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간이라면 먼저 인간을 이해해야죠” [칼럼]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시민언론 민들레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윤정모 작가. 사진 촬영 정숙 시민기자
어린 시절 영화감독을 꿈꾸던 소녀는 소설가가 됐고,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영화와 만났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소외된 이들의 삶을 기록해 온 윤정모 작가가 제3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공동조직위원장으로 관객을 만난다. 그에게 영화제는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자리가 아니다. 세상의 진실을 알리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공간이다. 윤 작가에게 영화제의 의미와 앞으로의 과제, 그리고 그의 삶에 대해 물었다.
영화는 오래전부터 제 마음속에 있었어요”
― 평생 소설을 써 온 작가로서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공동조직위원장을 맡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아홉 살 때 영화 〈아리랑〉을 봤는데, 그때는 어려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영화 속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궁금했어요. 그 궁금증이 오래 남았죠. 영화는 제 마음속에 늘 있었어요.”
― 열한 살 때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 관계자를 찾아갔다고 들었습니다.
시나리오를 써서 보냈는데 답장이 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들을 데리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찾아갔어요.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배는 고프고 돈도 없었죠. 결국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했죠. 하지만 그만큼 영화가 좋았던 거예요.”
― 고등학생 때도 영화에 도전하셨다고요?
그때도 시나리오를 써서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에게 보냈어요. 직접 찾아가기도 했죠. 그분이 영화 촬영 현장에 가보라고 하면서 차비까지 주셨어요. 어린 저를 무시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준 거예요. 그런 분들의 도움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 영화감독을 꿈꾸던 소녀가 결국 소설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오랜 문학 활동이 지금의 영화제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을까요?
여러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겪으면서 글을 쓰게 됐죠. 하지만 영화를 향한 관심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어요. 소설도 영화도 결국 사람의 이야기잖아요. 사람이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 어떤 고통을 겪고 무엇을 꿈꾸는지 보여주는 거예요. 저는 소설을 쓰면서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영화제에서도 마찬가지예요.”
2026년 제 3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공식 포스터. 사진 제공 윤정모 작가
휘슬러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의 울타리가 돼야 합니다”
―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가 다른 국제영화제와 구별되는 정체성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평소에 쉽게 접하지 못하는 세계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제예요. 같은 시대를 살아도 나라마다 환경이 다르고,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도 다르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나면서 세상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해요. 영화의 상업적 가치도 중요하겠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에 더 관심을 둬요. 인간을 중심에 놓는다는 게 중요하죠.”
― ‘휘슬러’라는 이름에는 내부고발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진실을 알린 사람들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는 현실에서 영화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세상에는 잘못된 일을 보고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진실을 알리려다가 오히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고요. 잘못된 일을 알렸는데 오히려 불이익을 당한다면 누가 나서겠어요. 그렇다고 모두가 침묵하면 세상은 바뀌지 않잖아요. 그래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 곁에 함께 서줄 사람들이 필요해요.”
― 영화제가 내부고발자들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힘이 될 수 있을까요?
우선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수 있죠. 한 사람이 겪은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어요. 혼자서는 힘들지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힘이 되잖아요. 휘슬러가 그런 사람들의 울타리가 됐으면 좋겠어요.”
260편이 출품됐어요. 좋은 작품이 정말 많았습니다”
― 올해 제3회 영화제에 세계 각국에서 260편이 출품됐는데 직접 120편 정도를 보셨다고요?
정말 많은 작품이 들어왔어요. 저는 그중 120편 정도를 직접 봤어요. 좋은 작품이 너무 많아서 선정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한 장면은 다시 보기도 하고 자막을 확인하기도 했어요. 감독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제대로 알아야 하잖아요. 제가 잘못 이해해서 좋은 작품을 놓치면 안 되니까요. 영화제가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 작품을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사회적 메시지와 예술적 완성도 사이에서는 어떤 판단을 하셨나요?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제대로 영상으로 표현했는지를 봐요. 작품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도 중요하죠. 특히 현실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삶을 담은 작품에는 더 관심이 가요. 물론 영화로서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도 봐야죠. 단순히 좋은 뜻을 담았다고 모두 좋은 영화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 올해 출품작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어떤 점인가요?
인간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작품이 많았어요. 상업적인 재미보다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고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이죠. 저는 그게 참 좋았어요.”
― 특히 전쟁을 다룬 작품에도 관심을 두셨다고요?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고 삶의 터전을 잃고 있어요. 그런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가 필요해요. 전쟁을 정치적인 구호로만 볼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봐야죠.”
― 특별히 관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요?
북극 원주민들의 삶을 다룬 영화가 있어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워요. 영상만 봐도 눈이 호강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와 삶도 담겨 있어요.”
― 또 기억에 남는 출품작이 있습니까?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교육 문제를 다룬 작품도 있어요. 여자아이들이 공부하고 싶어도 제대로 배울 수 없는 현실을 보여줘요. 우리가 직접 가서 보기 어려운 세상의 모습을 영화로 만날 수 있다는 게 중요하죠.”
2026년 제 3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샹영작 . 사진 제공 윤정모 작가
영화제를 지키려고 제 돈을 마련해 보태기도 했어요”
― 독립영화제는 재정적인 문제로 2~3회를 넘기기 어렵다고 하는데 휘슬러도 어려움이 많았나요?
정말 어려웠어요. 영화제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잖아요. 극장도 빌려야 하고 해외 감독들이 오면 숙소도 마련해야 하고, 공항에서 모셔오는 일도 해야 해요. 처음에는 돈을 마련하러 여기저기 다녀야 했어요. 저도 돈을 마련해서 보탰어요. 영화제를 계속하려면 어쩔 수 없었죠. 함께하는 사람들도 자기 시간과 돈을 들여서 일했어요. 그렇게 버텨온 거예요.”
