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다린 정의,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사회혁신] 10월 7일 서울 서초구 민변 회의실에서 열린 긴급조치 피해자 민사재심 청구 기자회견 에 참석한 민변 긴급조치변호단 소속 변호사들과 긴급조치 피해자들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 긴급조치로 피해를 봤지만 과거 국가배상 소송에서 패소가 확정돼 구제받지 못했던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민사재심을 청구했다. 긴급조치 제1호의 첫 피해자였던 고 백기완 선생의 유족과 박석운 사단법인 긴급조치사람들 이사를 비롯한 긴급조치 피해자 10명의 재심 청구가 이날 접수됐다.
백기완 선생 유족 등 피해자 10명 재심청구 접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긴급조치변호단(단장 이상희 변호사)과 사단법인 긴급조치사람들은 7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민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백기완 선생 유족 등 긴급조치 피해자와 가족들을 대리해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 청구 소송의 민사재심 10건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긴급조치 피해자 민사재심 등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번 재심 청구는 지난 8월 2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뒤 9월 8일부터 시행된 ‘법률 제21885호 에 따른 것이다. 이 법은 긴급조치 발령 뒤 반유신 민주화 투쟁을 벌이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서 각하 또는 기각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민사재심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마련됐다. 재심 대상자는 500~600명으로 추산된다. 재심 청구는 이 법 시행일로부터 3년, 즉 2029년 9월 7일까지 이뤄져야 한다.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농단 구제 막아
민변 긴급조치변호단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긴급조치가 위헌·무효라는 사법적 판단에도 피해자들의 실질적인 구제는 오랫동안 가로막혀 왔다 며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당시 대법원은 긴급조치 발령과 적용·집행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을 부정했다 고 지적했다.
변호단은 이어 이후 대법원장이 구성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조사 결과, 이 판결들이 법원행정처 문건에서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한 사례로 소개된 사실이 확인됐다 며 국가 폭력으로 인권을 침해당한 피해자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야 할 사법부에 의해서도 구제의 기회를 박탈당한 것 이라며 사법부의 당시 행태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번 재심 청구가 국가 폭력 피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확인하고, 사법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미뤄진 피해 회복을 실현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고 촉구했다.
확정된 민사판결에 재심 허용한 첫 특례입법
이번 특별법은 국가폭력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위해 이미 확정된 민사 판결에 대해 재심을 허용한 첫 특례 입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같은 피해를 입고도 대법원이 판례를 변경하기 전에 패소 판결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배상을 받지 못했던 피해자들에게 구제의 길이 다시 열린 것이다.
류태선 긴급조치사람들 상임이사는 이것은 특혜가 아니라 형평의 회복이며, 과거를 들추는 일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법과 양심을 회복하는 일 이라고 강조했다.
무죄 선고에도 ’고도의 정치 행위‘이유로 배상 기각
이날 재심을 청구한 고 백기완 선생의 사건은 1974년 1월 8일 유신헌법 반대 활동을 억압하기 위해 발령된 긴급조치 제1호의 첫 피해자였던 백 선생이 긴급조치 발령 1주일 만인 그해 1월 15일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1년여를 복역한 뒤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던 사건이다.
당시 대법원 주심은 조희대 현 대법원장
백 선생은 2013년 형사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같은 해 9월 국가 배상 소송을 냈다. 2014년 1심 재판부(당시 재판장 김기영 부장판사)는 긴급조치 발령과 기소·재판의 전 과정이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으나, 2015년 항소심은 긴급조치가 고도의 정치적 행위 라며 청구를 기각했고 대법원도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으로 백 선생에 대한 국가배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대법원 주심은 조희대 현 대법원장이었다.
백 선생의 재심 소송 대리인인 한택근 변호사는 비록 2022년 판례 변경 이후 대법원이 긴급조치 1호에 대해서도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했지만, 판례 변경 전 패소가 확정된 백 선생 등은 재심을 청구할 길이 없었다 며 백 선생 부부는 이미 별세하셔서 자녀 4명이 오늘 서울고등법원에 재심 소장을 제출하게 됐다 고 설명했다.
류태선 긴급조치사람들 상임이사와 박석운 이사.
”반세기 지연된 정의를 바로잡는 역사적 재판
긴급조치사람들의 류태선 상임이사는 이번 민사재심은 단순한 손해배상 사건이 아니라 반세기 가까이 지연된 정의를 바로잡는 역사적 재판 이라며 사법부는 피해자들의 오랜 고통과 국가폭력의 중대성, 이미 너무 늦어진 정의의 시간을 깊이 헤아려 신속하고 실질적인 구제에 나서야 한다 고 촉구했다. 그는 또 새로 출범한 공소청을 향해 과거 검찰이 무리한 기소와 억압적 법 집행, 부당한 항소·상고로 피해자들의 권리 회복을 지연시켰던 만큼, 이번에는 재심과 배상소송이 신속히 확정·집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고 촉구했다.
조영선 변호사
과거사 청산, 사법부 책임 추궁, 정의 회복
조영선 변호사(전 민변 회장)는 법사위를 통과한 뒤 본회의 처리까지 8개월이 지연되는 등 너무나 오랜 기다림이 있었다 면서도 이번 특별법은 사법부의 잘못을 입법부가 나서 정의를 회복시킨, 전례 없는 입법 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재심 청구의 의미를 ▲진실 규명과 피해 회복이라는 진정한 과거사 청산 ▲사법부의 책임을 정확히 묻는 일 ▲ 악의 평범성 을 꾸짖는 정의 회복 등 세 가지로 꼽았다.
이상희 변호사
긴급조치 변호인단 변호사 25명 재심 지원 시작
김성주 변호사(민변 과거사청산위원회 위원장)는 긴급조치변호단 소속 변호사 25명이 재심 지원을 준비하고 있으며, 오늘 백기완 선생 사건 접수를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재심 대상 사건을 정리·접수할 것 이라고 밝혔다. 그는 재심 청구 기한(2029년 9월 7일)이 널리 알려져 더 많은 피해자가 참여할 수 있기를 당부했다.
이상희 변호사(긴급조치변호단 단장)는 술자리에서 한마디 했다가 잡혀간 이른바 막걸리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아직 연락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며 이번 기자회견이 널리 알려져 더 많은 피해자가 재심에 나설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긴급조치야말로 ’법률적 불법‘
박석운 긴급조치사람들 이사는 대통령 긴급조치야말로 독일 법학자 구스타프 라트브루흐 교수의 말을 빌리면 법률적 불법 이라며 지난 18년간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곁을 지켜준 민변 변호사들에게 감사하다 고 말했다. 그는 또 2024년 12월 3일의 비상계엄이 빨리 중단될 수 있었던 것도 긴급조치 위헌·무효 판결이 남긴 법치의 유산 덕분 이라며 이번 민사재심이 정의 회복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한승동 에디터 sudohaan@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