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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김민기 ‘어찌 갈거나’…대상 응시에서 일체로 전환

김민기 ‘어찌 갈거나’…대상 응시에서 일체로 전환
[지원사업&대회]
김민기는 1998년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입대하기 전 노래들은 멀리 떨어져서 대상을 응시하는, 일종의 짝사랑 같은 것이었다. 70년대 후반에 만든 노래들은 공장에 일 년쯤 다니다가 그나마 쫓겨나고 막노동 하던 당시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비로소 대상과 일체가 되었다고나 할까? 군 시절의 ‘늙은 군인의 노래’나 공장 시절의 ‘상록수’가 그러하다. 도 마찬가지다.” 이후 김민기와 1세대 문화패들은 한국 무용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또 하나의 작품에 참여한다. 이애주의 창작 한국춤 이다. 1974년 6월 22, 23일이었으니 가 끝나자마자 뛰어든 셈이다.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열린 공연은 1부 이애주의 전통춤, 2부 창작춤 으로 이루어졌다. 김민기는 1부에서 불교의식 춤을 이애주, 장만철, 김석만 등과 함께 추었고, 2부 무용극 의 음악 작업에도 참가했다. 한국창작춤의 효시로 여겨지는 바로 그 작품이다. 이애주의 비판정신이 잘 드러난 창작춤 땅끝의 한 장면. 1974년 공연에서 김민기는 춤을 추고, 음악 작업에도 참여했다. 사진출처: 우리문화신문(사진 이애주문화재단제공) 은 외딴섬을 장악한 섬주의 처녀 공출과 이에 대한 저항 그리고 죽음을 줄거리로 한다. 외래 무용에 밀려 종적을 감추다시피 한 우리 춤의 춤사위만으로 시대의 폭압과 그로 말미암은 개인의 고통을 온몸이 으스러지게 표현한 것이다. 이애주는 이 공연에서 일제의 침탈과 함께 사용하기 시작한 ‘무용’이란 말을 버리고, 밀려나고 버림받은 우리 본래의 말인 ‘춤’을 살렸다. 굿과 농무 그리고 탈춤 등 집단 연희나 승무, 학춤 등에 포함된 우리 춤사위는 모방이나 유희를 위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삶의 희노애락, 그중에서도 고통과 슬픔에서 우러나온 몸짓이었다.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삶의 고통을 드러내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극복하려는 몸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왕정이든 독재체제든 권력의 억압과 폭력으로 말미암은 고통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몸짓은 없다는 게 이애주와 채희완 등 참가자들의 판단이었다. 한마디로 우리 춤은 이들에게 생명 현상 그 자체였다. 팸플릿에서 이애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춤판은 참을 수 없는 아픔의 몸짓이다. …오늘의 춤은 절규의 몸부림이 될 것이다.” 이애주의 승무. 승무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시대의 춤꾼 이애주가 승무를 선보이고 있다. 이애주는 2021년  별세했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마당극이 이야기와 춤, 그리고 몸짓으로 표현한 해학과 풍자, 익살과 조롱을 통해 시대의 문제를 드러내고 비판하며 신명을 고양한다면, 이애주가 첫선을 보인 ‘춤판’은 개개인이나 시대의 고통, 억압돼 있거나 숨겨진 고통을 끌어내고 드러내어 공감하고 치유하려는 것이었다. 민속 가면극에서 비롯한 마당극과 굿과 의례에서 비롯한 ‘춤판’은 인간 고유의 생명력 회복이라는 지점에서 만나는 셈이다. 김민기가 1974년 10월 입대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당시 경동교회 강원룡 목사가 세우고 또 이끌던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작곡을 요청했다. 강 목사는 교회가 신도 늘리기 전도보다 사회 공헌에 헌신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설립한 한국기독교 사회문제연구소를, 1965년 크리스천 아카데미로 확대 개편했다. 연구와 함께 실천적인 사업을 벌이도록 조직을 키운 것이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인간소외의 극복과 ‘인간화’라는 기치 아래,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연대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중간 집단 교육을 펴고 있었다. 