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흄, 기적을 의심하고 권력의 밑바닥 캐묻다 [사람들] 18세기 유럽 어딘가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소문 때문에 대학 교수 자리를 두 번이나 놓쳤고, 죽는 순간까지도 천국이 있다면 거기서 폭군들을 계속 골탕 먹이겠다 는 농담을 남길 만큼 죽음 앞에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평생 회의주의라는 무기 하나로 종교, 이성, 권력의 근거를 차례로 캐물은 철학자다.
앨런 램지가 1766년에 그린 데이비드 흄 초상화(위키피디아)
이성은 왕이 아니라 하인이다
흄은 스물여덟 살에 『인간 본성론』을 내놓으며 당대 지식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는 인간이 이성으로 세상을 판단한다는 통념을 뒤집어, 사실은 욕망과 감정이 먼저이고 이성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도구일 뿐이라 주장했다. 원인과 결과라는 것도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경험을 반복해가며 만든 습관일 뿐이라 했다. 해가 내일도 뜬다는 보장은 사실 어디에도 없다는 이야기다. 아침마다 해가 뜨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이없는 소리였겠지만, 이 발상은 훗날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독단의 잠에서 깨웠다 고 상찬할 만큼 서양철학 전체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1754년 출간된 《영국사(The History of England)》 제1권에 실린 흄의 판화(위키피디아)
기적을 믿으려면 증거부터 가져와라
흄이 가장 짓궂었던 대목은 종교 비판이다. 그는 기적이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인데, 자연법칙은 수많은 반복 경험으로 검증된 것이고 기적 목격담은 대개 몇몇 사람의 말뿐이니, 상식적으로 어느 쪽을 믿는 게 합리적이겠냐고 되물었다. 요즘 말로 옮기면 특별한 주장에는 특별한 증거가 필요하다 는 것이다. 이 문장 하나로 그는 성직자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고, 정작 자신은 옥스퍼드도 소르본도 아닌 도서관 사서 자리로 생계를 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도서관에서 방대한 자료를 읽으며 훗날 여섯 권짜리 『영국사』를 완성했으니, 밥그릇을 뺏은 자들이 결과적으로 명저 한 질을 선물한 셈이다.
에든버러 올드 칼튼 묘지에 있는 로버트 아담 설계의 데이비드흄의 영묘.(위키피디아)
권력은 총이 아니라 여론에서 나온다
흄의 정치사상 가운데 오늘 되새길 대목은 따로 있다. 그는 짧은 글 「정부의 첫째 원리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다스림을 받는 쪽이 언제나 수로는 더 많고 힘도 더 세다. 그런데도 소수가 다수를 다스릴 수 있는 건 순전히 여론 덕분이다. 아무리 사나운 군주라 해도 결국은 자기 병사들의 마음을 얻어야 그 병사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총칼을 쥔 자도 결국 총칼을 쥔 부하들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이야기다. 이집트의 파라오든 로마의 황제든 예외가 없다고 흄은 못 박았다. 권력의 뿌리가 무력이 아니라 여론이라는 이 통찰은, 겉보기엔 견고해 보이는 독재조차 여론이 등을 돌리는 순간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에든버러 로열 마일에 있는, 알렉산더 스토다트가 조각한 흄의 동상(위키피디아)
파리의 계몽주의자들과 나눈 우정과 배신
흄은 평생 좋은 벗들을 두었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와는 절친한 사이였고, 흄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스미스는 그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혜와 미덕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 이라 애도했다. 반면 파리 체류시절 만난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와의 우정은 파국으로 끝났다. 흄이 영국으로 데려와 은신처까지 마련해줬는데, 루소는 도리어 흄이 자신을 음해하는 음모를 꾸민다며 절연을 선언했다. 계몽의 시대에도 사람 마음은 이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흄 자신의 삶이 증명한 셈이다.
앨런 램지(Allan Ramsay)가 1754년에 그린 데이비드 흄 초상. 사람들은 가장 확신에 차 있고 오만할 때 흔히 가장 큰 오류를 범한다. 그들은 적절한 숙고와 판단 유보, 오직 이것만이 그들을 가장 터무니없는 어리석음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데도,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기 때문이다. 『도덕 원리에 관한 탐구(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1751년) 결론 제1부(위키피디아)
한국에 남기는 물음
흄의 통찰을 오늘 한국에 대입해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여럿 보인다. 첫째, 여론이 곧 권력의 기초라는 명제다. 2024년 12월 3일 밤 선포된 비상계엄은 병력과 총구를 앞세웠지만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 본회의장에 모였고,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고, 명령을 받은 군인들조차 총구 겨누길 주저했다. 흄이 말한 대로, 힘은 늘 다스림을 받는 쪽에 있었고 권력자는 결국 그 힘을 빌려줄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둘째, 특별한 주장에는 특별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흄의 태도다. 부정선거니 반국가세력이니 하는 비상한 주장을 앞세워 비상한 조치를 정당화하려 했던 시도들이 있었다. 흄이라면 딱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어디 있느냐?” 근거 없는 확신으로 국가의 명운을 건 도박을 벌인 이들에게, 공소시효 없는 역사의 법정은 언젠가 반드시 증거를 요구할 것이다.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있는 데이비드 왓슨 스티븐슨의 데이비드 흄(왼쪽)과 애덤 스미스 조각상(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