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풍으로 권력 잡아 전쟁 수렁에 밀어넣은 무솔리니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는 원래 사회주의신문 편집장이었다. 이 대목에서 벌써 실소가 나온다. 노동자 편에서 글을 쓰던 사람이 훗날 노동조합을 때려잡는 독재자가 되는 건 흔한 배신극이지만, 무솔리니는 더 노골적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참전을 놓고 사회당과 갈라서더니, 전쟁이 끝나자 이탈리아가 승전국인데 왜 이렇게 초라하냐 는 민족적 자존심에 불을 지르는 쪽으로 갈아탔다. 그리고 검은 셔츠를 입은 폭력배들, 이른바 파시스트 전위대를 조직해서 거리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1922년 로마 진군 이라는 것을 했는데, 사실 이건 진군이라기보다 협박에 가까웠다. 무솔리니 본인은 기차를 타고 로마에 도착했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다. 걸어서 쳐들어간 게 아니라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Victor Emmanuel III, 1869~1947)가 겁을 먹고 그를 총리로 임명해버린 것이다. 무력시위 한 방으로 합법 정부의 수반이 된 셈이니, 쿠데타치고는 가성비가 이보다 좋을 수 없다.
1939년의 무솔리니(위키피디아)
말 잘하는 사람이 죽으면 정권이 흔들린다
권력을 잡은 뒤에도 무솔리니는 한동안 의회라는 형식을 유지했다. 그런데 사회당 의원 자코모 마테오티(Giacomo Matteotti, 1885~1924)가 1924년 5월 30일 의회 연단에서 파시스트의 부정선거와 폭력을 조목조목 까발렸다. 야유와 협박 속에서도 한 시간 반을 버티며 발언한 이 사람은, 그로부터 열흘 뒤 백주 대낮에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시신은 두 달 뒤에야 발견됐다.
이 사건으로 무솔리니 정권은 휘청거렸다. 암살을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하지만, 정황상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위기에 몰린 무솔리니가 선택한 길은 반성이 아니라 더 큰 강압이었다는 것. 1925년 1월, 그는 의회에서 이 모든 것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고 당당하게 선언하며 오히려 독재를 완성해버렸다. 잘못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실은 그래서 어쩔 건데 라는 배짱을 부린 셈이다.
이탈리아 북부 아드리아해 연안 항구도시 라벤나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정도 떨어진 프레다피오 마을에 위치한 무솔리니의 생가., 현재 이 건물에서는 현대사 관련 전시가 열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감옥에서 노트만 쓰다 죽은 남자
무솔리니의 반대편에는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라는 인물이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을 만든 이론가였던 그람시는 1926년 체포되어 11년을 감옥에서 보내다가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검사는 재판정에서 이 자의 두뇌가 20년간 작동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고 말했다는데, 정작 그람시는 감옥 안에서도 손을 놓지 않고 노트를 채워나갔다. 이게 훗날 『옥중수고』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와 20세기 사상사에 굵직한 자국을 남겼다. 몸은 가두어도 생각은 못 가둔다는 진부한 말이, 이 사람 앞에서는 진부하지 않다.
1916년의 그람시(위키피디아)
히틀러의 사부였는데, 결국 제자보다 못한 최후
무솔리니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보다 먼저 파시즘 노선을 개척한 선배였다. 히틀러가 오히려 무솔리니를 흠모하고 따라 했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2차대전이 터지자 이탈리아군의 실력은 기대에 못 미쳤고, 무솔리니는 갈수록 히틀러에게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됐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무솔리니를 두고 히틀러의 시종 이라 비아냥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렇게 부풀렸던 허세가 끝내 어떻게 됐냐면, 1945년 스위스로 도망치려던 무솔리니는 파르티잔에게 붙잡혀 총살당했고, 시신은 밀라노 광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스스로 로마 제국을 재건하겠다던 사람의 마지막치고는 참으로 허무하다.
1938년 뮌헨 협정 체결 당시의 모습. 오른쪽부터 갈레아초 치아노(이탈리아 외무장관), 베니토 무솔리니, 아돌프 히틀러, 에두아르 달라디에, 네빌 체임벌린(위키피디아)
한국이 곱씹어야 할 대목
이 이야기를 그냥 남의 나라 옛날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는 과정을 보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정부를 뒤엎은 게 아니라 국왕이라는 헌법기관이 겁먹고 스스로 문을 열어준 결과라는 점이 눈에 띈다. 제도가 제도를 지키지 못하면, 총 한 발 안 쏘고도 나라가 넘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2024년 12월 3일 밤, 이 나라에서 있었던 윤석열의 계엄 선포 소동을 겪은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다.
또 하나, 사회당 의원 자코모 마테오티의 죽음 이후 무솔리니가 택한 길이 사과 가 아니라 책임을 인정하는 척하며 되레 판을 키우는 것 이었다는 점도 곱씹을 만하다. 잘못이 드러났을 때 오히려 더 뻔뻔해지는 쪽을 선택하는 권력자의 패턴은, 시대와 나라를 가리지 않고 반복된다. 반면 그람시처럼 감옥에 갇혀서도 기록을 남기고 사유를 멈추지 않은 사람들 덕분에 역사는 결국 방향을 되찾아왔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12·3 내란 관련 인물들의 재판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이 오래된 이탈리아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1945년 4월 28일 스위스로 탈출하려다 붙잡혀 총살 당한 봄바치(왼쪽부터), 무솔리니와 그의 여인 클라라 페타치, 파볼리니, 스타라체의 시신들이 밀라노의 피아잘레 로레토 광장에 있는 주유소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시민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