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위험한 이유 [국제] 교토의 법륭사(호류지). 나무위키
영국은 유럽대륙으로부터의 수혜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영국은 유럽대륙의 로마, 색슨 그리고 바이킹과 노르만족 등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으로부터의 수혜를 전적으로 부인한다.” (‘부여 기마민족과 왜’ 273)
미국인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90-1996)의 ‘부여 기마민족과 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15세기 일본 선화가 셋슈(雪舟)의 낙관이 있는 수묵화 연구’로 서양인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컬럼비아대학에서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은 코벨은 이 책에서 일본의 고대 일정 시기(서기전 3세기~서기 7세기 1천 년) 역사와 문화는 거의 전적으로 한반도와 거기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의 창작이거나 그 절대적 영향 아래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일본은 7세기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직계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일본 독자적인 체제를 갖춰 가기 시작할 때 사실관계를 뒤집은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로부터 받은 문화적 ‘수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유사 이래 한일관계 중심은 일본에 있었고 한국은 그 아류 내지 종속적 존재로서 오히려 그 수혜자라 주장한다. 지금도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부여 기마민족과 왜(倭).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옮김. 글을읽다, 2006년
코벨이 보기엔 한일간에 문화적 주종관계가 처음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도쿄가 문화와 학습의 발신지가 되면서부터다. 말하자면 그전까지 2천여 년 동안 문화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일본의 주류시각을 유럽 역사에 대비시키면, 로마가 영국 또는 독일지역을 지배한 한 게 아니라 로마가 그들 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때로 식민지배까지 당했으며, 그리스·로마 문화도 실은 영국 또는 독일의 앵글로색슨족이나 게르만족 문화의 종속적 아류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말이 안 된다. 물론 코벨이 그렇게 주장하진 않지만, 그는 712년에 간행된 일본 ‘고사기’나 720년에 간행된 ‘일본서기’가 그 정도로 한일관계의 역사적 사실과 담론을 완전히 뒤집었고, 지금까지도 일본 주류 보수우익 세력은 그 허구를 일본의 정사로 정립해 놓고 바로잡을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본다.
일본이 위험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사실에서 비롯된다. 현재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기 존재의 뿌리를 스스로 부정하는 자해 행위에 가까운 현대 일본 주류세력의 역사 문화 인식태도는 근대적 민족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사조차 지금의 민족주의 시각으로 재단하는 우물 안 개구리식 국가주의적 관념 속에 갇혀 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20세기 중반까지 강화돼 간 군국주의 침략과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 외에 달리 해석하기 어려운 일본의 이런 ‘대국주의적’ 역사 날조”와 관련해 코벨은 이렇게 쏘아붙였다.
나는 일본이 예술분야에서 한국에 진 빚은 나라(奈良)시대 전체를 망라하며, 8세기 중반에 가서도 일본은 하찮은 문명 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피스는 한국의 강력한 영향력은 10세기까지도 일본에 미쳤다고 말했다. 우습기 짝이 없는 것은 일본의 예술사가들이 일본의 보물 법륭사(호류지)의 근원을 추적하면서 중국, 인도, 그 위에 멀리 로마와 그리스까지 들먹거리면서도 정작 한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 경우 ‘역사의 날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다.”(159. 이하 괄호 안의 숫자는 다른 책을 언급하지 않는 경우 ‘부여 기마민족과 왜’의 해당 내용 수록 쪽수임)
오래 일본에 머물며 일본불교 선(선)미술을 연구해 16권의 책을 내는 등 패전국 일본의 문화적 전통을 영어권에 알린 일본문화 전문 연구자가 한 얘기다.
일본 교토의 법륭사(호류지)의 오랜 목조건물. 나무위키
‘백제관음’으로 불리어 왔음에도 중국미술 양식”
나라에 지금도 서 있는 세계최고(最古)의 목조건물 법륭사와 거기에 소장돼 있는 ‘백제관음’불상과 ‘구세관음’, 금당벽화 등이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만들거나 가져간 것이라는 것은 의식 있는 일본의 연구자들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대다수 일본인들은 이를 알지 못하며, 심지어 ‘백제(구다라)관음’이란 명칭으로 옛날부터 호명돼 온 불상조차 백제의 것이 아니라 중국 것이라 여기거나 그렇다고 주장한다. 코벨이 보기에 백제관음은 머리의 보관 장식이 바로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장식품의 연화 당초문과 꼭 같고 화판에 돋아난 꽃잎 수도 동일하며, 당초문의 넝쿨 말린 모양새도 똑같다. 진한 파랑색 구슬이 장식돼 있는 보상화문의 청동 투조관은 ‘나는 한국의 기법이요’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식의 금속공예는 일본에선 전혀 시도된 바가 없었다.”
