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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법을 지키며 이긴 참정권 운동가 밀리센트 포셋

법을 지키며 이긴 참정권 운동가 밀리센트 포셋
[사람들]
언니는 의사, 나는 정치 1847년 영국 남동부 항구마을 올드버러(Aldeburgh)에서 곡물상 겸 석탄상을 하던 뉴슨 개럿(Newson Garrett, 1812~1893)의 열 자녀 가운데 하나로 밀리센트 포셋(Millicent Fawcett, 1847~1929)이 태어났다. 이 집안은 딸을 낳으면 시집보낼 궁리부터 하던 당대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언니 엘리자베스 개럿 앤더슨(Elizabeth Garrett Anderson, 1836~1917)은 영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었고, 밀리센트는 열여덟 살에 언니를 따라 런던에 갔다가 자유당 정치인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의 여성 참정권 연설을 듣고 그 자리에서 인생 행로를 정해버렸다. 훗날 그는 나는 참정권론자가 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참정권론자였다 고 말했는데, 이쯤 되면 겸손이 아니라 팩트 폭격에 가깝다.   1873년경의 밀리센트 포셋(위키피디아) 눈먼 남편과 베스트셀러 경제학 교과서 열아홉 살에 그는 케임브리지대학 정치경제학 교수이자 자유당 하원의원이던 헨리 포셋(Henry Fawcett, 1833~1884)과 결혼했다. 헨리는 젊은 시절 사냥 사고로 실명한 사람이었다. 아내는 비서 노릇을 하며 남편의 의정활동을 도왔고, 짬짬이 써낸 입문서 『초심자를 위한 정치경제학』은 41년간 열 번 넘게 재판을 찍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부부는 케임브리지의 뉴넘 칼리지(Newnham College) 설립에도 힘을 보탰는데, 여성에게 대학 문턱조차 허락하지 않던 시절 이는 조용한 혁명이었다. 1884년 헨리가 갑작스레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서른여덟의 미망인은 슬픔을 접고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밀리센트와 헨리 포셋(위키피디아) 벽돌 던지는 동생들, 서류만 던지는 언니 1897년, 밀리센트는 여러 참정권 단체를 통합한 전국여성참정권협회연합(NUWSS)의 회장이 되었다. 이 조직의 별명은 법을 지키는 참정권론자들 이었다. 문제는 옆 동네에 훨씬 화끈한 조직이 있었다는 점이다. 1903년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 1858~1928)가 만든 여성사회정치연합(WSPU), 즉 서프러제트 (suffragette)는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에 불을 지르며 신문 1면을 장식했다. (여성형 접미사 -tte 를 붙인 데는 당대에 시끄러운 아낙네들 이란 멸칭의 느낌이 있다) 반면 밀리센트의 서프레지스트 (suffragist)들은 청원서를 쓰고 행진을 하고 의원들을 설득하러 다녔다. 언론은 화끈한 쪽만 보도했지만, 정작 조직의 크기는 정반대였다. 1905년 기준 밀리센트 쪽 회원이 5만 명에 육박한 반면 팽크허스트 쪽은 2천 명 남짓이었다. 시끄러운 소수와 조용한 다수라는 구도,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밀리센트는 폭력적 전술에는 끝내 동의하지 않았지만 옥살이하는 상대진영 여성들의 고초에는 공개적으로 연대했다. 1901년에는 남아프리카 보어전쟁 당시 영국군이 세운 강제수용소 실태를 조사하는 여성위원단을 이끌고 현지에 파견되기도 했는데, 전시에 여성에게 이런 임무를 맡긴 것 자체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 보고서가 수용소 상황을 지나치게 관대하게 평가했다는 비판도 훗날 함께 따라붙는다. 영웅에게도 흠결은 있는 법이다.   1899년경 어머니 루이자 개럿과 함께한 밀리센트 포셋(위키피디아) 여든한 살, 마침내 방청석에서 1918년, 30세 이상 일부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법이 통과되면서 밀리센트는 이듬해 22년간 맡아온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완전한 승리는 아직 멀었다. 남성과 똑같이 21세부터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은 1928년, 그가 여든한 살 되던 해였다. 본인 말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참정권 수정안 연설을 들은 1867년 5월로부터 정확히 61년 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그해 하원 표결을 방청석에서 직접 지켜보았다. 이듬해인 1929년, 여든두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2018년, 런던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 여성으로는 최초로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조각가 질리언 웨어링(Gillian Wearing, 1963~ )이 만든 이 동상은 용기는 어디에서나 용기를 부른다 는 그의 말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앞줄: 1910년 바스(Bath)의 이글 하우스(Eagle House)에서 메리 모리스, 메리 블라스웨이트, 밀리센트 포셋. 뒷줄에는 애니 케니, 키티 케니, 아델라 팽크허스트가 있다.(위키피디아) 한국에 주는 시사점, 담장 밖과 담장 안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은 헌법질서 바깥으로 튀어나가려는 시도를 목격했다. 그 이후 한국사회를 지탱한 것은 결국 헌법과 법률이 정해놓은 절차, 국회의 표결과 헌법재판소의 심리였다. 밀리센트의 생애는 이 지점에서 곱씹을 만하다. 그는 목표에 도달하는 더 빠른 길, 즉 유리창을 깨고 방화를 하는 길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끝내 법 테두리 안에서 싸우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결국 이겼다. 61년이 걸렸을 뿐이다. 한국정치는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어찌 됐든 상관없다 는 유혹에 자주 흔들린다. 여야를 막론하고 자기 진영이 옳다고 믿을 때는 절차를 건너뛰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밀리센트가 증명한 것은, 절차를 지키며 얻은 승리라야 아무도 뒤집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서프러제트의 벽돌은 신문 1면을 장식했지만 실제로 법을 바꾼 건 서류뭉치를 든 서프레지스트들이었다. 계엄이라는 헌정파괴 시도를 겪은 한국사회가 지금 다시 새겨야 할 것은 바로 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진실, 즉 민주주의는 언제나 조용한 쪽이 이긴다는 사실 아닐까.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영국 런던 의회 광장에 있는 밀리센트 포셋의 동상(위키피디아) 영국 런던 의회 광장에 있는 밀리센트 포셋의 동상(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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