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모니터링&뉴스레터   페투미X사회혁신
페투미X사회혁신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다석의 한글철학 (51)] 류영모와 함석헌, 전라도 순례기(Ⅰ)

[다석의 한글철학 (51)] 류영모와 함석헌, 전라도 순례기(Ⅰ)
[칼럼]
류영모도 이현필과 함께 이세종이 살던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를 둘러보았다.” _ 박영호 지음,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교양인, 2012), 461쪽에서.   그림1)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에 있는 동광원 분원 모습이다. 계명산 자락에 있어 ‘계명산 동광원’으로도 불렸다. 현재는 기와집으로 다시 지었다. 이 사진은 초기 모습이다. 동광원은 1950년에 설립된 사회복지 기관이자, 기독교 수도공동체다. ‘기독교동광원수도회’라고도 한다. 이야기 한 토막 다석 제자 박영호는 1972년 9월 18일 이현필이 창설한 동광원 벽제 분원에 스승을 모시고 수련회에 참석했다. 동광원에서 여든 둘 다석을 강사로 초청한 까닭이다. 다석은 밤 10시부터 코를 골면서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새벽 3시에 일어났다. 박영호도 따라 일어났다. 둘이 함께 맨손 체조를 하고는 손바닥으로 몸 살갗을 문질렀다. 냉수 마찰 대신 살갗을 문질러 피돌리기를 한 것이다. 다 마치고 방을 거닐던 스승이 털썩 주저앉았다. 박영호는 스승이 뇌빈혈로 쓰러지는 줄 알았다. 퍽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하는 말이, 그도 지금쯤은 일어났을 터인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 생전에 돌아오려는지.” 였다. 박영호는 다석이 ‘그’라고 한 이는 물을 것도 없이 신천 함석헌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신천을 생각한 것이라고. 그러면서 얼마나 높고 깊은 사랑인지 말을 보탤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다석은 일지에 이렇게 써 놓았다. 오랜 벗이여 아주 갔는가. 다시 돌아올 길은 없는가. 나는 허전하구나. 한 사람 봤구나 터니 본 처음이 잘못이던가.”1) 이 글은 다석이 신천을 찾아가 직접 건네 준 편지였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으니 편지를 건넨 날이 마지막이었다. 다석은 차마 말로 할 수 없어 간단히 글로 써서 주었다. 신천은 다석 1주기 추모 모임에서 이 내용을 공개했다. 1982년 2월 3일 구기동 스승 집에서. 편지는 이렇다.2) 언(仁)을 찾아 살아온 지가 육십 년이 되었는데 오늘 문득 아주 멀쩡히 사람 하나 가고 말았나. 벗이여 갔는가? 오랜 벗이여 아주 갔는가? 다시 돌아올 길은 없는가. 한 사람 봤구나 더니 본 첨 잘못이던가?”   그림2) 1980년대 노자 강연을 하던 때의 신천 함석헌이다. 칠판에 ‘씨-民’이란 글자가 보인다. 스승 다석이 ‘친민(親民)’의 ‘민(民)’을 ‘씨ᄋᆞᆯ’로 풀었다. 신천은 다석이 푼 ‘씨ᄋᆞᆯ’로 씨ᄋᆞᆯ의 소리 를 펴냈다. 편지 공개에 앞서 신천은 내가 먼저 말씀드리지요. 아마 내가 먼저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선생님 영 앞에 또 여러분 모이신 앞에서 내가 화해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라며 말을 텄다. 