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기 라는 인간의 의무 [사람들] 2차 세계대전의 참화가 벌어지고 있던 1942년 2월 22일 브라질에서 한 망명 작가가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유서에서 이 너무도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간다”고 작별을 고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되고 가장 널리 읽히는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한 명이었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길고 어두운 밤 뒤에 아침노을이 마침내 떠오르는 것을 보기를!”이라고 남은 이들에게 행운을 빌었지만 그 자신은 그토록 높은 정신적인 절정에서 바닥으로의 도덕적 몰락”이라는 현실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츠바이크가 남긴 회고록 를 오늘날 다시 꺼내 읽어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그의 이 같은 깊은 비탄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이 책은 광기와 폭력으로 얼룩졌던 20세기 전반기 유럽 문명에 대한 증언이자, 인류의 이성과 문화가 무너진 세상에 대한 깊은 좌절을 담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인간성의 진보로 이어질 것이라는 19세기적 낙관주의가 얼마나 허황된 착각이었는지 깨달은 그가 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경고는 문명이 언제든 하룻밤 사이에도 야만으로 퇴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츠바이크가 이 원고를 집필하던 시기는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망명길에 올랐던 절망의 시간이었다. 그는 빈을 중심으로 만개했던 자유와 안정의 황금시절부터, 그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집단적 광기와 나치즘의 대두로 인해 무참히 파괴되는 과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이 시점에서 왜 우리는 츠바이크의 오래 전 회고록을 다시 펼쳐 들게 되는가. 그것은 가 단순히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의 세계’로 끝난 게 아닌 것이다. 정확히 100년의 시차를 건너뛰어 오늘 우리가 마주한 ‘오늘의 세계’와 앞으로 직면할 ‘내일의 세계’가 놀라울 정도로 겹쳐 있기 때문이다.
츠바이크는 책의 전반부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유럽을 회고하며, 당시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 도취돼 있었다고 증언한다. 철도와 증기선, 전기와 전화가 국경을 허물고 세상을 비약적으로 좁혀놓았을 때, 사람들은 물질적 진보가 곧바로 도덕적, 정신적 진보로 이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교육이 보급되고 위생과 법률이 개선되면 인류는 영원한 평화와 선(善)을 향해 틀림없이 나아갈 것이라는 오만한 낙관주의가 사회를 지배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확고하게 낙관주의를 믿었다. 인류가 교육, 위생, 법률을 통해 ‘가장 빠른 길로, 틀림없이 확실하게’ 영원한 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문명은 그 역사의 정점에서 가장 방심하고 오만해지는 법이다. 찬란한 기술적 진보는 인간의 내면을 성숙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기계와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인간의 야만적 본능과 배타적 집단주의도 그만큼 커졌다. 다만 세련된 외피 아래 숨겨져 있었을 뿐. 그러다 한순간의 도화선 앞에서 폭발했다.
이런 모습은 100년이 지난 21세기 초인 지금,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 인공지능을 비롯해 초고속 통신, 생명공학 등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압도적인 기술적 번영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세계는 오히려 반지성주의, 극단적 혐오, 그리고 냉혹한 각자도생의 야만으로 뒷걸음질치고 있다.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와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은 파편화되고 사회적 갈등은 그 어느 때보다 깊어졌다. 우리는 츠바이크가 개탄했던 저 100년 전과 같이 비대한 기술과 왜소해진 이성이 공존하는 기괴한 모순 속에서, 문명이 정점에서 몰락할 수 있는 전형적인 궤적을 밟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나무 위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츠바이크에게 가장 큰 충격과 지적 좌절을 안겨준 것은 전쟁 초기, 유럽의 대중들은 물론 존경받는 지성인들까지도 애국주의와 영웅주의의 열광에 휩쓸려 자발적으로 전쟁터로 걸어 나가는 모습이었다. 이성과 인문주의의 성채라 자부하던 유럽이 순식간에 집단적 광기의 도가니로 전락하는 것을 보며, 츠바이크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심연을 직시했다.
나의 기억 속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철저하게 믿었던 이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던 그 집단적 광기의 순간이다.
