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를 내려놓고, 세계를 작곡하라 [사회혁신] 어떤 방식으로 지각을 구성하느냐에 따라 하나의 그림이 토끼로도 오리로도 보이게 된다. 나무위키
요즘 영상 매체에서 접하는 정치인들의 눈빛과 표정이 영 불편하다. 분노와 적의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민들레에 기고한 두 편의 글에서 작가 유시민의 ‘필연’과 ‘정화’, 대통령 이재명의 ‘실용주의’를 우려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화면 속 인간 장동혁과 인간 유시민의 눈빛이 다시 떠오른다. 불타는 듯하지만 흔들리는 눈빛에서 실존적 두려움을 읽는다. 물론 나의 감각이다. 그러나 ‘정치가’라면 분노를 드러내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좋은 정치가’라면 이 세상에 없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코끼리’ 우화에 대한 또 하나의 생각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유명한 우화가 있다.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이라고 말한다. 코를 만진 사람은 쟁기라고 주장한다. 귀를 만진 사람은 부채라고 우긴다. 자신이 경험한 부분을 전체라고 믿으며,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강변한다. 우리는 모두 장님이다. 큰 배움을 주는 우화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
그런데 이 우화에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다. 누군가는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알고 있다는 가정이 그것이다. 코끼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가 전체를 남김없이 파악하고 마침내 정답을 선언할 수 있다는 확신이 문제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정녕 세계 전체를 내려다보는 전지적 관찰자의 위치에 설 수 있을까.
오래전 미국과 한국의 정치권에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저자는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다. 상대의 주장을 부정할수록 오히려 상대의 프레임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그러므로 상대의 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자신의 프레임을 만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레이코프가 말하는 프레임은 단순한 관념이나 말의 기술이 아니다. 그의 프레임은 우리의 몸과 경험에 뿌리내린 인식의 틀이다. 중요한 것은 ‘몸’과 ‘경험’이다. 그는 마크 존슨과 함께 발전시킨 체화된 실재론을 통해 인간의 인식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몸으로 세계와 만나고 경험 속에서 의미를 구성한다. 정치적 판단 역시 논리와 객관적 사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몸에 밴 경험과 은유, 가치와 감정이 함께 작동한다.
질문을 한 번 더 바꿔보자.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코끼리를 다르게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코끼리와 함께 살아가는 세계 자체를 다르게 만들 수는 없을까?
물론 실제 코끼리를 인간의 의지대로 만들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코끼리 역시 우리와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다. 우리는 코끼리를 경험하지만, 코끼리도 우리를 경험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세계는 이미 완성된 작품이 아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변화한다. 물론, 이 말을 하는 나 역시 그 과정에 연루되어 있다.
오늘날 정치도 코끼리의 진짜 모습을 둘러싼 논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서로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한다. 상대의 오류를 폭로한다. 자신의 관념과 이념으로 다른 이념의 소유자를 저주한다. 그러나, 누가 옳은가를 다투고 누가 더 강력한 프레임을 만드는가를 경쟁하는 것만으로는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없다. 이제는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
필연의 독단, 실용의 도그마
앞선 두 편의 글에서 나는 유시민의 ‘필연’과 ‘정화’, 이재명 정부의 실용주의를 문제 삼았다. 서로 다른 문제였지만 한 가지 공통된 우려가 있었다. 독단과 도그마가 그것이다.
역사의 방향을 읽고 미래를 전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 경험과 교훈도 필요하다. 그러나 역사가 반드시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그 방향성을 필연으로 믿고 척도로 제시하는 순간, 다른 선택은 오류가 된다.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지워지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이념보다 현실을 중시한다. 실제적 경험에 기초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성과를 중시한다. 특히 정치에는 그런 능력이 절실하다. 그러나 실용주의도 도그마가 될 수 있다. 경제성장, 산업경쟁력, 기술혁신, 주가 상승 등 무엇이 유용한가를 판단하는 척도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자신의 경험에 매몰되어 다른 경험을 무시한다면, 실용주의는 ‘실용’의 취지와 달리 더욱 강퍅한 독단이 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세계적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가의 위기는 국민의 생존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존이 곧 삶의 목적이 될 때,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더 성장하기 위해 살아남고, 다시 살아남기 위해 성장해야 한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어쩌자는 것인가?
