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그플레이션의 습격?…진짜 공포는 내년에 [사회혁신]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국제 곡물가가 들썩이는 가운데 내년부터 이른바 ‘애그플레이션’(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인한 충격이 본격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고 있다. 가뜩이나 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는 마당에 설상가상이 아닐 수 없다. 주요 곡물들의 가격이 무섭게 오르는 가운데 기상악화와 유가 급등으로 인한 부작용이 겹쳐 내년은 올해 보다 곡물 가격들의 상승세가 한층 가팔라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애그플레이션’의 습격은 저소득 국가들을 곤경으로 밀어넣을 것이 자명하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이미 높은 소비자물가가 더 높아질까 근심이다.
계속 상승 중인 세계식량가격지수
9일 금융투자업계와 금융정보서비스업체 연합인포맥스에 따르면 이달 초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9월 세계 식량가격지수는 136.0으로 전월(134.0) 대비 1.5% 상승했다.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서는 5.8% 올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던 2022년 3월(160.2)보다는 낮지만 2022년 11월(136.0)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세계식량가격지수는 지난 5월 131.0에서 6월 130.1로 낮아진 뒤 7월 131.7, 8월 134.0, 9월 136.0으로 3개월 연속 상승했다. 지난해 같은 달(128.6)과 비교하면 5.8% 높은 수준이다.
밀도 옥수수도 오르고, 콩도 설탕도 오르고
품목별로는 곡물 가격지수가 122.8로 전월보다 5.1% 올랐다. 국제 밀 가격은 흑해 지역의 물류 제약과 북미 일부 지역의 건조한 날씨 등의 영향으로 6.3% 상승해 2023년 8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예멘의 시장에서 상인이 낟알을 들어 보이는 모습[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옥수수 가격도 미국의 수확량이 예상보다 낮고 브라질의 수출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전월 대비 5.6% 상승해 3년여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흑해 지역의 교역 차질과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불확실성에 따른 연료·비료·운임 비용 우려도 가격을 끌어올렸다.
설탕 가격지수는 114.0으로 전월보다 6.1% 뛰어 품목군 가운데 가장 큰 상승폭을 보였다. 유럽연합(EU)의 사탕무 생산량 감소 전망과 태국의 설탕 생산 감소, 인도의 평년 이하 강수 등이 세계 공급 감소 우려를 키웠다. 브라질 주요 생산지역의 집중호우도 가격 상승 압력으로 작용했다.
수확한 사탕수수를 운반하는 인도 노동자들.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유지류 가격지수는 198.6으로 0.9% 상승했다. 국제 팜유 가격이 세계 수입 수요와 동남아시아의 건조한 날씨에 따른 생산 우려로 4개월 연속 상승한 영향이다.
반면 육류 가격지수는 127.9로 1.1% 하락했다. 가금육과 돼지고기 가격 하락이 전체 지수를 끌어내렸다. 유제품 가격지수도 치즈 가격 하락 등의 영향으로 0.1% 내린 119.1을 기록했다.
대두 가격의 상승세는 두드러진다.
실제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11월 인도분 대두 선물 가격은 7일 종가 기준으로 부셸(약 28.123㎏)당 1297.50센트로 장을 마감했다. 올 초까지만 해도 1000센트대 초반에서 거래되던 대두 선물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이란과의 전쟁이 발발한 2월 말부터 급격히 오름폭을 확대해 왔다.
미국과 이란이 종전 양해각서(MoU)에 합의하면서 6월 들어서는 1100센트대 초반까지 내리며 안정되는 듯했으나, 성과 없이 MoU가 만료되고 무력충돌이 재개되자 수직상승을 재개해 지난달 중순에는 한때 1300센트 선을 넘어섰다.
곡물가격들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주된 원인으로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핵심 비료 원료 공급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졌다는 점이 꼽힌다.
중동은 질소와 요소 등 핵심 비료 원료의 주 생산지다. 이번 전쟁 전까지 전 세계에서 해상으로 운송되는 비료 원료의 약 3분의 1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났던 까닭에 원가 상승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가 최근 러시아 정유시설을 타격하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주요 곡물 수출항과 흑해를 지나는 곡물운반선을 공격하면서 국제유가와 곡물가를 밀어올린 것도 배경이 됐다.
