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나의 음악,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사람들] 이해인 수녀님이 소장하고 계신 민들레영토 1976년 초판
시간의 강물이 흘러 어느덧 반세기라는 성(聖)스러운 세월이 쌓였다. 1976년, 세상은 거칠고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 거대한 역사의 톱니바퀴 아래에서 개인의 삶은 한없이 작고 초라하기만 했다. 그해 봄, 나는 스무 살을 갓 넘긴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찬란해야 마땅할 청춘이라는 이름표가 무색하게도, 내 앞길은 자욱한 안개 속에 가려져 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지 알지 못해 날마다 마음이 흔들리고 부서지던 방황의 시절이었다.
그 캄캄한 미로 속을 헤매던 어느 날, 나는 이끌리듯 종로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던 종로서적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수많은 책이 뿜어내는 종이 냄새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내 시선은 운명처럼 작고 소박한 시집 한 권에 머물렀다. 흰 바탕에 수줍게 그려진 민들레 그림, 그리고 『민들레의 영토』라는 서정적인 제목. 그것은 젊은 수도자 이해인 수녀가 세상에 처음으로 내어놓은 맑고 순결한 영혼의 고백록이었다. 돈도, 희망도,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던 청년의 손에 쥐어진 그 시집은 그날 이후 내 삶의 지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굳어 있던 마음에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왔고, 얼어붙었던 눈물샘이 터져 나왔다. 그 시집은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었다. 방황하던 나의 영혼에 건네는 구원의 악수였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청춘에게 던지는 나침반이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오늘, 나는 여전히 그날 종로서적에서 만난 민들레의 향기를 기억하며, 내 삶의 지표가 되어준 그 위대한 텍스트의 흔적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민들레의 영토』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은 화려한 수사학이나 거창한 철학적 담론에 있지 않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의 언어로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을 건드린다는 점에 있다. 1976년의 나는 세상이 요구하는 거대한 성공과 기준에 압도되어 나 자신의 초라함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인 수녀는 시를 통해 나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척박한 땅, 틈새의 돌바닥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노란 꽃을 피워내는 민들레처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바로 그 자리, 가장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영토 이며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기도는 나의 음악 /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 좁은 길이었다 해도 / 고독의 진주를 캐며 / 내가 /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 애처로이 쳐다보는 / 인정의 고움도 / 나는 싫어 / 바람이 스쳐가며 / 노래를 하면 / 푸른 하늘에게 / 피리를 불었지 / 태양에 쫓기어 / 활활 타다 남은 저녁노을에 / 저렇게 긴 강(江)이 흐른다 -중에서
민들레영토 50주년 축하 콘서트. 2026.7.16
시집 곳곳에 배어 있는 이 깊은 겸손과 절제의 언어들은 내 오만한 방황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왜 그리도 거창한 미래만을 꿈꾸며 현재의 내 삶을 저주했던가. 수녀님이 노래하는 민들레는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결코 피어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순명(順命)의 태도는 이십 대 초반의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방황이란 결국 내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고 싶다는 탐욕과, 미래를 내 힘으로만 통제하겠다는 과도한 오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시집을 읽어 내려가며 나는 비로소 내 좁은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나를 둘러싼 세상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신의 섭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해인 수녀의 시는 종교적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인간애와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다. 비록 가톨릭 수녀라는 특수한 신분에서 우러나온 수도 생활의 언어들이지만, 그것이 세상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전해질 때는 가장 따뜻한 위로의 손길이 되었다. 1970년대의 한국 사회는 급격한 산업화와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쉽게 훼손되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민들레의 영토』가 대중들에게 선사한 위안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 시대를 아파하던 지식인들, 그리고 나처럼 길을 잃고 방황하던 청춘들에게 수녀님의 시는 메마른 광야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다.
베네딕도수녀원에서 이해인 수녀님과 필자 내외 2025년 5월 5일
이해인의 시가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삶의 실천’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읽는 데서 끝나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이해하며, 더 많이 기다리는 삶. 그의 시는 이러한 삶의 방향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는 문학이 단순한 표현의 영역을 넘어, 윤리적 실천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나아가 그의 시는 ‘희망의 언어’를 구축한다. 그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고통과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작은 빛을 발견하려 노력하며, 그 빛을 시로 기록한다. 이러한 태도는 독자에게 단순한 위로를 넘어, 다시 살아갈 힘을 제공한다.
결국 이해인의 시 세계는 ‘맑음’과 ‘깊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겉으로는 단순하고 따뜻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영적 통찰이 담겨 있다. 그는 시를 통해 우리에게 거창한 진리를 설파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삶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조용한 메시지를 건넨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시는 단순한 문학적 성취를 넘어, 하나의 ‘영성적 유산’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유산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과 방향을 제시한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얼마나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서로를 품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의 시는 이 질문들을 통해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고 있다.
시인은 아주 작은 생명체 하나도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서도 신의 음성을 듣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이러한 자연 친화적이고 생명 중심적인 세계관은 나에게 존재 자체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청년이라 할지라도,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는 하나의 온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앞길이 보이지 않아 불안해하던 나에게 시집은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 을 가르쳐주었다. 눈에 보이는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영혼의 맑음과 타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야말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임을 깨닫게 되자, 내 마음을 짓누르던 방황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졌다.
이해인 수녀님 민들레글방에서 필자 내외. 2024년 7월 10일
또한 이 시집은 나에게 사랑의 방식 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만들었다. 이십 대의 사랑이란 대개 소유 지향적이고 정열적이며, 때로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민들레의 영토』가 보여주는 사랑은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아가페적 사랑 이자 돌봄의 사랑 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내 소유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온전히 피어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낮추고 자리를 내어주는 일임을 시인은 잔잔하게 일러주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50년의 세월 동안 내 삶은 늘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고, 때로는 예기치 못한 불행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던 밤도 많았다.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끗해진 오늘날에도,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질 때면 어김없이 낡은 시집을 펼쳐 든다. 누렇게 빛바랜 책장 사이로 여전히 서정적이고 맑은 수녀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했다. 편지를 쓰던 시대에서 인공지능이 세상을 이끄는 최첨단 시대로 도래했고, 종로서적이라는 물리적 공간마저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현대인들의 영혼은 여전히 빈곤하며, 오늘날의 청춘들 역시 50년 전의 나처럼 앞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해인 수녀의 『민들레의 영토』 출간 50주년은 단순히 한 권의 시집이 오래 살아남았음을 기념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 영혼을 치유하는 시의 영원한 가치를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절망의 끝에서 서성이는 누군가에게, 이 시집은 여전히 유효한 구원의 메시지다. 수녀님이 평생을 걸쳐 맑은 옥수 같은 시어로 우리에게 베풀어준 사랑과 위로의 빚을 우리는 어떻게 갚아야 할까.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의 작은 민들레가 되는 길일 것이다. 거친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꺾이지 않고, 자신이 속한 영토를 노란 희망의 빛깔로 물들이며, 마침내 때가 되면 미련 없이 홀씨를 날려 보내는 전도사가 되는 것. 그것이 50년 전 종로서적에서 한 권의 시집을 만나 영혼의 구원을 얻었던 이십 대 청년이, 이제는 노년의 길목에서 바치는 가장 진심 어린 감사이자 서평이다. 민들레의 영토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마음속에 맑은 시의 영성이 살아 숨 쉬는 한, 그 소박하고 강인한 노란 꽃은 앞으로의 50년, 아니 그다음 세기까지도 척박한 세상의 틈새마다 끊임없이 피어나 우리를 따스하게 안아줄 것이다.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