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약한 사람 송건호, 권력에 아니오 를 외치다 [사람들] 송건호(1926~2001)는 새색시 같다”는 말을 듣던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고 낯을 가렸으며, 스스로도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심약한 사람”이라 했다. 한겨레신문 대표 시절에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새색시 같이 조용하고 말수가 너무 적었다. 그래서 인터뷰 하기가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조용한 선비 한 사람을 꺾으려고 박정희, 전두환 독재 권력은 광고탄압에 정보기관, 고문과 군사재판까지 동원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파리 한 마리도 못 잡는 그의 무엇이 그리 무서웠을까.
총칼을 든 쪽은 권력이었고, 겁이 많다던 쪽은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송건호의 삶은 이 역설에서 시작한다.
송건호(청암 언론문화재단)
월급보다 무거운 양심
1953년 대한통신 기자로 출발한 송건호는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조선일보를 거쳐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올랐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자 박정희 정권은 광고를 끊는 방식으로 신문사를 압박했다. 광고란이 백지로 나가자 시민들은 격려광고를 보내 빈자리를 채웠다. 권력이 돈줄을 죄자 시민들이 지갑을 열어 맞선 것이다.
1975년 3월 동아일보 사주는 기자 134명을 해직했다. 송건호는 기자들의 복직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3월 15일 사표를 냈다. 부하들의 목을 치면서 자기 자리만 지킬 수는 없었다.
월급쟁이의 셈법으로는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가 버린 것은 직장이었지 양심이 아니었다. 훗날 한국 언론사에 남은 것은 편집국장이라는 직함보다 그가 지킨 한마디였다.
1988년 1월 25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송건호 한겨레신문 발행인이 한겨레 신문 창간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붓을 빼앗겼더니 책이 쏟아졌다
직장에서 밀려난 송건호는 역사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 『민족지성의 탐구』를 비롯해 한국현대사를 새롭게 읽는 책들을 펴냈고, 여러 학자와 함께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만드는 데도 힘을 보탰다. 서재필(1864~1951), 이승만(1875~1965), 김구(1876~1949) 같은 인물들을 통해 해방전후의 역사를 다시 물었다.
그에게 역사는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늘의 권력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독재가 신문사 문을 닫게 했더니 책 쓰는 사람을 키워 준 꼴이다. 권력의 계산이 얼마나 짧았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송건호(나무위키)
파리 잡던 손에 씌운 내란 혐의
1980년 5월, 송건호는 시국선언에 참여한 뒤 전두환 신군부에 연행됐다. 고문을 당했고, 거짓 자백과 진술서를 강요받았다. 자신이 김대중(1924~2009) 내란음모 조작사건의 공범으로 몰렸다는 사실도 재판과정에서 알게 됐다.
전두환 신군부의 군사재판에서 그는 1심 징역 3년 6개월, 항소심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해 11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몸은 온전하지 못했다. 고문후유증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2004년 재심에서 법원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내란음모 등 핵심 공소사실에 무죄를 선고했다. 애초에 없는 죄를 만들어 민주화인사들을 짓밟은 쪽이 누구였는지 역사가 다시 물은 것이다. 법의 이름으로 저지른 폭력도 영원히 법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
젊은 시절 송건호. 장남과 함께(지역문화활력소 고래실)
쫓겨난 기자들이 만든 신문
송건호는 풀려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의장을 맡았고, 월간 『말』을 통해 정권이 언론사에 내린 보도지침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힘을 보탰다. 무엇을 보도하고 무엇을 감출지 권력이 정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언론의 침묵 뒤에 숨은 검열의 실체도 드러났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에는 시민의 힘으로 독립 언론을 세우는 일에 나섰다. 국민 2만 7000여 명이 주식공모에 참여해 50억 원을 모았고, 1988년 5월 15일 한겨레가 창간됐다. 송건호는 초대 대표이사를 맡았다. 그는 기자들에게 쓰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을 쓰라고 했다.
권력이나 광고주가 아니라 독자에게 빚진 신문. 그것이 그가 꿈꾼 언론이었다. 해직이라는 상처가 새로운 신문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니, 독재가 막으려던 일이 오히려 독재를 기록할 새 지면을 만들어 낸 셈이다.
1988년 1월 25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송건호 한겨레신문 발행인이 한겨레 신문 창간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신혼 시절 송건호 이정순 부부(푸른 바위 위에 참된 말과 글을 새기자 – 지역문화활력소 고래실)
죽은 뒤에도 이어진 싸움
송건호는 2001년 12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며칠 뒤 서울신문은 조선일보가 초판 부음 기사를 배달판에서 판갈이하며 옛 면담의 한 대목을 끼워 넣었다고 지적했다. 민주인사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구절이다. 살아서 꺾지 못한 사람을 죽은 뒤 문장 한 줄로 흔들어 보려 한 셈이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 자랑에 가깝다.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 쫓겨나고 맞아 가며 저절로 되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언론인의 삶을 한두 문장으로 재단하려는 시도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실제로 무엇을 선택했는지 살피는 일이다. 그는 민주언론인이 되고 싶다는 말보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행동한 기록을 남겼다.
서울 역촌동 자택에서 송건호(청암언론문화재단)
오늘, 다시 필요한 ‘아니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포고령은 언론과 출판을 계엄사령부의 통제 아래 두려 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언론을 억압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권력이 언론의 입을 막으려는 유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송건호의 삶에서 오늘 우리가 배울 것 몇 가지다.
첫째, 언론의 독립은 사장의 선의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인사권과 편집권이 권력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언론을 언론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기자의 양심이다. 자리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사실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비판은 어느 한쪽만 겨눠서는 안 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과 자신이 만든 신문에도 같은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독립을 내세우면서 후원자의 입맛만 살핀다면 광고주의 눈치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송건호는 기자들을 해직한 일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역사의 판결은 더딜 때가 많다. 그러나 당장의 자리와 이익을 지킨 사람보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양심을 지킨 사람이 오래 기억되는 경우가 있다.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하던 선비가 권력에 가르친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었다. 해야 할 말을 해야 할 때 하는 것, 그리고 그 말에 책임지는 것이었다. 언론의 자유는 권력이 베푸는 선물이 아니다. 권력이 두려워하는 ‘아니오’를 시민과 언론이 함께 지켜 낼 때 비로소 살아난다.
충북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 생가에 세워진 송건호의 흉상(경향신문)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