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 항쟁은 빠졌구나 19년 전 노 대통령의 아쉬움 [뉴스] 10·16 항쟁은 빠졌구나.”
2007년 5월 18일, 국립5·18민주묘지 추모관 개관식에 참석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역사 패널 전시에 부마항쟁이 누락된 것을 보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에서 부마항쟁의 빈자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났다. 2026년 9월 10일 필자가 추모관 직원에게 확인했는데 지금도 근현대의 역사 패널에 부마항쟁이 없다는 답을 들려줬다. 2025년 1월 게시된 방문기 사진에서도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 표기는 보이지만 부마항쟁을 따로 표기한 것은 찾을 수 없다. 오래 전에 지적된 누락이 오늘의 전시에서도 이어진 셈이다.
국립5·18민주묘지 제공한 사진 두 장 갈무리하고 연표는 필자가 추가
부마항쟁은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사의 4대 민주항쟁으로 불린다. 그런데 민주화의 계보를 설명할 때는 종종 4·19에서 곧바로 5·18로 넘어간다. 공식적인 평가와 역사 서술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
정치 지도자의 연설에서도 같은 장면을 만난다. 이재명 대통령의 2025년 광복절 경축사와 2026년 3·1절 기념사는 민주화의 역사를 4·19, 5·18, 6·10으로 연결했다. 두 연설의 해당 대목에 부마항쟁은 없었다. 반면 이 대통령은 올해 3월 부마항쟁의 헌법 전문 수록을 제안했고, 4·19 기념사에서는 부마항쟁을 민주화의 흐름에 포함시켰다.
이를 일관된 배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헌법에 담을 만큼 중요한 역사가 국가의 주요 연설에서 들어갔다 빠졌다 하는 불일치는 짚어야 한다. 헌법 전문 수록 논의가 역사 인식의 변화와 함께 가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마항쟁을 생략하면 우리 민주주의의 어떤 경험을 놓치게 되는가. 우선 헌법의 형식으로 제도화된 1인 지배에 대한 저항이다. 유신헌법은 박정희 개인의 종신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권력을 제한하고 국민의 자유를 보장해야 할 헌법이 집권자의 권력을 강화하는 장치로 둔갑했다. 헌법학자 허영이 유신헌법을 ‘장식적 헌법’으로 평가한 배경이다.
부마항쟁의 유신헌법 철폐 요구는 바로 이 지배체제를 정조준했다. 항쟁은 유신체제 붕괴를 촉진하고 제4공화국 종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유신의 몰락을 10·26이라는 권력 내부의 사건만으로 압축하면, 그에 앞서 체제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거리를 뒤흔든 시민들의 역할이 흐려진다.
정치적 자유와 공평한 소득분배를 함께 요구했던 경험도 놓치게 된다. 필자는 1979년 부산대학교 학생으로서 부마항쟁 당시 선언문을 작성했다. 그 선언문에는 유신헌법 철폐와 함께 안정적인 성장과 공평한 소득분배를 요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언론·집회·결사의 자유와 더불어 YH사건과 같은 반윤리적 기업행위에 대한 책임도 물었다.
당시 필자의 문제의식에는 권력의 독점과 경제적 불평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마항쟁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살필 때, 경제난을 배경으로 설명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언문에 명시된 분배의 요구 자체를 읽을 필요가 있다. 이는 항쟁의 모든 참여 동기를 하나로 설명하려는 주장이 아니다. 항쟁의 출발점에서 제시된 민주주의의 내용을 충실하게 복원하자는 뜻이다.
그 요구가 대학과 일터의 청년들을 통해 거리로 확산된 과정도 중요하다. 필자는 저서 『열흘의 혁명』에서 부마항쟁을 대학생과 10·20대 근로청년이 함께한 ‘청년혁명’으로 해석했다. 소수의 비운동권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에 학생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도심에 진출한 학생들과 근로청년들이 연대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청년들이 정치적 억압과 생활의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동의 저항으로 발전시킨 경험이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에 비해 교육과 기념의 내용은 충분한가. 김나영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분석 연구는 부마항쟁 서술의 빈약함과 부산·마산의 지역 사건으로 한정하는 경향을 지적했다. 특정 역사서 전체가 부마항쟁을 누락했다고 단정하려면 개별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역사적 위상에 걸맞은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이미 제기된 과제다.
추모관의 빈자리도 그 연장선에서 살펴야 한다. 부마항쟁을 충실히 다루면 유신체제에 맞선 저항과 이후 민주주의의 좌절, 5·18로 이어지는 역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각각의 항쟁이 가진 독자성과 서로 이어지는 과정을 함께 보여줄 때 민주주의의 역사도 풍부해진다.
우원식 전 국회의장, 전재수 부산시장이 지난 4월 14일 부산대 역사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필자가 항쟁의 발생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부마항쟁의 헌법 전문 수록은 국가가 계승할 민주주의의 경험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그 의미는 역사 교과서와 전시 패널, 국가의 공식 연설에서도 구체화돼야 한다. 반복되는 생략을 점검하고, 부마항쟁을 민주주의 역사의 주변으로 밀어내 온 서술 관행을 바로잡을 계기로 삼아야 한다.
2007년 대통령이 아쉬움을 표현했던 그 전시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헌법에 새기려는 역사를 시민들이 배우고 기억하는 공간에서도 온전히 만날 수 있어야 한다.정광민 시민기자 vietho@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