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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노동력 착취와 부동산 매각으로 돈을 불린 신림원

노동력 착취와 부동산 매각으로 돈을 불린 신림원
[사회혁신]
무더위와 장마가 교차하던 여름날, 잔뜩 흐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무거웠다. 인터뷰 장소는 한때 신림원이 있던 자리에서 멀지 않은 커피숍이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에게 그 일대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그날 마주 앉은 사람은 모두 네 명이었다. 김숙희(가명), 김용재, 정순영, 유진수. 살아온 삶은 각기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어린 시절 신림원을 거쳐 간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증언이 시작되자 다른 사람의 기억도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마치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시간이 한꺼번에 열리는 듯했다. 누군가는 울음을 참기 위해 말을 멈췄고, 누군가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단순히 시설 안에서 벌어진 아동학대의 수준을 넘어섰다. 구타와 강제노동, 종교 강요, 교육권 박탈, 가족과의 생이별, 후원금 유용 의혹까지. 각각의 사건은 따로 떨어진 일탈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 안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구조가 시설 담장 안에서만 작동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국가의 부랑아 정책과 대규모 시설 수용 방식, 사실상 부재했던 행정감독, 그리고 시설 운영자의 절대적 권한이 맞물리면서 아이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와 동원의 대상으로 취급됐다. 그 ‘카르텔’은 하나의 폐쇄적인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가장 약한 존재였던 아이들이 희생됐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들은 당시를 이야기할 때 현재형으로 말한다. ‘맞았다, 끌려갔다, 굶었다’는 기억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일부처럼 남아 있다. 그날 커피숍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네 사람의 회고가 아니라, 국가와 시설이 함께 만든 한 시대의 침묵을 증언하는 기록이었다. 김숙희 씨(1958년생)는 동성영아원을 거쳐 1966년 초등학교 입학 무렵 신림원으로 전원되었다. 그는 신림원이 문을 연 초기부터 생활한 ‘신림원 1기생’이다. 새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67년이었다. 동성영아원에 있을 때는 노량진초등학교 1학년까지 다녔다. 그러나 신림원 개원으로 아이들은 모두 그곳으로 옮겨졌고, 학교도 은천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신림원에서 은천초등학교까지는 약 4km, 당시엔 10리길이라고 불렸다. 어린아이들이 걸어 다니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김 씨를 포함한 아이들 11명은 매일 그 길을 걸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야 했고, 힘들어 울음을 터뜨리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울보’였다. 지금의 관악세무서 자리에 있었던 신림원에서 은천초등학교까지 이어진 그 길은 어린아이들에게는 너무도 먼 통학길이었다. 초등학교를 마친 뒤에도 선택권은 없었다.   노량진에 위치했던 동성영아원에서 신림원으로 전원되기 직전의 김숙희(가명)씨와 원생들의 모습 중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자 신림원은 아이들에게 자체 선발시험을 실시했어요. 원장은 ‘모두를 중학교에 보낼 수는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시험문제는 당시 대학을 다니던 원장의 막내딸이 출제했습니다. 그 결과 11명 가운데 단 3명만 봉천중학교에 입학했고,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고등공민학교로 보내졌습니다. 고등공민학교는 당시 가난한 아이들이 주로 다니던 학교입니다. 일반 중학교와 달리 정규 학력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졸업 후에도 별도로 검정고시를 치러야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어요. 정규교육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죠. 고등학교 입학 나이가 되자 원장은 다시 저를 수도고등성경학교 야간부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신림원에서 보모로 일하는 조건이었습니다. 낮에는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부터 약 9년 동안 보모 생활을 이어갔지만, 제가 다닌 학교들은 모두 비인가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결국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에, 검정고시를 준비할 시간도,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보모로 일한 임금도 정식 직원의 절반 수준도 받지 못했습니다.” 김씨에게 신림원은 보호시설이 아니라 폭력과 강제노동이 일상이었던 공간으로 남아 있다. 그의 기억 속 어린 시절은 따뜻한 보살핌 대신 체벌과 공포였다. 어느 겨울 벌거벗겨진 채 얼음장 같은 바닥에 머리를 박고 기합을 받았다. 이유는 대단한 잘못이 아니었다. 한 아이의 실수만 있어도 모두가 함께 벌을 받았다. 집단기합(얼차려) 은 생활의 일부였다. 원생들에게 개인의 잘못과 집단의 책임은 구분되지 않았다. 폭력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김씨는 연탄집게로 맞아 일주일 동안 몸져누웠던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른의 훈육이라는 이름 아래 가해진 폭력은 아이들에게 저항할 방법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신림원의 하루는 새벽 5시 30분에 시작됐다.