그러면서 내가 잘못한 것을 솔직히 그대로 인정”한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다석이 하늘로 돌아간 뒤에 신천은 스승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를 구했다. 참회는 1988년 3월 11일 여성전도회관에서 열린 88살(米壽) 기념 모임에서도 있었고, 그달 13일 서울 혜화동 도산기념회관 강당에서 열린 다석 추모 모임에서도 있었다. 3백여 명의 청중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며 참회를 하였다.3) 신천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운영했다. 이때 여성문제가 터졌고, 1960년 초에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그가 1960년에 번역한 『예언자』에 머리말 대신 ‘옮긴 사람의 말’을 수록했다. 길게 쓴 ‘옮긴 사람의 말’은 참회록이었다. 여기에 고백하기를 그리하여 석가도, 예수도, 공자도, 맹자도, 노자도, 장자도, 톨스토이도, 간디도, 남강도, 내촌도, 다 내가 이름도 부를 수 없이 되었다. 이젠 나는 무슨 교도도, 누구의 제자도, 누구의 친구도 될 자격이 없고 다만 한 개 배 깨어진 자다.”라고 낮게 엎드렸다. 또 독일 유학 중인 안병무에게 보낸 1960년 9월 30일 편지에는 낡은 나를 완전히 장사 지내고 새로 나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외롭습니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한테 가, 그들을 거쳐 인도로 가서 내 마음의 정화를 힘써볼까 합니다. 그러니 외국 간다 하여도 신이 나는 것도 아니요 한낱 연옥(煉獄) 걸음입니다.”라고 썼다. 다석도 신천을 멀리했다. 그러니 신천은 기댈 곳도 갈 곳도 없었다. 심지어 다석은 신천이 강연하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혼쭐’을 내 준적도 있다. 그 뒤로 십여 년이 흘렀다. 신천은 내가 빠진 밑바닥, 지옥 바닥, 멸망한 자만이 있”는 자리, 내가 스승이 없지 않고 친구도 없지 않았으나, 아무도 그 이름들을 가지고 나를 찾아 주는 이 없”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죽이고 다시 일어섰다. 1970년 4월 그가 창간한 『씨ᄋᆞᆯ의 소리』는 제나를 죽이고 얼나로 깨어난 신천이 ‘제소리’를 터트린 사건이었다. 겉나․좀나(小我)를 깨고 속나․큰나(大我)로 돌아온 사건이었다. 이때 그는 오롯한 ‘맨사람’이었다. 속사람으로, 참사람으로, 씨ᄋᆞᆯ로 깨끗하게 ‘씻어난 이’었다. 그는 그렇게 세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권력에 맞섰다. 그가 칼릴 지브란을 두고 그는 그저 산 사람이요 살잔 사람이었다. 너희가 나를 구태여 이름을 짓는다면 ‘나는 살기 주의자(Lifeist)다’ 했다.”고 외쳤듯이, 그 외침 그대로 신천도 산 사람이요 살잔 사람이었다. ‘살기 주의자’로 맞섰다. 그런 그를 다석은 그리워했다. 그렇게 내내 ‘한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하늘로 돌아갔다. 이런 ‘그리움’을 잊을 리 없는 신천은 ‘화해’를 청하며 눈물로 참회를 한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둘 사이에 무엇이 있길래 이토록 서로를 그리워 한단 말인가! 오산학교에서의 만남은 고작해야 1년이요, 그 뒤로 『성서조선』을 매개로 이런저런 모임이 있었다고 해도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서 둘만의 인연이 깊어지기 어렵다. 글쓴이는 이치석이 쓴 『씨ᄋᆞᆯ 함석헌 평전』을 보다가 무릎을 쳤다.   