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다귀 세례 받고 도끼에 목숨 잃은 앨페이지 대주교 [사람들] 잉글랜드 남부 캔터베리에 가면 성 알피지 교회라는 곳이 있다. 이름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 알피지, 즉 앨페이지(Ælfheah, 953~1012)는 1000년도 더 전에 술 취한 바이킹들에게 소뼈다귀 세례를 받다가 도끼에 맞아 죽은 대주교다. 죽는 방식마저 웃기고도 처참한데, 그가 죽음을 자초한 이유를 들여다보면 이게 단순한 흑역사가 아니라 권력과 백성, 몸값과 배신에 관한 아주 오래된 질문과 답이라는 걸 알게 된다.
1868년 제임스 레드펀이 제작한 솔즈베리 대성당 서쪽 정면의 조각상으로, 엘페이지가 순교에 사용된 돌들을 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은둔자에서 대주교로
앨페이지는 953년 무렵 영국 서머싯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버리고 젊은 나이에 수도사가 됐고, 나중에는 아예 은자로 살겠다며 온천 근처 동굴 비슷한 곳에 틀어박혔다. 요즘으로 치면 잘나가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산속으로 들어간 격인데, 이게 오히려 명성을 키웠다. 당대 최고의 성직자였던 던스턴(Dunstan, 909~988)이 그를 찾아내 984년 윈체스터 주교 자리에 앉혔다. 윈체스터에서 그는 구걸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재산을 나눠줬다고 전해진다. 청빈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994년에는 노르웨이 왕 올라프 트뤼그바손(Olaf Tryggvason, 960?~1000)에게 세례를 주며 평화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1006년, 잉글랜드 왕 에설레드(Æthelred the Unready, 968?~1016)의 시대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승진한다. 문제는 이 시기 잉글랜드가 덴마크계 바이킹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악마가 찾아온 가운데 하프를 연주하는 던스턴(위키피디아)
몸값보다 백성을 택하다
1011년 9월, 바이킹 무리가 캔터베리를 포위하고 도시를 불태운 뒤 앨페이지를 인질로 잡았다. 이들은 그를 그리니치로 끌고 가 몸값을 요구했다. 당시 잉글랜드 조정은 이미 바이킹에게 물러가라며 8만 4000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은을 갖다 바친 상태였다. 여기에 앨페이지 몸값 3000파운드까지 얹으면 백성들 등골이 부러질 판이었다.
앨페이지는 거부했다. 자기 목숨과 맞바꿔 백성들에게 세금폭탄을 안기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거였다. 이건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계산된 저항이었다. 종교지도자가 자기 몸값을 두고 협상 테이블을 뒤엎어버린 셈이니까.
앨페이지(The Good Heart: St. Alphege/Aelfheah/Elphege of Canterbury (c. 953-1012))
잔혹한 결말과 사후의 반전
일곱 달을 붙잡혀 있던 앨페이지는 1012년 4월 19일, 술에 잔뜩 취한 바이킹들에게 끌려나왔다. 이들은 잔치 자리에서 소뼈다귀와 소머리를 던지며 그를 조롱하다가 결국 도끼로 내려쳐 죽였다. 흥미로운 건 바이킹 지휘관 토르켈(Thorkell the Tall)이 배와 재산을 다 내놓겠다며 그를 살리려 애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앨페이지의 죽음에 충격 받은 토르켈은 이후 잉글랜드 왕 편으로 돌아섰다고 하니, 폭력의 아이러니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앨페이지의 시신은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에 묻혔다가 1023년 훗날 잉글랜드를 정복한 덴마크 왕 크누트(Cnut the Great, 995?~1035)에 의해 캔터베리로 이장됐다. 정복자가 자신이 죽인 쪽 성인의 유해를 정중히 옮겨준 것이다. 1078년 로마 교황청은 그를 정식 성인으로 추대했다. 훗날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 1118~1170)이 자신도 살해당하기 직전 앨페이지에게 기도를 올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순교자가 순교자를 부른 셈이다.
잉글랜드를 정복한 덴마크 왕 크누트(위키피디아)
한국에 주는 시사점
앨페이지 이야기를 오늘 한국에 옮겨놓으면 뭐가 보일까. 권력자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국민부담을 늘리는 선택을 한다면, 그리고 그 선택이 정당화된다면 우리는 그걸 어떻게 부를까. 2024년 12월 3일 밤, 국민의 안전과 예산보다 자기 정치적 생존을 앞세운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앨페이지는 자기 한 몸 편해지자고 백성에게 부담 지우기를 거부했는데, 천 년 뒤 윤석열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또 하나, 폭력을 휘두른 자가 훗날 회심해 반대편에 서는 토르켈의 이야기는 가해자의 책임을 흐리자는 게 아니라, 진실이 드러나면 누구든 입장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다만 그 회심이 진짜 책임으로 이어지려면 시간이 걸릴 뿐이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부당한 조건으로 목숨을 구하려 하지 않아 데인족에게 살해당한 캔터베리 대주교 앨페이지의 순교 장면 삽화(Unreasonable S Stock Photo - Alamy)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