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집단으로 예배당에 모여 새벽예배를 드려야 했다. 선택은 없었다. 신앙은 자유가 아니라 강요였다. 당시 원장은 장로였고, 종교적 의례는 생활 규율의 일부처럼 운영됐다. 믿음을 가르친다는 명분은 아이들의 의사보다 우선했다. 겨울이 다가오면 원생들은 모두 김장을 담그는 일에 동원됐습니다. 무려 3천 포기의 배추를 자르고 다듬고 절이며 양념을 만들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노동이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아이들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시설 운영을 위한 노동력이었습니다. 교육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 생활하던 여학생 상당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선명회 재단이 운영하는 직업훈련소로 보내졌으며, 그곳에서 아이들은 일본으로 수출되는 자수 제품을 만드는 작업에 투입됐어요. 배움의 기회는 생산노동으로 대체됐으며, 미래를 준비해야 할 청소년기는 값싼 노동력으로 소비됐습니다. 미국의 후원자들이 보내온 편지와 후원물품도 아이들에게는 닿지 않았습니다. 원생들은 후원자들에게 ‘옷과 돈을 잘 받았다’는 감사편지를 쓰도록 했지만 실제로 그 옷이나 돈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후원자들은 아이들을 돕고 있다고 믿었지만, 정작 아이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입니다. 후원금과 후원물품을 시설 운영자들이 착복한 것입니다. 시설을 떠나는 순간에도 자립을 준비해주지 않았습니다. 퇴소할 때 손에 쥐어준 자립지원금은 단 한 푼도 없었죠. 수년 동안 시설에서 강제노동하며 살아왔지만 사회로 나가는 순간 빈손이었습니다. 보호라는 이름 아래 어린 시절을 빼앗겼고, 성인이 되어서는 홀로 살아남는 일까지 개인의 몫이 되었습니다.”   미국인 후원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편지와 함께 찍은 인증 사진. 후원자들이 보낸 물품과 돈은 원생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운영자들이 착복했다. 보모로 일하던 시절에는 억울한 해고도 겪었다. 감사가 진행되던 어느 날, 다른 보모가 아이에게 복도에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지시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책임은 김씨에게 돌아왔으며 결국 그가 해고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보모 생활을 포함한 18년의 신림원 생활이 허무하게 마무리된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교육받을 권리를 빼앗겼고, 성장해서는 노동을 제공하면서도 제대로 된 학력도, 정당한 임금도 받지 못했다. 신림원을 떠났다고 해서 김씨의 시설 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퇴소한 뒤에도 그는 원장 가족의 집으로 다시 불려갔다. 이번에는 원생이 아니라 사실상의 파출부였다. 하루 노동시간은 15시간에 달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집안 일을 도맡았다. 당시 원장 가족은 고속버스터미널 인근에 살았고, 김씨는 고척동 집까지 매일 출퇴근을 반복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노동이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그 시절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퇴근길의 눈물이다. 버스터미널 의자에 앉아 한참을 울었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부모가 없어서 이런 취급을 받는구나.’ 어린 김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을 잘하고 말이 없으며 돌아갈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부려먹히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 일찍 깨달았다. 시설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곳이 아니라, 쉽게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을 확보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는 훗날 같은 시설 출신 남성과 결혼했다. 특별한 기술을 배우지 못한 남편은 생계를 위해 사북 탄광에서 일하기도 했다. 시설은 아이들을 사회로 내보냈지만, 자립할 수 있는 교육도 기술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가난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시설에서 시작된 결과에 가까웠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김씨가 잊지 못하는 얼굴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은숙’이라는 여자아이다. 김씨의 기억에 따르면 은숙은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보모에게 반복적으로 심한 폭행을 당했다. 탈출을 시도한다는 이유였다. 어느 날은 너무 심하게 맞은 뒤 고열에 시달렸고, 눈동자가 흰자위만 보이는 위급한 상태가 됐다.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다시는 시설로 돌아오지 못했다. 김씨는 은숙이 원래는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생활하던 아이였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반복적인 폭행 이후 이상 증세가 나타났고, 이후 지적장애 증상을 보였으며 결국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아이는 살려고 도망친 거였어요.’ 어린아이가 반복해서 탈출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이 김씨의 기억이다. 