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모니터링&뉴스레터   페투미X사회혁신
페투미X사회혁신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샤를 드골, 나치 부역자 처단으로 국가 자부심 세우다

샤를 드골, 나치 부역자 처단으로 국가 자부심 세우다
[뉴스]
프랑스에는 사람 이름이 붙은 공항이 딱 하나 있다. 파리의 관문, 샤를 드골 공항. 주인공은 두 번이나 프랑스를 벼랑에서 건져 올린 인물이다. 한 번은 총 대신 라디오 마이크로, 또 한 번은 헌법 초안으로.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은 1890년 11월 22일 프랑스 북부 릴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9일 콜롱베 마을에서 눈을 감았다. 군인으로 시작해 국가원수로 끝난 팔십 평생, 그를 관통하는 단어는 딱 하나, 고집이다.   1942년 군복 차림의 드골(위키피디아) 포로가 된 애송이 장교 생시르 군사학교를 나온 드골은 1차대전에 소위로 참전했다가 1916년 베르됭 전투에서 부상당한 채 독일군 포로로 잡힌다. 무려 다섯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다는데 모두 실패했다. 이 시기 그의 상관이 바로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1856~1951)이었다. 훗날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갈라진다. 스승 페탱은 나치에 부역하는 비시 정권의 수반이 되고, 제자 드골은 그 정권을 무너뜨리는 저항의 얼굴이 된다.   1941년의 페탱(위키피디아) 런던에서 시작된 반란 1940년 6월,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프랑스 정부는 항복을 택한다. 그 항복 문서에 서명한 사람이 다름 아닌 페탱이었다. 이때 육군 준장에 불과했던 드골은 런던으로 망명해 영국 국영방송 BBC 전파를 빌려 프랑스 국민에게 항전을 호소한다. 병력도, 정부도, 심지어 자국 영토 한 뼘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프랑스다 라고 선언한 셈이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무모했지만, 이 방송 한 편이 자유프랑스군의 출발점이 되었다. 1943년에는 앙리 지로(Henri Giraud, 1879~1949) 장군과 함께 알제에서 프랑스민족해방위원회를 이끌었고, 1944년 파리 해방과 함께 임시정부 수반으로 금의환향한다.   전쟁 중 BBC 라디오에서 연설하는 드골 장군(위키피디아) 해방 후 대대적인 청산, 짧고 굵은 퇴장 전쟁이 끝나자 드골은 나치 부역자를 대거 숙청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최근 여배우 하영의 증조부 친일 논란으로 한국에서는 친일 청산이 미흡했던 역사적 과오를 돌아보는데, 드골이 이끄는 임시정부 주도로 대대적인 부역자 청산 에퓌라시옹 (Épuration)을 단행한 것은 부럽기까지 한 과정이다. 법원 및 특별재판소를 통해 1944년부터 10년간 약 35만 명의 부역 혐의자 가운데 약 12만 명이 재판에 회부돼 9만 8000여 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 중 3만 8000여 명이 징역 또는 금고형을 선고받았고, 사형선고를 받은 6700여 명 중 1500명이 처형됐다.  ​특히 지식인은 언어의 무게를 져야 한다 는 기치 아래, 나치 찬양 글을 쓴 언론인과 작가, 언론사 사주를 맨먼저 처단했다. 나치 점령기에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은 폐간됐다. 언론사 자산을 몰수하고 부역 언론인을 사형에 처하는 등 도덕적 리더십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그리고  국가의 수치 (Indignité nationale)라는 형벌을 신설해 부역자들의 투표권, 공직 임용권, 변호사·교사 등 전문직 자격을 박탈했다. 알베르 카뮈는 1944년 9월 9일 자 에서 우리의 모든 과거 불행은 반역을 처벌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오늘 또다시 처벌하지 않는다면, 주모자들을 처단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것이다. 어제의 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곧 내일의 죄를 부추기는 것이다.” 드골은 카뮈의 손을 들어주며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또다시 민족 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드골은 사형을 선고받은 옛 상관 페탱을 예우해 종신형으로 감형해 준다. 역사적 과오 청산의 기틀을 만든 드골은 1946년, 정당들의 이합집산에 신물이 나 스스로 정계를 떠난다.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미련 없이 물러난 이 대목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유다. 1947년 정당을 만들어 재기를 노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1953년 아예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낙향해 회고록을 쓰며 지낸다. 프랑스 언론은 이 시기를 사막 횡단 이라 불렀다.   도널드 셰리던의 드골 초상화(위키피디아) 사막을 건너 다시 돌아오다 그런데 역사는 은퇴한 노인을 가만두지 않았다. 1958년 알제리 식민지 문제로 프랑스가 내전 직전까지 몰리자, 정치권은 다시 드골을 호출한다. 당시 대통령 르네 코티(René Coty, 1882~1962)는 그에게 전권을 맡겼고, 드골은 새 헌법을 손수 작성해 국민투표에 붙인다.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 이 헌법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제5공화국의 뼈대다.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쥐어 준 이 체제는 지금도 너무 세다 는 비판을 받지만, 어쨌든 68년째 굴러가고 있다.   1954년의 코티(위키피디아) 헌법을 고쳐 쓴 노인, 하루 만에 짐을 싸다 집권 후 드골은 1962년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프랑스 독자노선을 고집하며, 나토 통합군 지휘체계에서도 빠져나간다. 1965년 재선에 성공했지만 1968년 5월 학생과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 이른바 68혁명 으로 권위가 흔들린다. 그리고 1969년 4월, 상원 개편과 지방 제도개혁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자 드골은 다음날 곧바로 사임을 발표하고 정계를 떠난다. 자신이 직접 국민의 뜻을 묻겠다며 던진 승부수였으니, 깨끗이 물러나는 게 도리라 여긴 것이다. 이듬해 콜롱베 자택에서 회고록 집필 도중 동맥류 파열로 세상을 등졌다.   1963년 워싱턴 D.C.에서 린든 B. 존슨 대통령과 함께한 드골(위키피디아) 한국에 던지는 질문 드골에게서 눈여겨볼 대목은 화려한 승리담이 아니라 권력을 내려놓는 방식이다. 그는 국민투표라는 링에 스스로 올라가 결과에 승복했다. 진 다음에는 하루도 안 돼 짐을 쌌다. 반면 최근 한국정치를 돌아보면, 2024년 12월 3일 밤 계엄을 선포했다가 국민과 국회의 저항에 부딪혀 물러선 자리에서도 윤석열과 그 일당의 책임지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권력은 국민이 잠시 맡긴 것이라는 태도와, 권력은 손에 쥔 순간 영원히 내 것이라는 태도의 차이는 이렇게 크다. 또 하나, 드골이 옛 스승 페탱을 단죄하면서도 사적 인연을 이유로 감형해 준 대목은 원칙과 온정 사이의 균형을 보여준다. 원칙 없는 온정도, 온정 없는 원칙도 결국 사회를 갈라놓는다. 반헌법행위자를 어떻게 심판하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프랑스도, 한국도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프랑스 콜롱베이 레 되 제글리즈에 있는 샤를 드골의 무덤(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