러시아 소치 인근 흑해 해역에서 불타고 있는 유조선의 모습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올해는 시작, 내년에 자칫 식량대난 올 수도
상황이 한결 심각한 건 올해 보다 내년이 더 문제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 때문이다.
올해의 경우 동태평양 적도 해수 온도가 평년보다 1.5도 이상 높은 ‘슈퍼 엘니뇨’로 곡물 가격 상단이 제한될 전망이나, 내년은 반대 양상이 나타날 우려가 있어서다.
엘니뇨는 전 세계적 이상고온과 홍수, 병충해 등을 초래하지만 미국 중부, 브라질 서남부, 아르헨티나 등 주변 주요 곡창지대에서는 강수량과 수확량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
실제 2023년 5월에서 2024년 4월, 2014년 11월에서 2016년 4월 등 슈퍼 엘니뇨가 출현했던 때 곡물 가격은 어김없이 부진한 흐름을 보였다.
그러나 슈퍼 엘니뇨 이후에는 정반대 현상인 ‘라니냐’(동태평양 적도 해수온 저하)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전 세계적 이상저온과 흉작이 나타난다.
컬럼비아대 국제기후사회연구소(CCSR/IRI)는 동태평양 적도 해수면 온도가 올해 10월에서 내년 1월 정점에 이른 뒤 진정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진영 대신증권 연구원은 곡물 가격 상승의 걸림돌이 소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비료는 내년 애그플레이션을 만들 원흉”이라면서 내년 동태평양 연안 해수면 온도가 하락 방향이라면 천연가스 가격은 상승 방향이고 비료와 이를 기반으로 하는 곡물 또한 상승이 불가피하다”고 내다봤다.
산악 가이드 에드윈 프라다가 2024년 4월 19일 콜롬비아 보야카 지방의 엘 코쿠이 국립 자연공원에 있는 리타쿠바 블랑코 빙하의 크레바스 근처에 서 있다. 콜롬비아에서 가장 높은 눈 덮인 봉우리 중 하나인 리타쿠바 블랑코 빙하는 균질한 눈으로 덮여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엘니뇨 현상으로 땅이 녹아 거대한 균열이 드러났다. 2024.4.19. AFP 연합뉴스
에너지 가격 급등하면 비료 수급 차질, 파종 악영향
에너지 가격이 이대로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내년 상반기 파종 시즌 비료 수급에 영향을 미친다면 저소득 국가를 중심으로 식량위기가 초래될 가능성도 있다.
이란을 제외한 중동 지역 9월 원유수출량은 일평균 1650만 배럴로 전쟁 발발 전의 87% 수준까지 회복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전쟁으로 정제설비가 다수 피해를 봤고 보험료 인상 등 제반 비용도 상당해서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의 아민 나세르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5일 영국에서 열린 에너지정보포럼에서 호르무즈 해협이 전면 개방되더라도 수요를 맞추면서 재고를 보충하는 데는 길게는 2년이 걸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오만 무산담에서 바라본 호르무즈 해협 풍경. 많은 선박이 닻을 내린 채 떠 있다. 2026. 06. 03 [로이터=연합뉴스]
‘애그플레이션’은 한국 소비자물가에도 직격탄
‘애그플레이션’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높은 소비자물가에 신음하고 있는 우리나라 중산층과 서민들의 주름살이 더 늘어날 일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대로 내려왔다. 두 달 만에 2%대로 내려온 것이지만 실상을 뜯어보면 그렇게 보기도 힘들다. 기저 효과 등을 감안하면 9월 물가도 상승세가 만만치 않아서다. 한국은행은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3%내외로 전망하기도 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한 건 장바구니 물가의 폭등이다. 장바구니 물가의 앙등은 서민들의 삶을 매일 고단하게 만든다.
지난 4일 한국소비자원 가격정보 종합 포털 ‘‘참가격’의 8월 가격 동향을 보면 다소비 가공식품 26개 품목 가운데 24개 품목의 가격이 지난해 같은 달보다 올랐다.
‘애그플레이션’의 습격은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장바구니 물가를 더욱 무겁게 만들 것이다. 이래저래 쉽지 않은 시절이다.
이두원 국가데이터처 경제동향통계심의관이 2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6년 9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관해 브리핑하고 있다.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작년 동월보다 2.9% 상승했다. 2026.10.2. 연합뉴스
이태경 편집위원,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편집위원 red196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