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에서도 국가보안법이 활개 치는가 [뉴스] 17일 청와대 분수 앞에서 열린 123개 시민단체의 국가보안법 폐지 촉구 기자회견
또다시 국가보안법이다. 17일 오전 이정훈 반도평론 대표의 집에 수사기관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이다.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이정훈 대표를 비롯해 한성민, 박연재, 박재환, 박재현, 정대일, 이순모, 이용주 등 8명이 압수수색 대상이 됐다고 한다. 사유로는 ‘통일사회과학연구모임’ 활동이 거론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정훈 대표가 이미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 이번 압수수색이 진행됐다는 점이다. 심재환 변호사에 따르면 현재 진행 중인 재판과는 별개의 사건이라고 한다.
사실이라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재명 정부에서 국가보안법은 어디까지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 윤석열 정부가 물러났다고 해서 국가권력의 오래된 공안적 사고방식까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닌가 보다. 정권은 바뀌었는데 수사기관의 사고방식은 그대로라면 정권교체가 시민의 삶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이정훈 대표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책이나 사상에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과 국가가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국가가 시민의 ‘행동’이 아니라 ‘생각’을 문제삼기 시작할 때다.
물론 국가안보는 중요하다. 북한의 지령을 받고 간첩행위를 하거나 국가의 존립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행위가 있다면 당연히 수사하고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 누구도 국가안보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국가안보를 지킨다는 명분이 시민의 사상과 학문, 토론과 표현까지 국가가 들여다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통일사회과학연구모임’이라는 이름만으로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가. 통일을 연구하면 안 되는가. 북한의 정치와 사회를 공부하면 안 되는가. 주체사상을 연구하면 안 되는가. 북한의 역사와 사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책을 읽으면 안 되는가. 남북관계의 미래를 토론하면 안 되는가. 통일을 주제로 모임을 만들면 국가보안법의 수사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만약 이런 활동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면 대한민국에서 자유로운 학문과 사상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국가보안법 제7조를 둘러싼 논쟁이 수십 년 동안 계속돼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엔 자유권위원회 역시 한국의 국가보안법 제7조가 지나치게 넓거나 모호하게 적용될 가능성과 표현의 자유에 미치는 위축 효과를 지속적으로 우려해 왔다. 이것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특정 진영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가라는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 답답한 것은 이재명 정부라는 점이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국가권력이 국민의 자유를 억압했던 시대를 끝내라는 국민의 요구 때문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계엄 사태를 경험하면서 국민이 얼마나 절실하게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회복을 요구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재명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국가권력이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시민을 대하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검찰과 경찰, 국가정보원 등 수사기관이 국가보안법을 지나치게 확대 적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한다. 특히 국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라면 대통령과 정부가 더욱 엄격하게 살펴야 한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수사기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반대로 수사기관이 수사를 한다고 해서 대통령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돌릴 수도 없다. 이번 사건에서 실제 압수수색을 결정한 주체와 영장에 적시된 혐의, 구체적인 범죄사실이 무엇인지부터 밝혀야 한다. 바로 그래서 이재명 정부가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수사기관이 법에 따라 적법하게 수사하고 있다면 무엇을 수사하는지 국민에게 설명하면 된다. 실제적인 국가안보 침해 혐의가 있다면 구체적인 증거에 따라 법원에서 판단받으면 된다. 그러나 만약 통일 관련 연구와 토론, 출판활동 자체를 문제 삼아 국가보안법의 칼날을 휘두른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후퇴다. 국가보안법은 국민에게 공포를 주는 순간 가장 강력한 법이 된다.
‘혹시 나도 문제가 되는 것 아닐까.’
‘북한에 관한 책을 읽어도 되는 것일까.’
‘통일 문제를 연구해도 괜찮을까.’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면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시민들이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표현의 자유는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법률이 사람의 입을 직접 틀어막지 않아도 된다.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 심어주면 사람들은 스스로 침묵한다. 그것이 국가보안법이 가진 가장 오래된 위험이다. 나는 이정훈 대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하고 싶다.