호류지의 백제관음상. 위키백과
그럼에도 미즈노 등 일단의 일본학자들은 아스카 미술품에 중국미술 양식이 보인다”며 한국은 논의 대상에서 아예 빼버린다.(‘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82-90) 당시의 일본은 중국을 직접 오갈 수 있는 배도 항해술도 없었다.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글을읽다, 2008년
한사코 한국 영향 배제하려는 위험한 심리 상태
목제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는 교토 고류지(광륭사) 정원에는 이 절의 건립자가 신라계 도래인 하타(秦)씨임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는데, 하타씨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수식어가 들어간 바로 위의 구절이 패여나가 삭제된 모습이다. 그렇게 당연히 새겨 넣었던 것도 파내서 지워버린 것이다.
한사코 한국의 영향을 배제하려는 국가적 차원의 저런 이상심리 상태는 극도의 공황이 아니면 지독한 경멸이나 비하 탓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어느쪽이든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관계에서는 나올 수 없는 반응이다. 이는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이 시작된 이후 형성된 한일간의 지극히 비정상적인 관계가 지금까지도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가해 사실에 대한 제대로 된 성찰도 규명도 반성도 없이 여전히 뒤틀린 시선으로 한일관계를 보고 규정하려는 일본 보수우익 주류세력에게 있다. 그런 일본이 위험한 것은 다시 그 과오를 언제든 되풀이할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정년퇴임 뒤 한국에 온 일본문화 전문가
코벨이 한국문화 연구에 뛰어든 것은 만년에 가까워서였다. 1941년에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와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 교토의 다이토쿠지(대덕사) 말사에서 9년간 일본불교미술을 연구한 뒤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대에서 한국미술사를 포함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던 그는 1978년 정년퇴임 뒤 풀브라이트 연구기금을 받은 경력교수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일본문화를 연구하면서 그 뿌리에 한국문화가 있다는 걸 강렬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15세기 일본 수묵화가들 대다수가 조선인임을 밝힌 후쿠이 리키지로, 컬럼비아대의 일본학 개척자 쓰노다 류사쿠 같은 미술사학자들이 그의 스승이었다.
3~6개월쯤 머물 예정이었으나 9년을 체류하면서 ‘일본 것’ ‘중국 것’으로 알아 왔던 수많은 미술품들이 사실은 한국에서 건너갔거나 한국인 예술가들 손에서 만들어져 나온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챘다.
예컨대 1982년 당시 한국에는 수준 높은 고려불화가 한 점도 없었지만, 일본에는 1백여 점이나 되는 고려불화가 존재했는데, 모두 ‘중국불화’로 알려져 있었다. 일본은 자국 유래가 아니면 중국 것으로 돌리는 이상한 습벽이 있다. 이 불화들이 나중에 고려라는 국적을 되찾을 수 있게 된 데에는 일본의 야마토분카칸의 드문 연구자들 덕이 컸다. 고려 불화들이 대거 일본에 간 것은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 탓도 있지만 왜구 등의 노략질 때문이었다.(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205)
내가 컬럼비아대서 배운 일본사는 가짜였다”
1981년 12월 16일에 코벨이 코리아타임스에 쓴 ‘내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사는 가짜였다’는 칼럼은 그런 깨달음에 대한 고백이었다.
한국 체류는 한중일 예술사 전반에 대한 재성찰이자 자기자신의 재교육 기간이기도 했다. 그는 오버린대학에서 같이 일본사를 배운 에드윈 라이샤워(주일 미국대사 역임)가 한국미술을 두고 중국문화의 변방적 아류”라고 한 말이 잘못된 것임을 공박하는 장문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한국을 좀 안다는 말을 들었던 라이샤워조차 그랬듯이 구미인들은 한국과 한국문화를 철저히 일본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본다.