은숙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시설에는 그 아이를 기억하는 기록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는 문서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이름과 얼굴, 그리고 마지막 모습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김용재 씨(1962년생)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서울희망원에서 시작된다. 당시 그는 네댓 살에 불과했다. 세월이 반세기 넘게 흘렀지만 그날의 장면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느 날 엄마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용재야.’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고, 엄마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보모는 저를 자신의 뒤로 숨겨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방 안으로 밀어 넣었어요. 엄마를 만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죠.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사나흘 동안 계속 희망원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시설 관계자들은 제가 엄마와 만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결국 엄마는 저를 만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제가 엄마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이후 다시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 시설에서는 그에게 ‘좋은 곳으로 간다’고 말했다. 어린아이에게는 새로운 집으로 가는 일쯤으로 들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곳은 또 다른 아동복지시설인 신림원이었다. 밤이 되자 아이 셋이 승용차에 함께 태워졌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설명은 없었다. 아이들은 목적지도 모른 채 어둠 속을 달렸다. 그렇게 김용재 씨의 두 번째 시설 생활이 시작됐다. 은천국민학교에 입학해 1년을 다닌 뒤에는 새로 개교한 신림국민학교로 전학했다. 학교는 바뀌었지만 시설 안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김용재 씨의 기억 속 신림원은 교육기관도 보호시설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군대식 규율이 지배하고 있었다. 시설 총무였던 김덕중은 군 제대 직후여서 인지, 군대에서 익힌 방식 그대로 아이들을 다뤘다. 작은 잘못에도 군대식 얼차려가 이어졌다. 가장 잊히지 않는 체벌은 각목이었다. 무릎 뒤에 각목을 끼운 채 앉게 만든 뒤, 야구방망이로 허벅지를 내려쳤다. 고통 때문에 자세를 풀면 다시 맞아야 했다. 아이들은 비명을 삼킨 채 버틸 수밖에 없었다. 겨울은 더욱 잔인했다. 한겨울 혹한 속에서 팬티만 입은 채 담벼락 앞에 세워지는 벌도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몸은 추위에 떨렸지만 체벌은 끝나지 않았다. 김 씨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며 ‘얼어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신림원의 기억은 배움이나 보호가 아니라 공포와 체벌로 남아 있다. 그의 증언은 시설 생활이 단순히 부모와 떨어져 지낸 시간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엄마가 눈앞까지 찾아왔지만 시설의 벽을 넘지 못해 생이별을 해야 했고, 다른 시설로 옮겨진 뒤에는 군대식 폭력과 체벌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한 아이가 가족을 잃는 과정에는 단순한 가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가족의 만남을 가로막은 시설 운영과 아이들을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본 당시 복지 시스템이 함께 존재했다.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그 시대 아동복지시설이 품고 있던 또 하나의 어두운 단면을 증언하고 있다. 어린 김용재에게 신림원의 기억은 새벽 5시에 시작됐다. 잠에서 채 깨기도 전에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불려 나왔다. 앞마당에서 뒷산 정상까지 뛰는 ‘선착순’이 거의 매일 반복됐다. 늦게 도착한 아이들은 한 바퀴를 더 뛰어야 했다. 체력 단련이라기보다 복종을 확인하는 의식에 가까웠다. 종교 교육도 강요됐다. 성경 구절을 외우지 못하면 밥을 먹지 못했다. 신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었다. 신림원 뒤편 야산은 원래 밭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산을 개간해 농토로 만들었다. 삽으로 땅을 파고 돌을 골라냈다. 배추를 심고 김장용 채소를 길렀다. 똥지게를 등에 지고 거름을 나르는 일도 아이들의 몫이었다. 농사는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시설 운영을 위한 노동이었다. 계절마다 해야 할 일은 달라졌지만, 어린 원생들이 노동력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폭력은 교사나 보모만의 몫이 아니었다. 위계질서는 원생들 사이에서도 이어졌다. 어느 날 밤 12시쯤, 선배는 어린 김용재에게 아카시아 꽃을 따오라고 시켰다. 거절할 수 없었다. 캄캄한 산길에서 꽃을 따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등에 큰 상처를 입었다. 시설 안에서는 이런 일을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멍석말이 구타도 흔했다. 여러 명이 아이를 둘러싸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퍼붓는 폭행은 일상처럼 반복됐다. 폭력은 규율이라는 이름으로, 선배의 권위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방장 선배가 한번은 3년 선배와 함께 복싱시합을 시켰다. 세 살 차이는 나이의 차이보다 더욱 가혹한 몸집의 차이였다. 시합이 아닌 사실상의 구타였다.   AI로 재현한 부여 신림원 시절 원장 집 정원을 가꾸기 위해 동원된 아이들의 강제노동 모습. 김용재 씨는 달리기를 잘했다. 특히 중장거리 종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육상선수를 해보라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초등학교 시절 시합에서 우승한 기억도 많다. 