그림3) 다석과 신천은 1947년 4월 광주와 전라도 일대를 한 달간 순례했다. 이공(李空) 이세종이 살면서 기도했던 곳, 마지막 숨을 거뒀던 곳들을 걸어 다녔다. 전남 화순에 있는 화학산 일대가 그곳이다. 이곳에서 이현필은 이세종을 만났다. 안내는 이현필이 했다. 이 순례길이 다석과 신천을 사상의 밀월 관계로 만들었다. 함께 걸었던 순례가 있었다 1947년 4월, 다석과 신천은 한 달간 광주와 전라도 일대를 여행했다. 이치석은 평전 뒤에 붙인 함석헌 연보에 스승 유영모와 함께 한 달간 여행을 함”이라 썼고,4) 10년 뒤에 새로 고쳐 쓴 평전에는 1947년(47세) 삼판선을 넘다/ 유영모와 한 달간 전라도 일대를 여행하다/ 하루 한 끼 식사를 시작하다/ 를 쓰다”라고 했다.5) 이 여행은 ‘순례’였다. 순례였으므로, 두 사람 속알이 한꼴로 한층 깊어진 ‘사건’이었다. 더불어 느끼고 체험한 순례는 이들의 뒷날을 크게 바꿨다. 그렇지만 순례의 나날 무늬를 새겼던 그날들은, 그 순간들은 뒷날이 막막한 끄트머리였다. 앞뒤 없이 꽉 막힌 시간의 끄트머리. 도무지 하루 앞을 가늠하기 힘든 끝 날들이요, 그래서 머리를 들이밀며 갈 수밖에 없는 ‘하루살이’였다. 그 하루를 ‘오! 늘살이’로 바꿔야 했다. 순례는 그런 끄트머리에 뒷날을 열어젖히고 길을 냈다. 실제로 어느 뒷날 함석헌은 이렇게 고백했다. 삼팔선을 넘을 때 내 맘도 분명 한 선을 넘었고, 와서는 한편 스승님을 모시고 저으기 생각을 파가는 동안에 어둔 맘에도 얼마쯤 뚫린 것이 있었다. 세상은 저 갈대로 가는 동안 나는 역사를 고쳐 바라고, 인생을 고쳐 씹고, 성경을 고쳐 읽게 되었다.”6)고 말이다. 우리는 이미 두 사람이 살다간 수많은 뒷날의 무늬를 알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늙어갔고 우뚝 섰으며 어떤 목소리를 남기고 또 어떤 글을 새겼는지 알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하늘로 돌아간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이 남긴 자취는 너무도 뚜렷하잖은가. 그런데 처음이었을 한 달간의 ‘순례기’는 텅 비어있다. ‘여행했다’는 사실만 있고 순례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 그 4월은 불안하고 불투명한 시간 속에서 작심하고 이뤄진 스승과 제자의 첫 ‘동행순례’였다. 서로가 서로를 늘 그리워 그리던 삶이었으니 얼마나 가슴 떨리는 순례였을까! 앞뒤 막막한 날들을 뚫어 새 길을 훤히 연 빛고을 순례길. 이들의 순례는 깜깜한 미래를 밝히고 새로운 길을 여는 노둣길이었을 테다. 장자가 말하기를 참사람은 발바닥으로 숨 쉬고 뭇사람은 목구멍으로 숨 쉰다.”라고 하지 않았던가.7) 그러니 그들의 순례길은 낮고 낮은 데로 내려가, 아니 속의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바탈(天命:性)’8) 소리를 들으려 했던 ‘하늘길’이었을 테다. ‘낮힘’에 ‘밑힘’을 두텁게 키워야 아주 높이 솟을 수 있을 테니까. 그들이 순례길에서 만날 이들도 가장 낮은 바닥에서 ‘초(超)상식적인’9) 삶을 산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림4) 함석헌 첫 시집이다. 『수평선 넘어』(삼협문화사, 1953년) 그 사람을 가졌는가10)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을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救命帶)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말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死刑場)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오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체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신천에게 ‘그 사람’은 늘 길벗․얼벗으로 함께 걸었던 김교신이었을 테고, 얼빛으로 제 속알을 환히 깨워준 다석이었을 테다. 