1978년부터 1986년 여름까지 한국에 체류하면서 코벨은 코리아타임스, 코리아저널, 코리아헤럴드 등 한국에서 발행되는 다수의 영문 매체에 한국문화에 관한 연구결과들을 줄기차게 발표했다. 모두 7권의 책과 1400편이 넘는 그의 글들 중에서 한글로 번역해 소개한 것은 1982년 경향신문뿐이었다. 당시 대중이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은 내용을 담았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 코벨을 한국 대중에게 알리는 데에는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를 지낸 번역 및 편역자 김유경 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외국인이 쓴 책 영향력이 백배 천배 강하다
1890년대에 나온 이사벨라 비숍의 여행기에서도 비숍은 한국과 한국인들을 매우 좋아하고는 있지만 가난하고 미신에 얽매인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한국 관련 저서로 외국인이 쓴 책은 한국인이 쓴 것보다 백 배, 혹은 천 배 가량 더 강력하게 세계여론에 영향을 끼친다.”(153)
김유경 씨가 코벨의 글들을 번역하고 책으로 엮어 내는 어려운 작업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코벨의 글 자체가 번역해 놓으면 가독성이 높은 글이긴 하지만, 그가 외국인 전문가라는 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의 정당한 비판이나 반박조차 너무 쉽게 ‘반일’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마치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가진 억지주장처럼 몰아가 자신들의 잘못된 주장을 감추면서 역공을 가한다. 하지만 코벨의 일본 비판에 ‘반일’ 딱지를 붙이긴 어려울 것이다. 그의 아들 앨런 카터 코벨도 한국 무속과 불교문화 등을 연구하며 어머니가 개척한 길을 따라가고 있다.
그리피스 한국이 일본예술의 근원”
한국이 일본예술의 근원임은 추측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입증할 수많은 자료가 일본에 넘쳐난다. 일본 고유의 예술은 9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발아했다.”(155)
이는 메이지 유신 다음 해인 1869년에 도쿄대에서 물리, 화학을 가르치러 갔다가 영어도 가르치면서 일본연구를 시작했던 윌리엄 그리피스(1848-1928)의 또 다른 글이다. ‘은자의 나라 조선’(Corea, the Hermit Nation. 1882)을 쓴 바로 그 그리피스다.
1868년(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운 논리를 발판으로 한 제도가 발동하면서 일본은 언론을 지배하고 강요된 교육, 역사 날조를 저질렀으며 새로이 조장된 미카도이즘(군국주의)에 반대하는 학자들을 잡아다 벌주기 시작했다.”(157)
호류지 구세관음. 나무위키
페놀로사 호류지 ‘구세관음’은 한국서 온 보물”
법륭사에 500년이 넘도록 비단헝겊에 싸인 채 공개되지 않았던 불상이 하나 있었다. ‘일본 불교의 아버지’라는 쇼토쿠 태자를 새긴 불상으로 알려져 왔다. 1880년대에 미국 미술사가 어니스트 페놀로사(나중에 보스턴박물관 동양미술 학예관)가 일본정부의 예술고문 자격으로 그 헝겊에 싸인 화려한 청동 투조(재료의 면을 잘라내는 조각 기법)의 불상을 풀어 본 순간 환희에 차서 지른 탄성이 그렇구나, 이것은 한국서 온 보물이구나!”였다.(157)
코벨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는 7세기 중엽까지 왜(야마토)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한국계 실력자 소가 우마코의 조카이자 사위였다. 그런데 ‘구세관음’으로 알려지게 된 그 빼어난 솜씨의 불상은 쇼토쿠 태자가 아니라 백제 위덕왕이 부왕인 성왕의 모습을 새겨 일본에 보낸 것임이 1997년 법륭사 고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7세기 중엽까지 ‘왜’ 지배한 부여 기마민족
코벨은 일본 고대역사의 주무대는 규슈 북부와 기나이(나라, 아스카, 오사카, 교토 일대) 등 일본 서부지역이었고 4세기부터 7세기까지 그곳을 지배한 것은 말을 끌고 들어간 한반도의 부여 기마족이었으며, 이후 현지 토착인 세력이 대두하면서 순수 한반도계 직계지배체제는 무너졌으나, 토착세력의 주력도 서기전 3세기부터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었다고 본다. ‘4세기’는 코벨에 따르면, 일본 고대사의 영웅 진구(神功)황후가 ‘삼한 정벌’에 나섰다는 서기 369년이다. 코벨은 일본서기에 실린 진구의 삼한(한반도 남부) 정벌이 실은 부여 기마족의 야마토 정벌을 뒤집어 놓은 것이라고 본다. 거기에 실린 역사적 디테일들 다수는 논픽션(사실)일 수 있으나 그것으로 엮은 기본 줄거리는 뒤집힌 픽션인 것이다.