그는 운동선수가 되는 것이 어린 시절 유일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시설 안에서 끝났다. 육상부가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신림원은 그의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고등공민학교로 진학시켰다. 김씨는 지금도 그 강요된 선택을 인생의 갈림길로 기억한다. 한 아이의 진로는 적성과 꿈이 아니라 시설의 결정으로 좌우됐다. 폭력을 견디다 못한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친구 두 명과 함께 탈출했다. 세 아이는 봉천동 현대시장 주변을 떠돌았다. 시장에서 버려진 음식을 주워 먹으며 끼니를 해결했고, 밤이 되면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잠을 잤다. 집도, 돈도, 갈 곳도 없었다. 그래도 신림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유는 오래 가지 못했다. 도망친 지 일주일 만에 아이들은 붙잡혀 다시 시설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신라교육’이라는 회사 대표가 김용재 씨를 포함한 원생 세 명을 후원했다. 후원자는 아이들을 위해 돈을 보냈지만 김씨는 그 돈을 직접 받아본 기억이 없다. 후원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전달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 후원금은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돈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자신의 진로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시설은 그를 서울시립기술원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목수 일을 배웠지만 사회에 나와 안정된 삶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생활은 어려웠고 결국 그는 다시 신림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온 시설에서도 그를 기다린 것은 보호가 아니라 노동이었다. 당시는 신림원이 서울 신림동 부지를 매각하고 충남 부여로 이전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김용재 씨는 이전 공사의 노동력으로 동원됐다. 부여에 마련된 새 부지에서 터를 닦고 산을 개간하는 일을 했다. 현대연수원이 있던 자리에서 삽과 곡괭이를 들고 산비탈을 일궜다. 새로운 시설의 기반을 만드는 공사에 투입된 것이지만 그 노동의 대가는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유진수(1969년생) 씨는 신림원에서 보기 드문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경기상업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당시 경기상고는 가난한 집안 학생들에게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와 같은 학교였다. 졸업만 하면 은행이나 대기업 취업으로 이어지는 길이 비교적 넓게 열려 있었고, 상업계 최고 명문으로 손꼽혔다. 유진수 씨와 신림원 동기였던 정순영 씨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는 유한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유한양행이 설립한 학교로, 졸업 후에는 유한양행 취업까지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로서는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안정적인 미래를 약속하는 몇 안 되는 학교였다. 두 사람 모두 시설 출신이라는 한계를 딛고 스스로 미래를 바꿀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오래 가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신림원은 서울을 떠나 부여로 이전하기로 결정됐다. 아이들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는지, 장학금은 어떻게 되는지, 앞으로의 진로는 어떻게 되는지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다. 시설이 움직이자 아이들도 함께 움직여야 했다. 유진수 씨와 정순영 씨는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부여로 내려가야 했다. 신림원은 이후 ‘남송원’으로 이름을 바꿨고, 두 사람은 원하지도 않았던 홍산농업고등학교로 강제 전학되었다. 상업계 명문과 공업계 명문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하루아침에 농업계 학교 학생이 된 것이다. 그들의 적성과 꿈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서울은 국제행사를 앞두고 도시 환경을 정비한다는 명분 아래 여러 사회복지시설의 이전을 추진했다. 당시 일부 고아원과 수용시설은 도시 외곽이나 지방으로 이전 대상이 되었고, 정부는 시설 원생들을 영농후계자로 육성한다는 정책을 내세웠다. 신림원의 지방 이전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추진됐다. 하지만 정책의 명분과 달리, 그 과정에서 아이들 개개인의 삶은 철저히 배제됐다. 유진수 씨와 정순영 씨에게 지방 이전은 단순한 주소 변경이 아니었다. 어렵게 얻은 교육 기회를 잃는 일이었고, 이미 시작된 인생의 방향이 강제로 꺾이는 일이었다. 유진수 씨는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며 ‘그대로 경기상고를 다녔다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 정순영 씨 역시 유한공고를 계속 다녔다면 유한양행 취업이라는 꿈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상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국가 정책과 시설 운영의 결정 앞에서 너무 쉽게 사라졌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학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 아이의 교육권과 직업 선택권, 그리고 미래를 스스로 설계할 권리가 시설의 운영 방침과 국가 정책에 의해 얼마나 쉽게 침해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보호를 명분으로 운영된 시설에서조차 아이들의 꿈은 존중받지 못했다. 