삼팔선을 넘어 서울에 와서 신천은 돌아간 김교신 형 집을 찾고”서 이런 읊이를 썼다.11) 문 앞에 흐르는 물 의구(依舊)히 흘러 있고/ 울 뒤에 맑은 송풍(松風) 제대로 맑았구나/ 봄 볕은 서창(書窓)을 비쳐 님의 올굴 보는 듯// 이 시대 마시면서 이 바람 쏘이면서/ 흐리운 이 세상을 맑히자 애쓰던 맘/ 그 마음 어디 찾느냐 북한산만 높았네.// 시냇물 흘러가고 솔바람 불어가고/ 산사(山寺)의 저문 종이 울리어 가는 저녁/ 다녀간 님을 그리며 나는 어딜 가려노” 그런 뒤 곧바로 찾아간 곳이 스승 다석의 집이었다. 기댈 곳은 스승 밖에 없었다. 스승은 길을 잃고 월남한 신천에게 새 숨빛이었다. 오산학교에서 만난 뒤로 늘 그랬다. 신천에게 다석은 사상의 밑동이었고, 다석에게 신천은 아낌없이 주고픈 애제자였다. 참 찾아 예는 길 신천은 오산학교 역사 선생으로 있을 때 방학이 되어 서울에 오면 김교신 집에 묵거나 스승 다석의 집에 머물렀다. 다석은 제자 함석헌이 오면 스스로 집안 청소를 할 만큼 귀한 손닙으로 맞았다. 신천은 다석에게 육친 자녀보다 더 귀한 정신의 아들이었다.12) 신천이 삼팔선을 넘을 때 내 맘도 분명 한 선을 넘었”다고 했듯이, 그렇게 넘어 온 제자 신천에게 다석은 곧장 순례를 떠나자고 했다. 그 길에 참빛이 있고, 참삶이 있고, 참깸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석은 한 해 전인 1946년 이현필과 더불어 광주와 전라도 일대를 돌면서 ‘빛-삶-깸’을 이미 맛보았다. 그곳은 이세종이 믿음을 일으킨 터였고 이현필이 그 믿음을 대물림 받은 곳들이었다. 다석은 1942년에 숨돌린 이세종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그가 터잡고 기도하고 살았던 곳에서 큰 감흥을 얻었다. 완전히 저를 비워서 텅 빈 빈탕(空)이 되어 버린 사람 이공(李空)은 다석을 뒤흔들어 놓았다. 다석 또한 믿음에 들어간 지 38년 만에 ‘거듭남(重生)’을 체험했던 1942년과 북한산 산마루에 올라 하늘땅․땅하늘이 ‘맨꼭대기-맨꽁무니’로 다 뚫려버린 1943년 솟구침 이후, ‘참 찾아 예는 길’을 꿍꿍했다. 1942년에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왔다. 그리고 그 ‘참 찾아 예는 길’을 빛고을 광주에서 찾았다. 맨 밑바닥 자리에 들어야 가장 높이 솟을 수 있는 깨달음 길을 말이다. 1946년 광주에서 이현필을 만나고 온 뒤 다석은 이번 광주(光州)가서 사람 한 사람 만난 것 같다”13)고 했다. 다석이 말한 ‘사람 한 사람’이 신천이 읊은 ‘그 사람’과 다르지 않다. ‘그 사람’이야말로 그들이 가지고픈 ‘참사람’이었으리라.   그림5) 1950년 6월 6일 서울 YMCA 강당에서 박은 사진이다. 다석 나신 2만2천일을 기념했다. 다석은 늘 ‘참’을 말하고 ‘참’을 읊었다.14) 참 하나가 전부였다. 다석은 나는 참나(眞我)라는 ‘하나’의 증인이다.”15)라고 했고, 제자 김흥호는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참을 좋아했다”면서 다석이 쓴 읊이(詩)를 옮겨 놓았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참 두참 쉬잘참가 참참이 참아 깨 새 하늘끝 참 밝힐거니 참든맘 찬 븬 한아침 사무찬 참 찾으리. 1956년 다석이 YMCA 연경반에서 강연한 것을 김흥호와 송기득은 ‘버들푸름(柳綠)’으로 간추렸다. ‘참’을 말머리(主題)로 푼 강연에 이런 말들이 있다.16) 위의 ‘참’ 읊이(詩)는 그 무렵에 쓴 것일 테다. 