코벨은 진구(신공)가 한반도 남부를 정복한 왜의 영웅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지닌 가야의 무녀였으며,(그때는 가야와 왜에 불교가 전래되기 전이었다) 기마족 연합세력을 꾸려 일본 정벌을 주도한 인물로, 이후 거기에 합세한 무장세력과 함께 야마토의 새로운 지배체제를 창출해낸 인물로 본다.
신공황후 삼한정벌, 사실은 부여 기마족의 왜 정벌
일본서기에는 그 3년 뒤인 372년에 진구황후(속국 왜의 왕)에게 백제왕이 ‘칠지도’를 하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의 모든 학자들은 이 명문(칠지도에 새겨진 문자)에 나와 있는 ‘속국’을 일본이 아닌 백제로, 칼을 보냈다는 ‘왕’을 야마토의 왕으로 해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절대 그럴 수 없는 명백한 이유는 바로 서기 369년 백제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정점에 올라 있던 때였다는 사실이다. 이때 백제 근초고왕은 평양으로 쳐들어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였다.”(177)
코벨은 칠지도가 전장에 나간 부왕 근초고왕을 대신해 왜국 정벌에 나선 신공왕후에게 장도를 축하는 하사품으로 보냈거나, 그 3년 뒤인 372년에 정벌 성공 축하 선물로 보낸 것으로 본다.
본래 7개의 가지나 9개의 가지는 시베리아 유래의 샤머니즘에서 ‘우주 나무’를 가리키며, 신라 금관이 7개 또는 9개 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것도 그와 연관이 있다.
코벨은 중국 사서 위지 동이전에도 나와 있듯이 당시 일본에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철제 무기로 무장한 기병을 앞세운 부여 기마족이 손쉽게 일본을 지배했을 것으로 본다.
한국을 지배한 모든 왕조의 시조는 부여족이었으며, 이들은 또한 일본문화에 크나큰 발전을 이룩한 한국 이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그리피스)
일본 중앙의 지배적인 성씨 중 30%가 한국계
815년에 펴낸 ‘신찬성씨록’은 일본 중앙정부의 지배층을 형성한 가문 일람표인데, 전체 1059개 성씨 가운데 한국(조선)에서 건너온 것이 324개로 약 30%를 차지했다.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가 유전자 연구를 통해 오늘날 일본인의 24%가 한인계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리피스의 시각에 동조하는 코벨은 부여 예맥의 기마족은 원래 요동지역(고조선의 동이족 거주지역?)에 있었는데 346년 선비족의 침입을 받은 이후 고구려와 합치기도 하면서 점차 한반도로 남하해 신라, 백제, 그리고 가야를 거쳐 규슈, 기나이로 이주했다고 본다.
부여 기마족 정권은 신라계 소가 가문이 피의 숙청을 당한 645년 정변까지 지속되다가 이후 토착세력들 힘이 커지면서 새로 등장한 지배세력이 체제 정당성과 기반을 다지기 위해 편찬한 것이 고사기와 일본서기이며, 그것을 위해 부여 기마족의 역사를 야마토 중심으로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 일본정복설’
한반도 기마민족이 일본 규슈를 정복한 뒤 기나이 등 혼슈로 이주해 갔으며 초대 천황 ‘진무’가 허구의 인물이라는 ‘부여 기마민족설’을 처음으로 발표(1948년)한 것은 일본 고고학자 에가미 나미오였다. 그가 만일 일본 패망 전에 그것을 발표했다면 즉시 감옥에 갔거나 처형당했을 것”(코벨)이다. 그보다 앞서 1921년에 역사학자 기다 사다키치가 부여는 한국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건국했을 뿐 아니라 4세기에 일본으로 건너와 나라를 세웠다. 적어도 한국의 삼국과 일본, 이들 4개 나라 건국에는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했다. 기마민족이란 말을 쓰진 않았으나 에가미의 주장과 닮았다. 그때는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1912-21) 시대로, 그런 주장까지 허용됐던 듯하다.