서울을 떠나는 버스에 오른 것은 단지 원생들이 아니라, 각자가 어렵게 붙잡았던 미래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정두환 정권이 88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도심에 있는 혐오시설을 강제로 지방 이주시키고 원생들을 영농후계자로 삼는다는 국가의 공식기록. 신림원을 떠난 뒤에도 정순영 씨는 시설이 자신에게 남긴 상처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회에 나와서야 그는 시설이 당연히 지급했어야 할 자립정착금조차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퇴소한 지 2년이 지난 뒤였다. 우연히 자립정착금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여러 차례 요구한 끝에 겨우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그 경험을 떠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은 사회복지의 탈을 쓰고 있었을 뿐입니다. 복지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유기고아에게 지급되는 정부지원금을 노린 시스템에 충실한 자들이었습니다. 정말 착하고 성실하게 아이들 편에 서있는 보모들은 쉽게 해고되기도 했습니다. 운영자의 지시대로 아이들을 통제하지 않았다는 이유일 겁니다. 이는 특정시설의 문제가 아니라, 대형시설이든 소형시설이든 본질은 비슷합니다. 아이들을 보호의 대상으로 본 게 아니라 비즈니스 대상으로 봤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아이들은 가장 중요한 청소년기에 자기 재능을 발견하고 키울 기회를 빼앗깁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선의를 내세우고 거기에 권력까지 더해지면 엄청난 특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으니까요. 시설을 떠난 뒤에도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고아라는 이유만으로도 벽이 있었습니다. 공군에 지원했지만 결국 떨어졌습니다. 배경도 없고, 돈도 없고, 기술도 없는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 갈 곳이 없습니다. 남자들은 조직폭력배 세계로 흘러가고, 여자들은 유흥업소로 들어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습니다. 아이들이 원해서 그런 삶을 산 게 아닙니다. 사회가 그렇게 몰아간 겁니다.” 신림원의 경우 최초 설립자 한모 씨는 정모 씨에게 신림원을 매각했고 정모씨는 이후 부여로 이전하면서 부동산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이들이다. 고아원 운영자들이 선의보다 사업적 관점으로 접근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한편, 정모씨는 부여 신림원(남송원)에서 다양한 사업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이후 신림원은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서 자진폐쇄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신림원은 단순한 아동복지시설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새벽부터 뛰어야 했고, 성경을 외우지 못하면 굶어야 했다. 산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고, 새로운 시설을 세우기 위한 토목 작업에도 동원됐다. 운동선수의 꿈은 시설의 결정으로 사라졌다. 탈출은 자유를 향한 일탈이 아니라 폭력과 강제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퇴소 이후에도 시설 운영자에게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고, 자립 기반 없이 사회로 내몰렸다. 동시에 시설 내부에서는 반복적인 폭행으로 생명을 잃은 아이들까지 있었다. 보호를 위해 존재해야 할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노동 착취의 현장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자신의 삶으로 증언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다수의 고아들이 고아원을 퇴소한 이후 사회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는 부분이다. 당장 목돈이 필요한 고아들을 노리는 검은 손들은 고아들이 성실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명의를 빌려주면 목돈을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십 개의 대포통장을 만들어준 사기꾼이 되기도 하며 정착금을 노린 시설 출신 선배들로 인해 순식간에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한 번 범죄의 늪에 빠지면 조언해 줄 부모 등의 도움을 받지 못하기에 사실상 회생이 어려운 사람도 많다. 교도소 등의 재소시설 수감자 50% 정도가 고아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쪽방촌 거주자나 노숙자의 70%가 고아원 출신이라는 비극적인 통계도 있다. 이후 그들은 무연고자 사망으로 쓸쓸히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또한, 시설에서 당한 폭력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피해자도 상당수에 이른다. 몇 년 전 ‘고아신원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든 유진수씨는 현재 양극성 정동장애라는 신경정신과적 질병을 앓고 있다. 이는 시설 출신자 대부분이 겪고 있는 아픔이기도 하다. 그에 의하면, 본인이 머물렀던 신림원 출신 무연고자 조기 사망의 비율이 20~35% 정도로 볼 때, 고아시설 출신자 약 100만명 중 우울증 등의 자살로 20만~35만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에서 아직도 펼쳐지고 있는 고아들의 열악한 삶의 모습이다.이득신 시민기자 dsshine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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