구기리 집 대문에도 참을 찾고자 하거던 문을 두드리시오.”라고 써 놓았다.17) 그만큼 ‘참’ 하나가 다석의 가온찍기/가온찌기였다. 다석은 ‘참’ 읊이를 강당 벽에 붙여 놓고 말숨을 텄다. 사람은 참에 나선 길이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참을 찾고 나서야 한다. … 사람은 이제의 ‘나’를 알아야 한다. ‘이제’라는 것이 거짓됨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존재는 거짓된 것이고, 참이 아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한끗 찾아야 할 것은 오직 ‘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은 아주 가까운데 있다. 그리고 참은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가까이 있다고 해서 그냥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참이란 생전을 두고 찾아야 한다. … 참을 알려는 슬기가 ‘나’이다. 알도록 찾는 것이 참이며, 보게 하는 힘이 참이다. 참을 찾는 것은 참을 찾는 원동력에서 일어난다. … 해요 달, 저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오직 나뿐, 그중에서도 생각뿐이다. 참은 속알이 얘기할 뿐이다.”라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다. 또 다른 ‘참’을 말머리로 쓴 읊이도 있다. 참 그대로 된대로 내바려 둔대로 맨 드렀네,18) 져대로 그대로 맨으로 맹탕으로 져됐네, 아 하나 골잘 즈믄을 잘도잘도 있없이.19) 그대로 져대로! 지은 짓은 붙히도 짓도 ! 찌란 찌, 몬지ㄹ 잔뜩 주워 갖고 맨들단, 가짓!20) 없이라 맨첨ㄴ 없이라. 돌면 도로 없이다. 신천도 다석의 ‘참’을 받아서 제소리로 말숨을 텄다.21) 다석과 신천은 ‘참’이라는 얼숨으로 이어진 ‘사ᄅᆞᆷ’이었다. ‘사ᄅᆞᆷ’은 사름이다. 뜻을 사르고 바탈을 사르는 까닭이다. 두 사람의 사상은 종종 한꼴로 사른 흔적들을 보여준다. 서로 마음을 이어 뜻을 사르며 잇는 ‘씨ᄋᆞᆯ’이었기 때문일 터이다. 신천은 다석의 권유로 동경고등사범학교에 갔고 그곳에서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고 김교신을 사귀었다.22) 다석은 신천에게 ᄒᆞᆫᄋᆞ님 ‘씨’를 심어 ‘ᄋᆞᆯ’을 틔운 스승이었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 참 두 참 쉬지 마라 참참이 참아가서 영원한 참 걸 것이니 참든 맘 참 참을 보면 가득 참을 얻으리. 1950년 3월 회갑(回甲) 기림을 피했던 다석은 3개월이 지나서 제자들이 꾸린 회갑 강연을 하고 사진을 박았다. 1950년 6월 6일이었다. 6․25가 나기 19일 전이다. 많은 이들이 이 강연에 함께 했다. 그중에는 신천도 있었다. 나란히 앉고 선 사람들 뒤로 벽에 큼지막하게 ‘참’이라는 글씨가 하나가 크게 붙어 있다. 회갑 기림 강연의 말머리는 ‘참’이었던 게다.   그림6) 다석 류영모다. 1960년대 후반 모습이다. 다석은 ‘겉나’를 벗어야 ‘속나’로 산다고 했다. 속의 속, 깊은 속에 ‘ᄒᆞᆫᄋᆞ님’이 계신다고 했다. ‘ᄋᆞ’가 참나요, 참 씨ᄋᆞᆯ이다. 박영호는 『씨ᄋᆞᆯ-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23)에서 옛사람들도 과일이나 곡식의 첫 것을 ᄒᆞᆫᄋᆞ님께 드리듯 말의 원초음인 ᄋᆞ(ㆍ)를 ᄒᆞᆫᄋᆞ님의 이름씨로 바쳤다. 그리하여 ᄋᆞ(ㆍ)님인데 땅의 아와 구별하기 위하여 크다는 뜻의 ᄒᆞᆫ을 붙여 ᄒᆞᆫᄋᆞ님이라 하게 되었다.”