그 시절에 ‘발해사고’를 쓴 역사학자 쓰다 소키치도 일본서기가 일본 황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야마토의 관리들이 만들어낸 위작이라고 발표해 큰 관심을 끌었다. 일본학자들이 보기에도 진구황후 삼한정벌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끝나고 1930년대 중반 이후 전시동원체제가 가동되면서 그런 주장들은 철퇴를 맞게 된다. 쓰다는 1942년 왕실존엄 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학교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저작들은 판매금지됐다. 그때 일본 교육계는 일본서기의 의문점을 묻는 학생들을 때리고 감점하며 벌을 주었다고 한다.”(204)
군국 일본이 패망한 뒤인 전후에 기마민족설을 발표한 에가미도 일본을 건국했다는 기마민족이 어디서 왔느냐는 문제는 얼버무렸다. 그의 글을 실은 잡지사는 몽골 지도를 제시했다. 에가미가 원래 부여족 근거지로 얘기했던 만주 동부, 한반도 북부 얘기는 쏙 빼버리고 먼 몽골을 거론한 이유는 한국과 한반도를 피해가기 위해서였다. 일본을 지배한 기마민족이 한반도계여서는 안 되니까.
김석형의 한반도 삼국의 일본열도 분국론
1969년에 도쿄에서 발행된 북한 역사학자 김석형(1915-1996)의 논문 ‘일본열도 내 삼한 삼국의 분국론’을 본 코벨은 김 교수의 논문은 규슈 북부에 위치했던 일본 내 고구려 식민지에 더 큰 비중을 부여한 것만 빼고 기본입장은 내가 주장해 온 것과 같았다”다며, 부여족이 일본에 간 서기 369년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 연대까지도 똑같았다”고 했다.
자신이 반공주의자라고 밝힌 코벨은 한국 사학계에서는 오직 두 학자만이 나의 존재를 인정한다”며 그 중의 한 교수가 김석형 교수의 논문 복사본을 그때 보여 주었다고 했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자주 전쟁이 일어나 이에 질린 한국인들이 점차 왜로 이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왜 원주민들에 비해 한국인 집단 거주지는 훨씬 더 선진화된 구성원으로 이뤄진 곳이 됐다.
서기 2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한반도에서 백제, 신라, 고구려가 입지를 굳히며 점점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하는 동안, 왜에는 수많은 한국인 식민지촌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본국인 한반도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다.
4세기 들어 왜 땅의 한국 식민지는 더 강력한 정치적 집단이 됐으며, 세 군데의 중심세력이 존재했다. 하나는 나라를 중심으로 동부지역에 거점을 마련한 가야 이주민들이었다. 두 번째는 (시마네 현)이즈모와 기비지역의 신라 이주민들이다. 나머지 하나는 규슈 북부를 차지한 백제인들이었다. 이들 세 지역은 말 그대로 왜 땅의 한국 식민지였다.
서기 5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일관계에서 한국은 언제나 선두 역할을 담당해 갔다. 일본이 대화(야마토) 왜로 통합되었을 때도 한국인 후예들은 강력한 존재였다. 그러나 이들 ‘식민지’들은 서기 600년 무렵부터 650년 사이 본국과 단절되고 모두 ‘야마토’로 유입됐다. 600년께부터 야마토는 한반도 삼국과는 별개의 국가로 한일관계를 생성하기에 이르렀다.”(171)
그 무렵에 가야가 무너지고 백제가 멸망한 한반도의 정세급변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김석형의 이런 주장에 대해 코벨의 일본인 번역자가 보내온 개인적인 소견은 다음과 같았다.