그런 가치와 지향은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요청으로 김민기가 지은 ‘어찌 갈거나’에 잘 드러나 있다. 이 노래는 제목 때문에 흔히 오해하듯, 주저하고 망설이고 갈팡질팡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가야 할 길, 가야 할 곳에 끝끝내 가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주먹을 그러쥐게 하는 김민기의 드문 노래 가운데 하나다. 이런 식이다. ‘가야 할’ ‘내 집’으로 가려는 것이니, 불비 내리는 모래바람 속이건, 눈보라 치는 얼음 산 위이건, 밤이 길고 길이 험해도 두려워할 게 하나 없다는 것이고 내 형제, 날 부르는 소리 그리고 내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반드시 가겠다는 것이다. 학생 운동권에서 ‘출정가’로 즐겨 불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강헌과 인터뷰에서 김민기가 설명한 것처럼, 이 노래의 특징은 초기작들의 응시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대상과 한 몸이 되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 노래를 고비로, 시대의 모순 주변에서 서성이고, 절망하고, 안타까워하지 않고, 모순 한가운데로 뛰어들 차비를 한 셈이었다. 긴급조치 시대 시위 현장은 살벌했다. 학내에는 사복경찰(‘짭새’)이 항상 떼를 지어 학생들이 모일 만한 노루목을 지키고 있었다. 시위를 시도하는 순간 주동자를 그대로 낚아채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시위 주동자는 유인물을 뿌리고 ‘학우여!’라고 외치는 순간, 선언문 첫 문장도 읽지 못하고 체포되기 일쑤였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가장 큰 과제는 어떻게 하면 10분 정도 체포되지 않고 버티느냐였다. 그런 고민 속에서 주동자들은 나무에 오르고, 옥상에 올라 문을 걸어 잠그고, 건물 외벽의 테라스를 타거나 밧줄로 몸을 묶은 채 건물에 매달리기도 했다. 이와 함께 ‘노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주동자가 체포돼 끌려가도 노래는 학생들의 마음을 모아 흩어지지 않게 했다. 두려움을 없애고, 용기를 북돋고, 의분을 일으켰다. 게다가 아무리 충성스러운 ‘짭새’라도, 학생들이 노래 부르는 것까지 잡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더 많은 학생이 모였고, 규모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시위대 속의 ‘2선’들이 구호를 선창하며 출정을 위한 예열을 했다. 오프닝과 예열용으로 가장 자주 활용된 노래가 ‘아침이슬’이었고, 출정용으로는 ‘어찌 갈거나’ 만큼 좋은 노래는 없었다. 행진과 대치 때에는 ‘우리 승리하리라’ ‘훌라 송’ 등이 애용됐다. 강 목사가 김민기에게 작곡을 의뢰한 데는 제법 오랜 인연의 전사(前史)가 있다. 강 목사는 개신교계의 민주적이고 의로운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강 목사의 경동교회는 박형규 목사의 제일교회와 함께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들의 든든한 진지였다. 경동교회는 ‘우리 사회의 인간화’라는 기치에 따라 사목의 현대화, 찬송가와 예배의 토착화, 약자들과 함께하는 교회를 추구했다. 김민기는 강원룡 목사의 요청으로 노래 어찌 갈거나를 만들었다. 어찌 갈거나는 멀리서 대상을 응시하던 그가 대상과 일체화된 노래로 전환하는 출발점이 됐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이를 위해 처음으로 시도한 게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운 리듬의 밤’으로 예배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첫 회가 1969년 11월 2일 저녁 예배였다. 강 목사는 개신교 신자였던 ‘딴따라’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최영희를 초청했고, 예배는 이들이 부른 미국의 흑인 민요와 찬송가 10곡으로 진행했다. 보수적인 개신교계에선 난리가 났다. MBC의 토론 프로그램의 한 출연자는 ‘강원룡이 교회를 나이트클럽으로 만들었다’라고 거품을 물기도 했다. 그러건 말건 강 목사의 ‘노래 예배’는 계속됐다. 이듬해 9월 6일 자 는 이런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서울 장충동 소재 경동교회에서는 6일 밤 7시 30분에 포크싱거 서유석, 도비두(김민기와 친구 김영세의 듀엣), 16일로 입대가 확정된 조영남이 참가하는 음악 예배가 열린다. 