― 재정적인 여건이 나아진다면 가장 먼저 개선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입니까?
일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경비라도 챙겨주는 거예요. 그동안은 자기 시간을 내서 무보수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개막식 안내하는 사람들부터 행사 준비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열심히 해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 일을 찾아서 하죠. 그런 사람들을 보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함께 들어요. 계속 그렇게 해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 심사위원들에게도 아직 심사비를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고요?
네. 다 전문가들이잖아요. 시간을 들여 작품을 보고 평가하는데 언제까지나 무보수로 부탁할 수는 없죠. 내년에는 그런 부분도 해결하고 싶어요. 영화제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일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정당하게 인정받아야 해요.”
김성재 집행위원장의 노트북을 보고 눈물이 날 뻔했어요.”
― 영화제를 함께 준비한 김성재 집행위원장의 업무 기록을 보고 울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김성재 집행위원장이 정말 많은 일을 했어요. 영화제를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일했죠. 해외 감독들과 연락하고 후원도 알아보고 일정도 챙겨야 하니까 일이 끝이 없어요. 우연히 노트북에 남아 있는 업무 내용을 봤는데,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알겠더라고요. 그걸 보고 눈물이 날 뻔했어요. 평소에는 힘들다는 말을 잘 안 하니까 그렇게까지 일하는 줄 몰랐던 거예요.”
― 하지만 몇몇 사람의 헌신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영화제를 오래 이어가기 어렵지 않을까요?
맞아요. 지금까지는 사람이 부족해서 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해결하는 방식으로 운영한 부분이 있어요. 이제는 달라져야죠. 누가 어떤 일을 맡을지 정하고 필요한 사람도 미리 확보해야 해요.”
지난 2025년 제 2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개막식 객석 사진. 사진 제공 윤정모 작가
4회부터는 처음부터 제대로 계획을 세우려고 합니다”
― 내년 제4회 영화제를 위해 가장 먼저 바꾸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기획과 운영을 체계적으로 바꾸는 거예요. 작품 접수를 시작할 때부터 부서별 역할을 정하고 일정을 세워야죠. 그때그때 급하게 사람을 구하는 방식으로는 안 돼요. 해외 감독들과 소통하고 작품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죠. 영화제를 이해하고 책임감을 갖고 일할 사람들이 함께해야 오래갈 수 있어요.”
― 휘슬러영화제가 10회, 20회까지 이어지려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처음 시작한 정신을 잃지 않아야죠. 좋은 뜻만으로는 운영할 수 없지만, 운영이 안정됐다고 해서 원래 하려던 일을 잊어서도 안 돼요. 인간의 삶을 보여주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원칙은 지켜야 해요.”
내가 만난 좋은 사람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요”
― 오랜 세월 소설을 쓰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온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이에요. 저는 살면서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어요. 아무것도 없던 어린 시절에 저를 도와준 사람들도 있었고, 글을 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죠. 사람에게 받은 은혜는 오래 남는 거예요.”
― 오랫동안 우리 현대사의 아픈 사건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소설로 써오셨습니다. 그런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어요. 왜 어떤 사람은 고통받아야 하는지, 왜 어떤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지 생각하게 됐죠. 저는 그런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요. 소설을 쓰면서 제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려고 했어요.”
― 사회의 아픈 현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일이 작가님 자신에게도 힘들지 않았나요?
힘든 일도 있었죠. 하지만 알아야 할 이야기는 알아야 하잖아요. 누군가는 기록해야 하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해요.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온 거죠.”
― 문학과 영화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한 작품이 세상을 단번에 바꾸지는 못하겠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있어요. 몰랐던 사실을 알게 하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런 변화가 쌓이는 거라고 생각해요.”
― 살아오면서 가장 큰 자산은 무엇이었나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편견 없이 저를 대해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래서 저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요. 제가 받은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똑바로 살려고 하는 거예요. 돈이나 명예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는 게 더 중요해요. 서로 믿고 도와줄 수 있는 관계가 있다는 건 큰 힘이에요. 영화제도 결국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거잖아요.”
1992년 7월 22일 일본에서 위안부 관련 강의를 하는 윤정모 작가(가운데). 사진 제공 윤정모 작가
젊은 영화인들이 자신의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어려운 환경에서도 영화를 만드는 젊은 감독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영화계가 어렵다는 걸 알아요. 작품 하나 만들기도 쉽지 않잖아요. 그래도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기만의 예술을 지키는 게 중요하죠.
먹고사는 문제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생각을 버리지는 않았으면 해요. 감독이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왜 이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죠.”
― 앞으로 소설가 윤정모와 영화제 공동조직위원장 윤정모, 두 역할을 어떻게 이어가실 계획입니까?
소설은 계속 쓸 거예요. 제가 해야 할 이야기가 아직 있으니까요. 영화제도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계속 도와야죠.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결국 인간을 이해하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니까요.”
― 마지막으로 휘슬러영화제를 찾을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우리가 모르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일이 나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그걸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인간이라면 먼저 인간을 이해해야죠.”
아홉 살 소녀의 마음에 자리 잡았던 영화에 대한 꿈은 오랜 세월을 돌아 다시 현실이 됐다. 평생 소설로 사람의 삶을 기록해 온 윤정모 작가는 이제 영화를 통해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재정적인 어려움과 수많은 사람의 헌신 속에서 이어온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그가 지키고 싶은 것은 영화제의 규모나 명성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진실을 향한 마음이다.정숙 시민기자 suk7505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