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전 손부터 씻으라’…소독이 수많은 목숨 살려 [뉴스] 고름을 칭찬하던 시대
수술대에 눕는 일이 저승 문턱을 넘는 것과 다르지 않던 때가 있었다. 19세기 중엽 영국 병원에서는 수술 자체보다 수술 뒤 감염이 더 무서웠다. 상처가 곪고 썩어 패혈증으로 숨지는 환자가 많았다. 당시에는 상처에서 고름이 나오는 것을 칭찬할 만한 고름(laudable pus)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곪는 것이 치유과정이라는 생각이 오래 남아 있었던 것이다.
외과의사들의 위생관념도 지금과는 딴판이었다. 피가 묻고 굳은 수술복을 입고 수술하는 것이 오히려 노련함의 표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환자에게 병원은 병을 고치는 곳인 동시에 병을 얻는 곳이기도 했다. 이 상식을 뒤집은 사람이 조지프 리스터(Joseph Lister, 1827~1912)였다.
1902년의 리스터(위키피디아)
퀘이커집안에서 현미경을 만나다
리스터는 1827년 영국 에식스의 업턴에서 퀘이커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 잭슨 리스터(Joseph Jackson Lister, 1786~1869)는 와인 상인이면서 뛰어난 광학 연구자였다. 현미경 렌즈의 색수차를 줄이는 기술을 개발해 1832년 왕립학회 회원이 됐다. 아버지에게서 과학적 호기심을 물려받은 리스터는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당시 비국교도인 퀘이커교도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53년 에든버러로 옮겨 외과의사 제임스 사임(James Syme, 1799~1870) 밑에서 일했고, 1856년 스승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결혼 뒤 퀘이커 신앙에서 벗어나 국교인 성공회로 옮겼다. 아그네스는 훗날 남편의 연구와 기록을 도왔다.
조셉 잭슨 리스터(위키피디아)
열한 살 소년의 다리
1860년 글래스고대학교 외과교수가 된 리스터는 병동에서 끊임없이 썩어가는 상처를 보았다.
그때 프랑스의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가 발효와 부패가 미생물과 관련 있다는 연구를 내놓고 있었다. 글래스고의 화학자 토머스 앤더슨(Thomas Anderson, 1819~1874)은 파스퇴르의 연구를 리스터에게 알려주었다. 앤더슨은 또한 하수 처리에 석탄산(carbolic acid)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전했다.
리스터는 생각했다. 상처를 썩게 만드는 것이 미생물이라면, 그 미생물을 죽이면 되지 않을까.
기회는 1865년 8월 찾아왔다. 열한 살 소년 제임스 그린리스(James Greenlees)가 수레에 치여 다리가 부러지고 뼈가 피부 밖으로 튀어나온 개방성 골절로 실려 왔다. 당시 이런 상처는 감염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리스터는 석탄산 용액을 적신 천으로 상처를 덮고 치료했다. 상처는 심하게 곪지 않았고 소년은 약 6주 뒤 걸어서 병원을 나갔다. 리스터는 자신의 치료법을 환자들에게 계속 적용하고 결과를 기록했다. 1867년 『랜싯(The Lancet)』에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의 자료에서는 절단술 사망률이 소독법을 적용하기 전 약 46%에서 이후 약 15%로 떨어졌다. 완벽한 통계는 아니었지만 변화는 무시하기 어려웠다.