국가는 왜 시민의 생각을 그렇게 두려워하는가. 민주주의가 자신감을 가진 체제라면 다양한 생각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틀린 생각은 토론으로 반박하면 된다. 잘못된 주장은 비판하면 된다. 위험한 사상이라면 더 많은 공개토론과 검증을 통해 그 허점을 드러내면 된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을 보관하고 있다가 불법 구금돼 옥살이했던 정진태(오른쪽 두 번째) 씨가 28일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위반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최정규 변호사(왼쪽) 등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2025.10.28 연합뉴스 자료사진
책을 압수하고 사람을 수사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생각은 생각으로 싸워야 한다. 주장은 주장으로 반박해야 한다. 사상은 토론의 광장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더구나 이정훈 대표의 기존 사건에서도 그의 저서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인지 여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그의 저서 두 권이 문제 됐고, 항소심에서는 북측 공작원으로 지목된 인물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국제사실조회도 진행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 또 다른 국가보안법 수사가 시작됐다면 국민은 더욱 엄격하게 그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 국가보안법 수사라고 해서 수사기관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됐다는 사실 역시 유죄판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압수수색은 수사의 한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수사 대상자들을 이미 범죄자로 규정해서도 안 된다. 반대로 이들에게 제기된 혐의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기회도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
나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재명 정부가 국가보안법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에게 약속했던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국가권력이 시민의 자유를 어디까지 제한할 것인가. 국가안보와 표현의 자유 사이의 경계는 어디에 그을 것인가. 그리고 낡은 공안논리가 새로운 정부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것은 이정훈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 이정훈에게 국가보안법의 칼날이 향하지만 내일은 다른 사람에게 향할 수 있다. 오늘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의 집에 압수수색이 들어갔는데 내가 침묵한다면, 내일 국가가 내 생각을 문제 삼을 때 누구에게 자유를 요구할 것인가. 민주주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자유를 지키는 제도가 아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심지어 내 생각과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도 법이 보장하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묻는다. 이재명 정부는 과거와 무엇이 다른가. 정권만 바뀌고 국가권력의 오래된 습성은 그대로라면 그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윤석열 정부의 국가폭력에 분노했던 사람들이 이재명 정부의 국가보안법 남용 가능성에는 침묵한다면 그것 역시 민주주의의 원칙과 거리가 멀다.
권력은 누구의 손에 들어가든 감시받아야 한다. 내가 지지하는 정권이라고 해서 감시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재명 정부가 잘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 엄격하게 묻고 싶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시민의 양심과 사상을 옥죄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면 그것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실질적인 간첩행위와 국가안보 침해행위는 엄정하게 수사하되, 사상과 표현, 학문과 연구, 통일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까지 범죄화해서는 안 된다. 국민이 바란 것은 정권의 얼굴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국민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국민을 의심하는 국가에서 국민을 믿는 국가로, 사상을 통제하는 국가에서 사상을 보장하는 국가로, 공포로 침묵시키는 국가에서 토론으로 설득하는 국가로 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방향이다. 그러므로 이재명 정부에 묻는다.
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시민의 자유를 다시 옥죄는 일을 방치할 것인가. 이번 압수수색이 정말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수사라면 국민 앞에 구체적인 혐의와 근거를 밝혀라. 반대로 통일을 연구하고 토론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보안법의 칼을 들이댄 것이라면 즉각 바로잡아야 한다.
국민은 또다시 국가보안법의 공포 속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었다면 국가권력의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 나는 이재명 정부가 과거의 공안국가를 답습하지 않기를 바란다. 국가보안법이 국민의 입을 막는 방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안보를 핑계로 민주주의를 훼손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이재명 정부는 국민에게 약속했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그것이 정권교체의 의미이고, 국민이 이 정부에 요구하는 최소한의 책무이다.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