전쟁은 인간의 가장 저열한 본능을 해방시켰고, 동시에 그것을 가장 숭고한 의무인 것처럼 포장했다.
1차대전이 끝난 지 불과 10여 년 만에 나치즘과 파시즘이 대두할 때, 츠바이크는 자유주의와 법치주의가 폭력 앞에 얼마나 무기력하게 무너지는지 다시금 처절하게 목격했다.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권력을 잡은 전체주의 세력은 민주주의의 제도를 역이용해 자유를 압살하고, 소수자에 대한 체계적인 박해를 정당화했다.
우리의 자유는 하룻밤 사이에 허물어졌다.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와 인권은 폭력 앞에 너무나도 무력한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던가?
츠바이크가 무엇보다 좌절했던 것은 감동적인 자유주의와 낙관주의 속에 살면서 창밖에서 동터오는 새로운 하루하루가 우리의 삶을 산산조각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하지 못했던” 것이며, 심지어 그들이 겪었던 가장 암울한 밤에도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 꿈에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100년 전 츠바이크의 탄식이 오늘의 민주주의 위기 속에서 다시 들리는 듯하다. 오늘날 세계 여러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선출된 권력이 첨단 기술과 감시 시스템을 동원해 민주주의의 규범을 껍데기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소수자 배척을 선동하며 혐오와 차별의 야만이 첨단 문명사회에서 일상이 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어벽이 돼야 할 법과 제도가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의 손에 의해 오히려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되기도 한다. 츠바이크가 증언한 것처럼, 자유와 민주주의는 결코 한 번 쟁취하면 영원히 보장되는 기득권이 아니며, 오늘 이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내일의 세계는 전체주의의 그늘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에서 로마제국 몰락의 역사는 결국 어리석음의 기록에 다름아니다 라고 통찰했듯, 인류의 문명은 언제나 그 찬란한 정점에 도달한 순간부터 가장 깊은 몰락의 씨앗을 품고 스스로를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20세기 초가 그러했듯, 21세기의 지구촌 역시 눈부신 번영의 극점에서 이성의 후퇴와 야만의 부활이라는 거대한 역설을 겪어내고 있다.
츠바이크가 프로이트를 만났을 때 들었던 우리는 우리의 문화, 우리의 문명이 하나의 얇은 층에 지나지 않으며, 어느 순간에든지 심층 세계의 파괴적인 힘에 의해 깨질 수 있는 것이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사랑했던 유럽의 문화와 정신이 파괴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 채, 그는 스스로 ‘성급한 인간’이라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마지막 숨결이 담긴 이 한마디는 지금의 우리에게 깊은 회의와 함께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의 절망과 자살은 너무 성급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가 무기력과 좌절 속에서 도피하듯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는 살아 있을 때 한결같이 분투하는 인간이었으며, 굽힐 줄 모르는 불굴의 지식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삶을 중단시킨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아낌없이 내던진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종결지은 것이었다. 그 죽음은 삶의 포기라기보다는 일종의 삶의 완성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100년의 시차를 건너뛰어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는 츠바이크는 불과 20년도 안돼 세계대전의 참화를 되풀이하는 인간에 대해, 그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기억에 대해 몸서리치며 규탄한다. 그는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은 어떤 것은 그냥 우연히 보유하고 다른 것은 단지 우연히 상실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오직 스스로 남으려고 하는 회상만이 다른 여러가지 회상에 대신해 남겨질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츠바이크의 이 책은 인간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이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못할 때 어떤 비극과 재난을 맞게 되는가를 들려주는 책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이 1995년 국역판 첫 출간 이후 31년 만인 올해 8월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됐다. 이 너무도 성급했으나 꺾일 줄 몰랐던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기억의 의무 에 대해 생각해 봄직하다. 츠바이크는 인간의 나약함과 망각의 과오를 얘기했지만 그 말에 이어 (그러나) 인간은 또 얼마나 강인하게 위험을 견뎌내고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인가”라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강인한 존재가 되는 것, 그건 ‘기억’하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재 에디터 promes6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