히친(Hitchin)에 위치한 로드 리스터 호텔(Lord Lister Hotel) 은 과거 아이작 브라운과 벤자민 애벗이 운영하던 아카데미였으며, 리스터는 1838년부터 1841년까지 이곳에서 수학했다(위키피디아)
손을 씻으라는 사람
리스터보다 먼저 손 씻기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주장한 의사도 있었다. 헝가리 출신 이그나츠 제멜바이스(Ignaz Semmelweis, 1818~1865)는 1847년 빈의 병원에서 의사와 의대생들에게 염소 용액으로 손을 씻게 했다. 그 결과 산모들의 산욕열 사망률이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동료들은 그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멜바이스는 의료계에서 고립됐고 1865년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가 세상을 떠났다. 제멜바이스가 손부터 씻으라 고 했다면 리스터는 왜 환자의 상처가 곪는지를 설명하고 이를 막는 방법을 체계화했다. 두 사람의 발견은 훗날 현대 감염관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
1849년, 현미경을 직접 설계했던 아버지 J. J. 리스터가 아들 리스터에게 건네준 현미경(위키피디아)
‘당나귀 기관’도 버렸다
리스터는 처음에는 수술실에 석탄산을 분무하는 방법까지 사용했다. 덩치 큰 분무기는 학생들에게 당나귀 기관 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871년에는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의 어깨에 생긴 농양을 치료할 때도 리스터의 석탄산법이 사용됐다.
그러나 리스터는 자신의 방법을 끝까지 고집하지 않았다. 공기 전체를 소독하는 분무법의 효과에 의문이 커지자 결국 그 방법을 포기했다. 독일의 에른스트 폰 베르크만(Ernst von Bergmann, 1836~1907) 등이 증기를 이용한 기구 소독법을 발전시켰고,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 1843~1910)는 질병과 특정 세균의 관계를 밝히는 세균학을 발전시켰다. 과학자는 자신이 처음 발견한 답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더 나은 답이 나오면 자신의 답을 고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리스터가 보여준 셈이다.
조지프 리스터, 1855년경(위키피디아)
의사에서 귀족으로
리스터의 명성은 결국 영국 전체를 넘어섰다. 1883년 준남작이 됐고, 1897년 남작 작위를 받아 귀족원에 들어갔다. 왕립학회 회장을 지냈고 1902년 공로훈장(Order of Merit)을 받았다. 그의 이름을 딴 구강청결제 리스테린(Listerine)도 훗날 등장했다. 리스터는 1912년 2월 10일 켄트의 월머에서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올드 로열 인퍼머리(Old Royal Infirmary, 구왕립병원)에서 동료들과 함께한 리스터(위키피디아)
한국에서 리스터를 다시 읽는다
리스터의 이야기를 오늘 한국에서 읽으면 석탄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보인다. 그가 한 일은 먼저 왜 환자가 수술 뒤에 죽는가 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원인을 추적하고, 방법을 바꾸고, 결과를 숫자로 기록했다.
2015년 한국의 메르스 사태에서는 최종적으로 186명이 감염되고 38명이 숨졌다. 병원이 치료의 공간인 동시에 감염 확산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의 밤 이후의 한국사회에도 리스터의 질문은 유효하다. 절차가 제대로 지켜졌는가. 기록은 남아 있는가. 숫자는 공개됐는가. 잘못이 드러났을 때 고칠 수 있는가. 국회의 표결과 공개된 기록, 독립적인 조사와 검증은 정치의 손 씻기와 같다. 평소에는 귀찮고 번거로워 보이지만 그것을 생략하면 나중에는 더 큰 곪음을 치러야 한다. 그리고 제멜바이스를 기억해야 한다.
조직 안에서 손부터 씻자 고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는가. 불편한 경고를 한 사람을 문제의 원인으로 몰아세우지는 않는가. 리스터의 진짜 위대함은 석탄산을 발견한 데만 있지 않다. 그는 기록했고, 숫자로 증명했고, 자신이 만든 방법도 버릴 줄 알았다. 손을 씻는 일, 기록하는 일, 검증하는 일, 틀리면 고치는 일. 너무 평범해서 뉴스가 되지 않는 이런 일들이 때로는 사람의 목숨을 살린다. 병원도 사회도 곪은 뒤에 고치는 것보다, 곪기 전에 손부터 씻는 편이 훨씬 낫다.
1856년 4월에 촬영된 조지프 리스터 부부의 결혼 사진(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