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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설계자이며 부패의 몸통 D. 로이드 조지
[사회혁신]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자란 아이가 훗날 영국을 1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이끌고, 오늘날 복지국가의 뼈대를 놓은 뒤, 말년에는 귀족작위를 돈 받고 팔아넘긴 인물이 됐다면 믿을 수 있겠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의 삶이 바로 그렇다. 그는 영국정치사에서 가장 극적인 반전을 보여준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개혁의 설계자이자 동시에 부패의 몸통, 이 둘을 한 몸에 지닌 사람이었다.   1919년의 로이드 조지(위키피디아) 시골뜨기가 상원을 무너뜨리다 로이드 조지는 잉글랜드 맨체스터에서 태어났지만 생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여의고 웨일스 시골마을로 옮겨가 자랐다. 학교 교사였던 외삼촌 손에서 자란 그는 정규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변호사 자격을 땄고, 1890년 스물일곱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돼 이후 55년 동안 같은 지역구를 지켰다. 웨일스 사투리를 쓰는 이방인이 런던 정치판에 들어온 셈이었으니, 당시 상류층 눈에는 벼락출세한 촌뜨기로 비쳤을 법하다. 그런 그가 진짜 실력을 드러낸 건 재무장관 자리에 오르면서다. 1909년, 그는 땅 부자와 고소득층에 세금을 매겨 그 돈으로 노인연금과 사회보장을 확충하겠다는 예산안을 내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완고한 특권층 집단이라 할 상원이 이 예산안을 거부하자, 로이드 조지는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결국 1911년, 상원의 거부권을 대폭 제한하는 법이 통과됐다. 수백 년간 귀족들이 틀어쥐고 있던 권력의 한 축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가난한 웨일스 소년이 영국 헌정체제를 뒤흔든 셈이다.   1890년경의 로이드 조지(위키피디아)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국가의 설계도를 그리다 이 승리를 발판으로 그는 1911년 국민보험법을 밀어붙였다. 노동자가 실업하거나 병들었을 때 국가가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제도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국가가 개인의 삶에 이렇게까지 개입해야 하느냐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로이드 조지는 이렇게 답했다. 가난은 개인의 게으름 탓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라고. 훗날 영국 복지국가의 토대가 여기서 놓였다.   1902년의 로이드 조지(위키피디아) 1차대전을 영국의 승리로 이끈 마법사 1916년, 영국이 1차세계대전의 수렁에 빠져 있을 때 로이드 조지는 총리 자리에 올랐다. 뛰어난 언변과 결단력으로 그는 웨일스의 마법사 라는 별명을 얻었다. 실제로 그는 전쟁물자 생산을 다잡고 연합국 사이의 갈등을 조율하며 영국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새로운 유럽질서를 짜는 자리에 앉았고, 아일랜드 독립협상을 마무리 지어 아일랜드 자유국 수립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1907년의 로이드 조지와 윈스턴 처칠(위키피디아) 작위 장사꾼이 된 개혁가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시작된다. 총리 자리를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했던 로이드 조지는 자신이 만든 정당의 자금을 채우려고 귀족작위와 훈장을 돈 받고 팔았다. 기사작위 하나에 얼마, 남작 작위 하나에 얼마, 이런 식의 은밀한 거래가 공공연히 이뤄졌다. 개혁으로 특권을 무너뜨렸던 사람이 새로운 방식으로 특권을 팔아 돈을 챙긴 셈이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여기에 아내를 두고도 오랜 세월 비서와 공공연한 관계를 이어간 사생활 문제까지 겹치며 그의 도덕적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국 1922년, 함께 연립정부를 꾸리던 보수당이 등을 돌리면서 그는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더 뼈아픈 건 그가 속했던 자유당의 운명이었다. 1916년 총리 자리를 두고 로이드 조지와 그 전임자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 1852~1928)가 벌인 내분은 자유당을 회복불능 상태로 갈라놓았다. 이후 자유당은 다시는 정권을 잡지 못했고, 그 빈자리는 노동당이 차지했다. 한 세기 넘게 영국을 이끌던 정당이 지도자 두 사람의 권력다툼으로 무너진 것이다.   1911년경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위키피디아) 한국에게 남기는 질문 로이드 조지의 생애는 개혁과 부패, 원칙과 야합이 얼마나 쉽게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복지국가의 초석을 놓은 손과 작위를 팔아넘긴 손이 같은 사람의 손이었다는 사실을 한국의 정치인들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개혁을 외치던 사람이 권력을 쥔 뒤 스스로 특권의 판매자가 되는 일은 시대와 나라를 가리지 않고 되풀이된다. 진보를 자처하는 세력일수록 이 함정을 더 경계해야 한다. 또 하나 새겨야 할 대목은 자유당의 몰락이다. 지도자 개인의 권력욕이 정당전체를 궤멸시킨 이 사건은, 진보진영 내부의 분열이 얼마나 치명적인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보여주는 오래된 사례다. 2024년 12월 3일 밤 계엄이라는 헌정파괴 시도를 겪은 한국사회에서, 이를 되짚어 응징하고 재발을 막으려는 세력이 자기들끼리 권력다툼에 몰두한다면 그 끝이 어떨지는 백 년 전 영국이 이미 보여준 셈이다. 상원의 특권을 무너뜨린 로이드 조지의 용기는 본받을 만하지만, 그 용기가 사욕과 뒤섞이는 순간 어떤 파국이 오는지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지역구 국회의원 및 총리로서의 공로를 기려 카나번 성(Caernarfon Castle)에 세워진 로이드 조지의 동상(1921년)(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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