올라선 독재자의 길이 공식으로 열린 날이다. 그해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투표에서 2359표 중 2357표를 얻었다. 나머지는 2표는 반대가 아니라 무효였다. 1978년에는 2578표 중 2577표를 얻었고 무효는 1표로 줄었으니, 나름의 발전 이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사실상 정하는 유신정우회까지 두었고, 긴급조치 9호는 헌법을 비판하는 말조차 처벌했다. 그 사이 김대중(1924~2009)이 도쿄에서 납치되었고, 장준하(1918~1975)는 산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여덟 사람은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들은 2007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2010년과 2013년에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단했다. 박정희 손에 죽은 억울하게 사람들은 무죄가 되었으나 우리 곁에 돌아오지는 못했다.   1973년 10월 1일 국군의 날 육군 퍼레이드에서 박정희를 예우하는 모습(위키피디아) 궁정동의 밤 1979년 가을, 부산과 마산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독재자 박정희의 정권은 10월 4일 김영삼(1927~2015)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12일 뒤인 10월 26일 밤 궁정동 술자리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1926~1980)가 총을 쏘았고,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1934~1979)이 추잡하게 죽었다. 아내 육영수(1925~1974)가 문세광의 총탄에 쓰러진 지 5년 만이었다. 국민을 가장 촘촘히 감시하던 체제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담장 바깥이 아니라 안쪽 술상이었다.   김재규 전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암살 현장검증 장면(나무위키) 유신의 유령은 아직 문밖을 서성인다 첫째,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은 독재자 박정희의 유신 수법을 52년 만에 꺼낸 일이었다. 국회를 막고 정당활동을 금지하는 포고령이 그랬다. 헌법재판소는 2025년 4월 4일 윤석열을 파면했다. 유신의 유령은 시민이 막았지만, 유령이 다시 들어올 문은 제도로 닫아야 한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쏠린 권한을 나누는 개헌, 계엄요건과 통제장치의 강화가 그 첫걸음이다. 둘째, 독재가 성장의 열쇠라면 지구의 독재국가는 모두 부자여야 한다. 그런 나라는 드물다. 한국의 성장에는 교육열, 세계 최장시간 일하던 노동자의 땀, 외국자금, 시대여건이 함께 들어 있었다. 독재자의 공으로 돌릴 수 없는 몫을 독재자에게 얹어 주는 셈법으로는 성장이냐 자유냐 라는 거짓 양자택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의 과제도 불도저로 밀어붙일 성장이 아니라 저출생, 불평등, 장시간 노동처럼 나눔과 설득으로 풀 일이다. 불도저는 땅은 고르지만 사람은 고르지 못한다. 셋째,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는 먹고살기 힘들던 날의 기억과 지금의 불안이 겹쳐 있다. 그 마음을 비웃을 일이 아니라 일자리와 주거 같은 살림살이의 답으로 풀어야 한다. 강한 지도자 한 명에게 기대는 대신 지도자가 잘못해도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오늘의 몫이다. 넷째, 긴급조치 피해자의 배상과 재심, 기록보존, 학교의 균형 잡힌 현대사교육이 남아 있다. 공도 과도 함께 가르쳐야 윤석열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독립군을 때려잡던 일본 만주국 황군 군인 시절의 친일파 박정희(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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