일본학자들은 이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일본학자들은 고대에 강력하고도 유일한 집단으로 ‘왜국’이 일찍이 존재했으며, 이들의 권력은 한반도를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믿는다.”(172)
오사카 사카이에 있는 닌토쿠 천황릉. 나무위키
일본 당국이 대형 고분들 발굴을 막는 이유
그런지 안 그런지는 기마족 지배자들의 거대한 무덤들을 발굴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예컨대 세계 최대의 전방후원분이라는 열쇠구멍 모양의 거대한 무덤 ‘닌토쿠 천황릉’ 같은 큰 무덤들을 발굴해 보면 그 주인공들이 어디서 온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왕실이나 일본 당국은 무덤 속 임금님 뼈를 귀찮게 해드리면 안 된다”는 등의 이유로 주요 무덤들의 고고학적 발굴을 엄금하고 있다.
일본의 대형 고분들은 오직 나라-오사카-아스카를 잇는 지역에만 축조돼 있는 특징이 있다. 그 지역은 코벨이 말한 기마족의 지배 지역이다. 그런데 그 지역 무덤이 뜻하지 않게 그 내부 비밀을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낸 적이 있다.
컬럼비아대학의 쓰노다 류사쿠 일본사 교수는 1872년 태풍으로 닌토쿠 황릉 일부가 무너져 보수하는 동안 내부를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그 안에는 너무도 많은 대륙적 솜씨의 부장품들이 들어 있어서 놀라웠다. 4세기에 살았던 이 왕의 부장품들은 한반도, 한국과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부정할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108)
만일 그런 능묘들의 부장품들이나 인골이 ‘고대의 강력하고도 유일한 집단’으로 ‘한반도를 능가하는 왜국’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해도 발굴을 막을까.
발굴을 막는 것 자체가 이미 진실은 그 반대라는 것을 얘기해 준다.
1985년에 나라 현 이카루가 마을에 있던 후지노키 고분을 발굴하던 일본 발굴단은 너무 공기를 쐬면 무덤이 파괴된다”는 이유로 파헤치던 무덤을 허겁지겁 도로 덮어버렸다. 이유는 예상과 달리 한국형 유물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원래 직경 30m, 높이 7.5m 크기로 경주 왕릉이나 오사카 인근 무덤들보다는 작은 편이어서 발굴 허가를 내줬는데, 예상치 못한 부장품들이 나오자 중단시킨 것이다. 백제 무령왕능과 신라,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꼭같은 금동신발 등은 이 무덤의 주인이 어디 출신인지를 확연히 드러냈다.(‘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50-54)
공주 무령왕능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일본 후지노키 고분에서도 이와 꼭같은 형태의 금동신발이 나왔다. 위키백과
일본은 지금도 여전하다
법륭사(호류지) 금당 삼존불을 만든 건 한반도 기마족 후예들이며, 동양 최대라는 동대사(도다이지) 청동대불을 만든 것도 그들이지만, 신문은 일본불교의 전파와 불교예술의 전통은 오로지 중국에 있을 뿐”이라고 한 일본 불교영화를 보고 난 한국 유학생이 놀랍다”며 감탄한 얘기를 인용해서 실었다. 그 한국인 학생은 일본항공(JAL) 장학금 수혜자였다.(189)
코벨이 1982년에 경향신문에 연재된 자신의 칼럼을 출판하기로 했다가 출판사가 국내학자들한테 검증받고 내겠다”고 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코벨은 그것을 겁먹음”이라고 표현했다. 일본의 진구황후 삼한정복 주장이나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는 얘기를 한국 사람들도 꺼내기를 두려워하고, 다수의 엘리트 한국학자들도 입을 닫거나 근거 없는 걸로 치부했다. 코벨은 일본 패전 뒤 해방된 한국의 주류 역사학자들 다수가 일제 강점기에 식민사관을 주입받고 훈련받은 자들일 테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젊은 연구자들까지 침묵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질타했다.
일본이 한국/한반도의 흔적을 지우고, 한국의 엘리트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거기에 동조하거나 침묵하면 할수록 중국의 한국/한반도 흔적 지우기인 ‘동북공정’은 순풍에 돛 단 듯 진행될 것이다. 어쩌면 일본과 중국은 그런 점에서 비밀협약이라도 맺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반도 역사와 문화의 해체와 중일 양극으로의 분해 흡수야말로 그들 나라가 오래 전부터 바라던 것 아닌가.한승동 에디터 sudohaan@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