라고 밝힌다. 또 다석은 좀나(小我)에서 큰나(大我)로 깨라고도 했다.24) 오죽하면 몸뚱이에 갇힌 ‘제나’가 한 번 죽어야 ‘얼나’가 산다고 했겠는가! ‘겉나’는 햇빛에 드러난 꼴이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오롯이 ‘속나’로만 뵌다. ‘좀나’도 그렇다. 드러난 세계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좀스럽다. 드러난 것을 뛰넘는(超越) 자리에, 아니 깊고 깊은 속에는 끝없이 계시는 ‘빈탕(虛空)’만이 있을 뿐이다. 다석은 1940년 『성서조선』 8월호에 「저녁찬송」을 실었다. 이 뜻을 먼저 함형(咸兄)께 드리고저 합니다. 근 20년 전에, 그때도 여름비에 길에 물이 넘치고 밤이 어둔데 오산서 고읍역까지 형이 나를 냄 내여 줄제, 제(弟) 허방을 빶이며 니야기하였었습니다. ‘어둠이 분명 빛보다 크다’고.”로 시작되는 이 글은 신천의 물음에 답하는 글이었다. 묵시록(黙示錄)에 ‘새하늘과 새따에는 다시 해빛이 쓸데 없다.’하였으니 첨도 저녁이오 나종도 저녁이다.”라고 말한 것은 저녁 곧 어둠을 보라는 이야기였다.25) ‘큰나’는 ‘뜻’을 태워 밝히는 ‘뜻태우’에 있는 까닭이다.26) 다석은 신천에게 그 ‘뜻’을 보여주고 싶었다. 신천은 종종 다석에게 편지를 썼다. 다석도 답장을 보냈다. 그는 늘 ‘어둠이 분명 빛보다 크다’고 말한 스승님의 말이 아리송했다. 신천은 1921년 9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다석을 처음 뵈었다. 그렇지만 인연을 길지 않았다. 이듬 일제로부터 교장 인가가 나오지 않자 다석은 결국 오산을 떠나게 되었다. 떠날 때 오산 특산물인 바닷굴 한 푸대를 어머님께 드리려고 학교 심부름꾼 강효국에게 지워갔다. 그 길에서 신천을 만났다. 신천도 다석을 배웅했다. 어두컴컴한 초저녁이었다. 그때 다석은 신천에게 말했다.27) 빛, 빛 하지만 빛보다 어둠이 더 큰 것 아니냐 삶, 삶 하지만 삶보다는 죽음이 더 먼저 아니냐 깬다 깬다 하지만 깸보다는 잠이 더 먼저 아니냐 그러고선 한문으로도 말했다. 신천은 ‘사여시생(死餘是生)’만 기억했다. 헤어질 때는 다석이 신천에게 내가 이번에 오산 왔던 것은 함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던가 봐.”라고 마음을 전했다.28) 신천은 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다석은 『성서조선』으로 신천에게 답장을 보낸 셈이다. ‘뜻’이 서고 ‘얼’이 깨면 어둠이 큰 것을 알게 되지만, 현실 속 어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앞길도 뒷길로 가로막는 어두운 벽일 뿐이다. 그해 4월은 한민족 모두에게 캄캄한 안개 정국이었다. 1947년 2월,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떴다. 이는 사실상 단독 정부 체제를 갖춘 신호탄이었다. 미군정은 남한 내 좌․우파를 아우르는 정치를 모색했다. 민세 안재홍을 민정장관으로 임명한 까닭이다. 남한도 ‘남조선과도정부’를 공식화했다. 남북이 갈라섰다. 그해 3월, 제주에서는 3․1절 기념행사에서 미군정 경찰이 쏜 총탄에 주민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터졌다. 미군정은 반발하는 제주도민과 민관 합동 총파업을 좌익 폭동으로 몰아붙였다. 4월에 극우 성향 도지사가 취임한 뒤로 서북청년단을 투입해 도민들을 탄압했다. 제주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좌우 이데올로기가 맞섰다. 1946년에 결렬된 미․소공동위원회는 5월 21일 서울 덕수궁에서 제2차 회의를 재개했다. 