인간 사물 동맹 브뤼노 라투르
비판에서 구성으로, 세계를 작곡하라
하나의 유령이 유럽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창조적 구성주의(compositionism)라는 유령이다. 근대주의 세계의 모든 권력이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1947-2022)가 2010년에 발표한 「구성주의 선언을 위한 시론(An Attempt at Writing a Compositionist Manifesto”)」의 한 대목이다. 라투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떠올리며, 자신의 선언문을 이런 식으로 시작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이 시론에서 라투르는 19세기의 『공산당 선언』을 빌려 21세기 새로운 철학의 방향으로 ‘구성주의(compositionism)’를 제시한다.
공산당 선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라투르의 compositionism은 기존의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연결되지만, 훨씬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식과 사물,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설명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질적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갈 공동세계를 어떻게 잘 구성할 것인가를 묻는다. 또한 composition에는 서로 다른 것을 함께 놓고 엮는다는 뜻도 있고, 음악의 작곡과 회화에서의 창작과 같은 의미도 담겨 있다. 조정과 협상, 신중함과 돌봄도 포함된다. 그렇다고 그의 ‘작곡’은 언제나 화음(和音)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충돌과 불협화음, 선택과 포기가 뒤따르기도 한다. 잘못 구성된 것은 해체하고 다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창조적 구성주의’로 옮긴 이유이다.
그렇다면, 라투르는 왜 이런 낯선 말을 제안했을까. 무엇보다 진보적 지식인의 금과옥조인 ‘비판’의 사유를 문제 삼기 위해서다. 근대세계에서 비판은 강력한 무기였다. 거짓을 폭로했다. 낡은 권위를 무너뜨렸다. 억압적인 질서에 도전했다. 근대문명의 수많은 성취도 비판의 힘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부수는 능력과 만드는 능력은 다르다.
라투르에 따르면 비판은 망치가 되어 우상을 깨뜨릴 수는 있다. 그러나 망치만으로 집을 지을 수는 없다. 낡은 세계를 무너뜨리는 일과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망치로는 파괴와 조롱을 할 수 있어도 수선하고 돌보며 다시 잇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라투르에 따르면, 비판은 이 세계 저편의 유토피아를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창조적 구성주의의 관점에는 그러한 완성된 바깥세상이 없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에서부터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여기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성’, 언젠가 실현될 수도 있는 ‘잠재성’을 떠올린다.
라투르의 제안은 명료하다. ‘비판’에서 ‘구성’으로. 비판을 조금 더 세련되게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폭로하고 해체하는 데 머물지 말자는 말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을 엮어 공동세계를 창조적으로 구성하자는 말이다. 망치만 휘두르지 말고 ‘작곡’도 하자는 것이다. 투쟁을 그치자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위해, 누구와 함께 싸울 것인지 다시 구성하자는 말이다.
한국사회의 민주화. 1987년 6월 26일 부산에서 열린 국민평화대행진 때의 시위 장면. 나무위키
한국의 산업화를 상징하는 이미지. 위키백과
좌표와 척도의 창조적 구성
다시 현실 정치로 돌아가자. 유시민의 ‘필연’과 이재명의 ‘실용’은 서로 다른 언어다. 그러나 두 입장은 공통의 질문 앞에 놓인다. 우리는 무엇을 진보라고 부르고, 무엇을 성취라고 판단하는가? 그리고 그 방향과 척도는 누가 정하는가? 서로 격렬하게 다투지만, 정작 우리가 어떤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묻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참으로 역동적인 사회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한국의 근대를 이끌어온 두 가지 중요한 좌표다. 전자가 물질적 풍요를 향한 방향이었다면, 후자는 정치적 자유와 정당성의 원리였다. 불과 몇 세대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 세계적인 산업·기술 강국으로 도약했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시민들은 광장으로 향했다. 놀라운 성취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
바로 이 문제는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메가 프로젝트’ 앞에서 구체적인 질문이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전북특별자치도 새만금에서는 현대자동차그룹의 AI 데이터센터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새만금개발청은 2026년 9월 건축심의 착수를 발표했고, 2027년 착공 계획을 제시했다. 전북특별자치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업이다. 그러나 투자 규모만으로 그 성취를 판정할 수 있을까? AI 데이터센터로 인해 변형될 바다와 토지와 생태계,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민과 다른 생명들의 조건은 어떤 척도로 판단할 것인가?