도비두는 등 3곡을, 서유석은 등 3곡, 조영남은 등 3곡을 부를 예정이다. 담당 목사는 강원룡 씨. 가톨릭 신자인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 씨가 이례적으로 초청돼 ‘교회음악의 새바람 새 물결’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맡는다.” 이 음악 예배는 그야말로 송곳 하나 세울 틈도 없이 만원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어진 강 목사와 김민기의 인연은 70년대 내내 계속됐다. 1978년 겨울엔 경동교회의 ‘빛바람 중창단’이 녹음에 참여했다. 이 중창단은 5공 시절에도 김민기의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제작해 세상에 퍼트렸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1979년 된서리를 맞았다. 중간 집단 교육을 ‘용공 의식화’로 몰아 강사진과 실무 간사들을 대거 체포하고 구속 혹은 구금했다. 이 단체가 실시하던 중간 (혹은 매개) 집단 교육이란 기층 노동자, 농민(民), 도시 빈민 혹은 사회적 약자와 엘리트 지식인(人) 사이에서 양쪽의 차이를 극복하고 메울 수 있는 인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민(民)과 인(人) 사이의 간극이 깊어져 사회 분열과 갈등이 깊어진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대안이다. 아울러 민(民)과 인(人)이 협력할 때 새로운 사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이를 위해 다양한 계층과 직종의 대화와 연구 조사 그리고 교육훈련을 실시했고 이를 통해 노동, 농촌, 여성, 교회 분야에서 수많은 활동가를 배출했다. 1970년대 후반이면 노동 이외에 농민, 여성 등 부문별 운동이 싹트기 시작할 때였다. 학생에서 노동자, 농민, 여성으로까지 민주화운동의 거점이 다양화하는 것이었고, 유신 정권으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는 지식인 운동과 현장 운동 사이의 고리를 잇기 위해 노력했고, 박정희 정권은 그 고리를 끊기 위해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정조준했다. 1975년 1월 강원룡 목사가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 주간동아( 재단법인 여해와함께 제공)  1979년 3월 9일 중앙정보부는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개신교계 용공 의식화의 배후 세력으로 규정하는 이른바 ‘크리스천 아카데미 불법 용공서클 사건’이라는 조작 사건을 발표했다. 당시 여성사회분과 간사 한명숙(전 국무총리)을 시작으로 농촌사회분과 간사 이우재(전 국회의원), 황한식(전 경남대 교수), 장상환(전 경남대 교수), 산업사회분과 간사 김세균(전 서울대 교수), 신인령(전 이화여대 총장) 그리고 지도교수인 정창렬(전 한양대 교수)이 차례로 구속됐다. 교수진이었던 유병묵(전 중앙대 교수), 박현채(전 서울대 교수) 그리고 강원룡 원장 등도 체포됐다. 교육과정을 이수하던 노동자 최순영(YH무역), 이총각(동일방직), 박순희(원풍모방), 장현자(반도상사), 이영순(콘트롤데이터) 등도 끌려갔다. 그러나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중간 교육’에서 피교육생이던 대학생이나 노동자, 농민에게 특별하게 교육한 건 없었다. 1972년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생 신금호 전 서울노동위원회 위원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그는 노동운동에 뛰어들 생각으로 이곳의 문을 두드렸다. 강의는 거의 없었다. 하더라도 먼저 노래부터 하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했다. 꿈이든 이상이든 그림이든 이야기든,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풀어내도록 했다. 다만 특별한 건 호칭이었다. 참여자는 모두 서로를 동지라 불렀다. 신 동지, 이 동지… 등.” 그때 참여자들이 많이 부른 노래는 ‘독립군가’, ‘선구자’, ‘스텐카 라진’, ‘통일가’, ‘삼팔선가’ 등이었다고 신금호는 기억했다. 김민기가 신금호와 인연을 맺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서울대 미대 근처 연건동 뒷골목 작은 막걸릿집의 좁은 방에서였다. 김지하와 김민기 그리고 한 여성이 합석하고 있었다. 신금호는 그 자리에서 자작곡 ‘붉은 꽃’을 나직이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김지하가 대뜸 물었다. 