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에서 남편을 잃고 돌덩이로 이름을 세운 여자 [사람들] 탐험가 스콧의 미망인이라는 꼬리표
캐서린 스콧(Kathleen Scott, 1878–1947)은 으레 ‘남극 탐험가 로버트 팰컨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의 아내’라는 소개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자기 길을 걷던 조각가였다. 남편의 이름만으로 기억하기에는 작품도, 삶도 너무 많다.
그녀는 1878년 영국 노팅엄셔의 칼턴인린드릭(Carlton in Lindrick)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에디스 애그니스 캐린 브루스(Edith Agnes Kathleen Bruce). 성공회 성직자 로이드 스튜어트 브루스(Lloyd Stuart Bruce)와 제인 스킨(Jane Skene)의 11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잃은 그녀는 친척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1900년 런던 슬레이드 미술학교에 들어갔고, 1902년 파리로 건너가 콜라로시 미술학교(Académie Colarossi)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작업실을 드나들었고,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 1877–1927)과도 교류했다. 그녀는 남극 탐험대가 출발하기 전부터 예술가로서 자기 삶을 개척하고 있었다.
1910년의 캐서린 스콧(위키피디아).
남극보다 길었던 기다림
1908년 캐서린은 해군 장교 로버트 스콧과 결혼했다. 이듬해 아들 피터 스콧(Peter Scott, 1909–1989)이 태어났다. 남편은 1910년 남극 탐험에 나섰다.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1872–1928)이 먼저 남극점에 도달했다. 스콧 일행은 1912년 1월 17일 극점에 도착했지만 이미 노르웨이 국기가 꽂혀 있었다. 귀환길은 더 비극적이었다. 스콧과 동료 네 명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캐서린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남극의 비극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1913년 초 뉴질랜드로 향하던 배에서 남편의 죽음을 알게 된다. 남극에서는 탐험이 끝났지만 아내의 시간은 뒤늦게 그 비극을 따라잡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을 잃었다고 해서 자신의 삶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슬픔 속에서도 끌과 망치를 들었다.
1905년의 로버트 스콧(위키피디아).
죽은 영웅들을 조각하다
캐서린은 남편과 동료들의 동상을 제작했다. 남극탐험대의 의사이자 화가였던 에드워드 애드리언 윌슨(Edward Adrian Wilson, 1872–1912)의 동상은 1914년 첼트넘에 세워졌다. 타이태닉호 선장 에드워드 존 스미스(Edward John Smith, 1850–1912)의 동상도 같은 해 리치필드에 들어섰다. 남편 로버트 스콧의 동상은 1915년 런던 워털루 광장에서 제막되었다.
이 작품들 때문에 그녀는 죽은 영웅들을 기리는 조각가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녀를 남편을 추모하는 아내로만 설명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녀는 공공기념물과 초상조각 분야에서 자기 경력을 쌓아간 전문예술가였다.
그 사실은 1923년 헌팅던에 세운 전쟁기념비 「생각하는 병사(The Thinking Soldier)」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병사는 무기를 치켜들고 승리를 자랑하지 않는다.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고통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듯하다.
승리와 영광을 내세운 기념물이 넘쳐나던 시대에 그녀는 전쟁을 겪은 인간의 고뇌를 형상화했다. 기념비는 죽은 이를 기억하는 물건이지만,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로버트 팔콘 스콧 동상 (2011년 지진으로 훼손되기 전에 촬영됨)(위키피디아).
남편의 그늘을 벗어난 삶
캐서린은 조각가로 활동하면서 전쟁으로 얼굴을 다친 병사들을 위한 재건활동에도 참여했다. 여러 정치인과 문인들의 흉상을 제작했고, 왕립조각가협회(Royal Society of Sculptors)에서도 인정받았다. 1928년 준회원이 되었으며 1946년 정회원으로 선출됐다.
1922년에는 정치인 에드워드 힐턴 영(Edward Hilton Young, 1879–1960)과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웨이랜드 영(Wayland Young, 1923–2009)이 태어났다. 남편이 1935년 케닛 남작 작위를 받으면서 그녀는 케닛 남작 부인(Lady Kennet)이 되었다.
1947년 세상을 떠난 그녀의 일기와 회고록은 1949년 『예술가의 자화상: 케넷 부인의 일기와 회고록에서』(Self-Portrait of an Artist: From the Diaries and Memoirs of Lady Kennet)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남편의 아내가 아니라 한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캐서린 스콧, 1923년(위키피디아).
아들은 얼음 대신 새를 택했다
아들 피터 스콧은 아버지의 극지탐험을 그대로 이어가지 않았다. 그는 화가이자 조류학자, 자연보호운동가로 활동했고 세계자연기금(WWF, World Wide Fund for Nature)의 창립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자연기금의 상징인 판다 도안도 그의 작품이다.
아버지는 남극점에 도달한 뒤 돌아오지 못했다. 아들은 새와 습지를 관찰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한 세대의 비극이 다음 세대의 의무가 될 필요는 없다. 피터는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기 길을 찾았고, 어머니 역시 남편의 이름표에 갇히지 않았다.
1954년의 피터 스콧(위키피디아).
한국사회가 돌아볼 것들
첫째, 실패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스콧은 아문센에게 남극점 선두를 내주었고 귀환 중 목숨을 잃었다. 영국사회는 그를 영웅으로 기렸지만 탐험의 준비와 판단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애도와 검증은 양립할 수 있다. 성공한 사람은 신격화하고 실패한 사람은 낙인찍는 사회에서는 새로운 도전도 자라기 어렵다.
둘째, 여성의 이름을 누구의 아내라는 말 뒤에 숨겨서는 안 된다. 캐서린은 로버트 스콧의 아내였지만 독립적인 예술가였다. 한국의 공공미술과 기념비 제작에서도 여성예술가들이 어떤 기회를 얻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셋째, 기념비는 숭배보다 성찰을 이끌어야 한다. 「생각하는 병사」는 전쟁의 영광보다 인간의 고뇌를 보여준다. 2024년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사태를 겪은 한국사회라면 권력과 민주주의, 책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물어야 한다. 항쟁과 학살의 기념공간도 특정인물을 우상화하기보다 피해자의 경험과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
넷째, 유족에게 자기 삶을 돌려주어야 한다. 희생자의 가족을 위로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평생 누구의 유족이라는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알 권리와 정의를 요구할 권리, 자기 삶을 새롭게 꾸릴 자유가 함께 보장되어야 한다.
남극은 로버트 스콧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그 죽음이 아내의 삶까지 삼키지는 못했다. 캐서린 스콧은 슬픔을 안고 다시 일어섰고, 돌과 청동에 자신의 솜씨를 새겼다.
영웅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영웅의 곁에 있던 사람을 영원히 그늘 속에 세워두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다. 역사는 남극에 도달한 남자의 이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를 애도하면서도 자기 삶을 살아낸 여자의 이름까지 기록할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1908년, 결혼식 당시의 캐서린과 로버트 팔콘 스콧(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