소련은 반탁운동을 한 우익단체를 배제했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포함하자고 주장했다. 7월 19일, 좌우합작운동의 중심추였던 여운형이 혜화동 로타리에서 피살당했다. 순례를 떠났던 나날의 앞뒤 역사다. 현실은 이렇듯 막막했다. 신천은 1947년 2월 26일 고향인 평안북도 용천을 떠나 3월 17일 서울에 도착했다. 송두용은 다석에게 미리 전갈을 보내 신천이 월남했단 사실을 알렸다. 제자가 방문한단 사실에 다석은 마음이 들떴다. 집을 깨끗이 청소한 뒤에 제자를 맞았다. 신천을 보자마자 안부를 묻고는 곧장 ‘광주에 가보자’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신천은 그해 4월 초에 선생님을 모시고 광주 등지로 한 달 여행을 했”29)던 것이다. 한 달이라니! 그야말로 하루 앞을 알기 어려운 시절에 한 달 순례라니! 그런데 이 한 달 순례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하루하루 그들이 찾아간 곳, 만난 사람과 겪은 일들은 확인이 안 된다. 도대체 그들은 한 달간 어디를 갔고 누구를 만났으며 어떤 말을 나눴을까? - 1)첫 문장에서 여기까지는 박영호,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교양인, 2012), 596~597쪽 참조. 2)류영모 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동연, 2024) 제4권 682쪽. 3)류영모 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동연, 2024) 제4권 602쪽. 4)이치석 지음, 『씨ᄋᆞᆯ 함석헌 평전』(시대의창, 2005) 651쪽. 5)이치석 지음, 『씨ᄋᆞᆯ 함석헌 평전: 혁명을 꾼꾼 낭만주의자』(시대의창, 2015) 475쪽. 6)함석헌, 『수평선 너머』(삼협문화사, 1953). 머리말에서. 이 시집은 전시 중 부산에서 간행된 함석헌의 첫 시집이다. 총 491쪽이다. 7)박영호,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교양인, 2012) 373~374쪽 참조. 《장자》 내편(內篇) 제6편 [대종사(大宗師) 편]에 있는 眞人之息以踵, 衆人之息以喉.(진인지식이종, 중인지식이후)”을 박영호가 푼 것이다. 8)‘바탈’은 ‘받할’을 이어쓰기로 쓴 것이요, ‘받할’을 소리낸 글꼴이다. ‘ㄷ+ㅎ=ㅌ’이 되니, ‘받할’을 소리내면 ‘바탈’이다. ‘받할’은 ‘받아서 할’인데, 하늘로부터 받아서 할 나를 말한다. 하늘(天)이 일러준 ‘일름(命)’이다. 천명(天命)을 푼 말이요, 본디 하늘이 준 본바탕으로서의 성(性)을 말한다. 다석이 그리 풀었다. 9)박영호는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교양인, 2012)에서 이세종의 초(超)상식적인 언행이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바보처럼 보였으나 세월이 흐르자 차차 거룩하게 느껴져 사람들이 이세종을 성자로 받들게 되었다.”고 했다. 461쪽. 10)함석헌, 『수평선 너머』(삼협문화사, 1953). 11)함석헌, 『수평선 너머』(삼협문화사, 1953). 돌아간 김교신 형 집을 찾고”는 읊이 제목이다. 12)박영호가 쓴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440쪽 참조. 이름을 호로 바꾸어서 썼다. 서영훈은 류선생님과 가까웠고 그 영향을 받은 이들 중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을 비롯하여 정인보, 문일평, 윤세복, 이광수, 김정식, 김교신, 현동완, 최흥종, 이현필, 김흥호 등 정신적 지도자와 이인(異人)이 많으나 함선생님만큼 류선생님과 가깝고 아낌과 고임을 받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류영모 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동연, 2024) 제4권 650쪽. 13)박영호, 『씨ᄋᆞᆯ-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홍익재, 1985) 242쪽. 14)김흥호 편, 『제소리-다석 류영모 강의록』(솔, 2001) 36쪽. 