신 공, 노래할래, 노동할래?” 신금호의 입에선 이런 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노동자요!” 내가 어찌, ‘김민기’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신금호는 곧 용접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민기는 1974년 10월 입대했다. 학교 수업에 아예 나타나지 않아 제적 상태였다. 김민기는 용케 대한민국 군대에서 최고의 ‘꽃보직’이라는 카투사, 그중에서도 가장 늘어진다는 AFKN에서 근무하게 된다. 좋지 않은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군대 복만은 타고난 셈이었다. 그에게 특별한 ‘빽’이 있는 건 아니었다. ‘빽’이 통할 김민기도 아니었다. 다만 군대는 역시 ‘줄’이었다. 당시는 줄만 잘 서면 천당으로 가고, 잘못 서면 지옥으로 빠졌다. ‘빽’ 좋은 놈의 앞이나 뒤에 서게 되면 그에게 묻어서 그가 가는 곳으로 따라갔다. 한 놈만 골라서 좋은 보직을 줄 수 없으니, 앞뒤로 두어 사람씩 뭉텅이로 같은 보직을 줬다. 덕분에 카투사 배정을 받았고, 자대에선 나름 저명한 가수라는 이름값 덕분에 AFKN 음악 프로그램 관련 일을 맡게 됐다. 그러나 그 복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1974년 11월 27일 종교계 학계 정계 언론계 법조계 등 재야 인사 71명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했다. 한발 물러서 주춤거리던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언론사 젊은 기자들이 유신정권에 맞선 ‘자유언론실천운동’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것은 물론 정보기관원들에게 데스크를 당하는 등 수모를 견디다 못한 기자들이 앞섰고, 삽시간에 서울과 전국의 언론사로 확산했다. 10월 24일 낮 기자 180여 명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자, 그날 밤 기자 150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 전국의 31개 신문, 방송, 통신사 기자들이 언론자유 실천을 위한 결의문과 행동 지침을 채택했다. 편집과 보도에 대한 검열을 배격하고, 기관원의 편집국 출입을 막고, 언론인에 대한 불법 연행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동아일보기자들이 1974년 1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고 있다. 사진: 동아투위제공 자유언론실천  50주년을 맞은 2025년  선언에 참여했던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고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출처: 미디어스   다른 회사와 달리 질기게 ‘자유 언론’을 실천한 는 12월 중순부터 이른바 광고 탄압을 받기 시작했고, 26일부터 광고가 모두 사라져 ‘백지 광고 사태’로 번졌다. 수많은 시민이 빈 광고란을 후원 광고로 채우기 시작했다. 첫 개인 광고 후원자는 익명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사주와 간부들은 정권의 압력에 굴복했고, 이듬해 3월 깡패 등을 동원해 기자들을 편집국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131명의 기자를 해직 또는 무기 정직 처벌을 했다. ‘ 사태’였다. 사회의 원로라는 사람들이 그런 현실 앞에서 팔짱 끼고 있다면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민회의는 함석헌, 이병린, 천관우, 김홍일, 강원룡, 이희승, 이태영으로 7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는 고문으로 참여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을 포함해 백낙준, 유진오, 김영삼, 정일형, 법정 스님 등이 고문단에 함께했다. 이들은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결성대회에서 모든 가능한 평화적 공동 행동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서슴없이 나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박정희 정권과의 정면충돌을 선언한 것이다. 김민기가 카투사로 그의 일생 중 가장 편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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