나는 새만금 바다에 수상 태양광을 설치하는데 공감할 수가 없다. 윤슬, 즉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엔 공짜가 없다. ‘전기’를 얻는 대신 ‘풍경(風景, 바람과 볕의 아름다움)’을 잃게 된다.
사업에 대한 찬반을 미리 정해 놓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척도 자체를 누구와 함께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근대의 중요한 성취다. 그러나 그것이 삶과 우주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우주, 친구라는 우주, 덕후들의 우주, 게임의 우주, BTS(방탄소년단)의 우주, 그리고 ‘신명나는 우주’ 속에서도 살아간다. 그 세계들은 제각기 다른 경험과 가치를 품고 있다. 사랑과 우정, 놀이와 돌봄, 헌신과 신명은 성장률이나 선거의 승패만으로 재단할 수 없다. 이 작은 우주들 역시 고립되어 있지 않다. 서로 부딪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우리의 삶을 만들어간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생태위기, 생명위기, 인간위기가 그것들이다. 생태위기는 끝없는 성장을 당연하게 여겨온 발전의 척도를 흔든다. 생명위기는 인간의 생존과 비-인간 생물종의 존속을 비롯해 생명의 지속가능성과 그 조건을 위협한다. AI가 던지는 인간위기는 노동과 지능, 판단과 정치적 주체성, 나아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 자체를 다시 묻는다. 이러한 위기는 기존 좌표의 목표점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서 해소될 수 없다. 좌표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창조적 구성주의’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 좋은 목표를 선언하는 철학자나 새로운 비전을 선포하는 정치 지도자를 기다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안다고 주장하는 또 하나의 전지적 관찰자에게 미래를 맡기는 셈이다. 새로운 좌표와 척도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만나고 충돌하고 협상하는 경험 속에서 구성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던 가치와 성취의 의미도, 그것을 판단하는 우리 자신도 달라질 수 있다.
‘미래’는 없다, ‘도래할 가능성’은 있다
근대인에게는 언제나 미래(future)가 있었지만, 그것은 뒤돌아보며 과거를 도망치는 사람의 기묘한 유토피아적 미래였다. 최근까지 그들에게는 몸을 돌려 앞으로 다가오는 사물들의 형상, 곧 내가 ‘도래할 가능성(prospect)’이라고 부르는 것을 향할 기회가 없었다. 생태위기가 이제 분명히 보여주듯, 이 두 단어를 사용한다면 인간의 ‘미래’와 ‘도래할 가능성’은 서로 거의 닮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끝내 ‘미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는 바로 그때 갑자기 수많은 도래할 가능성이 있음을 점진적으로 발견한다는 점이다.” (브뤼노 라투르, 「구성주의 선언을 위한 시론」. 강조는 필자)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브뤼노 라투르
근대인이란 물론 ‘우리’다. 우리는 굶주림과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 노력과 성취를 부정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라투르가 문제로 삼는 것은 그러한 과거로부터의 탈출을 곧 미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태도다. ‘발전’과 ‘해방’이라는 목표를 앞에 세워 놓았지만, 기후변화와 생태파국, AI와 디지털기술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낯선 존재들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필연’의 정치와 실용주의의 ‘도그마’ 역시 이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과거로부터의 도망을 멈추자! 우리가 미리 정해놓은 미래가 유일한 미래라는 믿음과 결별하자!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던 것들, 이미 곁에 있지만 보지 못했던 존재들, 앞으로 다가올 사물들의 운명을 탐색하자! 라투르의 선언을 빌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생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정답을 찾아내는 일만은 아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사회운동도 마찬가지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일이다. 우리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라는 성취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성취가 모든 삶의 방향과 판단의 척도를 독점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이미 서로 다른 삶의 우주들이 중첩되는 곳에서 살아간다. 앞으로 도래할 가능성은 그 우주들 바깥의 완성된 이상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만나고 충돌하고 협력하는 바로 이 세계 안에서 열린다.
주요섭 (사)밝은마을 생명사상연구소대표
망치를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비판의 망치를 내려놓는다고 정치적 싸움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망치만으로는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무엇을 위해, 누구와 함께 싸울 것인지부터 다시 선택해야 한다. 과거를 부수는 일에만 머무르지 말자. 다가오는 사물들을 마주하며, 또 다른 세계를 작곡하자.주요섭의 살림정치 JYS@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