본디 이 글은 『다석일지』(홍익재, 1990) 제4권에 실려 있었다. 김흥호가 ‘인물평전’으로 기고한 글을 재수록한 것이다. 여기에 ‘참’을 말머리로 세운 읊이가 있다. 15)박영호, 『다석사상전집1-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문화일보,1995), 132쪽에서. 16)김흥호 편, 『제소리-다석 류영모 강의록』(솔, 2001) 182~186쪽. 이 글은 1990년 홍익재에서 펴낸 『다석일지(총4권)』 제4권 ‘버들푸름’ 465~468쪽에도 실려 있다. 17)류영모 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동연, 2024) 제4권 698쪽. 18)맨은 더 할 수 없을 정도나 경지에 있음”을 뜻한다. 그것이 ‘온통’이다. 다석은 ‘맨’과 ‘드렀네’를 절묘하게 병치시켜서 ‘맨’이 ‘온통’으로 읽히고 ‘맨드렀네’로도 쓰이게 했다. 19)온은 백, 즈믄은 천, 잘은 만, 골은 억, 울은 조를 뜻하는 토박이말이다. 골잘은 ‘억만’으로 아주 많다는 뜻이다. 골잘 즈믄은 그러니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있없이’는 ‘있이 없는 이’를 말한다. ‘있’은 ‘없’으로 돌아간다. 20)찌는 똥이라는 뜻이다. 몬지는 물(物)의 토박이말인데 먼지․몬지를 말한다. 21)함석헌, 『수평선 너머』(삼협문화사, 1953). 22)류영모 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동연, 2024) 제4권 635쪽. 23)박영호, 『씨ᄋᆞᆯ-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홍익재, 1985) 앞쪽 ‘일러두기’ 참조. 24)‘좀나(小我)’는 우주의 절대적인 나와 구별한 자아(自我)요, 감정이나 욕망 따위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을 뜻한다. ‘큰나(大我)’는 우주 유일의 절대 본체를 말하고, 우주 본체로서 참된 나 ‘참나’를 뜻한다. 25)『성서조선』 1940년 8월 1일 발행(통권139호);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성서조선6/1939-1940』(주식회사 홍성사, 2019), 571쪽. 원문 그대로를 실었다. 띄어쓰기를 고치고 한문은 한글로 바꿨다. 26)다석은 ‘바탈태우’를 ‘뜻태우’라고 부르기도 했다. 27)김흥호 편, 『제소리-다석 류영모 강의록』(솔, 2001) 18쪽. 28)김흥호 편, 『제소리-다석 류영모 강의록』(솔, 2001) 18쪽. 29)함석헌, 「젊은 류영모 선생님」, 『제소리-다석 류영모 강의록』(솔, 2001) 21쪽. 함석헌은 그 해 3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해서 4월 초에 선생님을 모시고 광주 등지로 한 달 여행을 했는데 그때도 난 2식이어서 선생님을 옆에 두고도 나는 나대로 맘놓고 점심을 먹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여기서 ‘그 해’는 1947년이다. 그리고 이 글은 함석헌이 1983년 10월 18일에 쓴 글이다. 다석 돌아가신 지 2주기 추모 자리에서 밝힌 글이다.  김종길 다석철학 연구자 gjg68@hanmail.net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