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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반주 하룻밤, 보컬 녹음 반나절… 공장의 불빛 21곡 완성

반주 하룻밤, 보컬 녹음 반나절… 공장의 불빛 21곡 완성
[사람들]
대중문화 평론가 김창남이 자신의 저서 에서 회고한 노래굿 제작에 참여할 때의 이야기다. 1978년 겨울 어느 날 메아리 선배로부터 신촌 어딘가에 모이라는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에서 김민기를 처음 만났다. 대학생이 된 후 하루도 그의 노래를 듣거나 부르지 않은 날이 없었던 김민기. 대학가에선 이미 신화적인 존재가 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그의 이름 뒤에 ‘형’이라는 호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화여대 방송반 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겼다. 도착하자마자 ‘민기 형’은 악보를 내밀며 녹음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미 녹음된 반주에 보컬을 입히는 것이었다. 바로 그 노래극 이었다.” 제작 과정은 그야말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서울대 메아리나 이화여대 ‘한소리’ 회원들에게는 점조직으로 기별이 갔다. 경동교회 ‘빛바람 중창단’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집결지에 모여서야 어떤 사람들이 왔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알았다. 눈앞에 나타난 ‘전설’ 김민기는 악보를 나눠주며 할 일을 알려줬다. 군사반란이 일어났던 1979년 12월 12일 밤 .공사장을 전전하던 김민기가 해송유아원 건립 기금모금을 위한 음악회에 참석해 김영동(왼쪽)과 공연을 하고 있다.   이 사진에서 1978년 공장의 불빛을 만들고 녹음하던 때의 김민기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사진출처: SBS 뒷건 김민기 영상 갈무리 만나자마자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각자 악보를 익히고, 녹음된 반주에 몇 차례 맞춰보고, 파트별로 연습하고, 이어 다 함께 입을 맞췄다. 그리고 녹음에 들어갔다. 그날로 끝내야 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했다. 대학 방송실 스튜디오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 방음이 시원찮은 게 걱정스러웠다. 소리가 새어 나가선 안 됐다. 문이란 문은 밀봉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안 돼, 문밖에 사람을 두어 주위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송창식의 ‘바다 같은’ 도량 덕분에 반주를 미리 녹음했던 송창식의 연습실도 방음이 허술하긴 마찬가지였다. 소리나 빛이 새 나가지 않도록 문이란 문은 담요로 막고, 테이프로 막았다. ‘동방의 빛’은 초저녁에 녹음을 시작해 이튿날 새벽 일을 끝냈다. 하룻밤 만에 21곡의 반주를 모두 녹음하고는 전장 정리 깨끗이 한 뒤 사라졌다. 은 장면마다 서사가 다르다. 서로 다른 21개의 장면을 음악으로 제대로 표현하자면 음악적 장르와 스타일 모두 달라야 했다. 구전 가요, 찬송가, 국악, 레치타티보, 발라드, 블루스, 재즈, 록, 포크 등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스타일의 노래가 이 한 편의 노래굿에 대거 등장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이런 어려움에도 테이프 의 음악적 완성도는 높았다. 노래굿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와 음악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때문에 음악적 감동이 컸다. 그것은 순전히 ‘동방의 빛’이라는 당대 최고의 ‘딴따라’, 연주자 집단의 덕이 컸다. 오리엔트프로덕션 전속 밴드였던 동방의 빛 멤버, 강근식  이장희  조원익(사진 왼쪽부터) 이  2019년 2월 13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장희가 멤버로 있던 동방의 빛은 공장의 불빛 녹음에 참여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사진출처: 동아일보    김민기가 메아리 등 노래하는 후배들을 부려 먹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노래패 ‘메아리’는 테이프 제작에서 영감받아 1979년 ‘메아리’만의 음반을 제작했다. 김민기는 농사를 짓겠다며 고향 익산으로 내려간 터여서 도울 수 없었다. 녹음실을 구하지 못해 관악구 봉천동의 한 카페에서 녹음했지만, 메아리의 이 카세트테이프는 민중가요 운동을 크게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시위 현장이나 노동 현장에서 부를 노래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메아리는 다시 2집을 제작하기로 했는데, 이번엔 김민기의 도움으로 녹음실 문제를 해결했다. 이장희가 운영하던 랩 스튜디오에서 최고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고, 그해 여름 비합법 앨범 2집을 내놨다. 김민기와 함께하다 보니 거리 싸움의 투사도 ‘이 세상 어딘가에’( 마침 노래)서 그런 사람, 그런 예술인, 그런 딴따라와도 만났다. 은 동일방직 노동조합 탄압 사건을 날 것 그대로, 정면에서 다뤘다. 당대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집약한 사건이지만 소설과 시, 그림 등 어떤 장르에서도 이것을 제대로 다룬 작품은 없었다. 그만큼 정권의 통제와 억압은 심했다. 조세희의 소설 마저 없었다면, 당대의 작가들은 쥐구멍에 숨어 눈치만 봤다는 조롱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신정권이 극악으로 치닫던 1978년 ,침묵을 강요당하던 많은 작가들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세상의 조롱을 피할 수 있었다.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이 동일방직사건을, 난쏘공은 광주 대단지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사진은 아무런 도시 기반시설도 없이  서울시가 제공한 천막과 판자로 집을 지은 1970년대 광주대단지 모습.  사진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난쏘공’은 1975년 발표한 단편 을 시작으로 1978년 발표한 까지 17편으로 완성됐다. 1971년 터진 ‘광주대단지 사건’을 소재로 했고, 광주의 상대원 공단이 소설의 주요 배경이었다.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1978년 6월 5일, 동일방직 똥물 투척 사건이 터지고 4개월 후였다. 김민기가 작업에 들어가기 3개월 전쯤이었다. 녹음 참여는 나를 포함해 메아리 멤버에게 대단히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저 막연히 노래의 역사성, 음악의 사회적 의미, 노랫말의 문학성과 메시지의 중요성 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던 우리에게 은 음악이 사회와 만나는 방식에 대한 사고의 스펙트럼을 극적으로 넓혀 주었다.” 이 작품에서 노래는 한순간의 짧은 서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노동조합 투쟁의 어떤 국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기도 하면서 기승전결의 완결된 서사를 구현하고 있었다.”(김창남) 지금이야 당연해 보이겠지만, 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파격이었다. 당시 클래식 음악계는 물론 민중문화 운동권조차 상상 못 한 노래굿(혹은 음악극)이었다. 음악극 하면 뮤지컬이나 오페라, 칸타타 등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우리의 전통 굿에는 소리(음악)와 몸짓(춤)과 이야기(연극)의 요소가 모두 어우러져 있다. 전통적 의미의 노래 즉 ‘소리’의 역할이 강화된 굿이라는 의미에서 김민기는 노래굿이라고 성격을 지었다. 서양 연극의 전통과 우리 굿의 전통을 결합한 것이다. 굿을 표현의 그릇으로 삼고, 서양음악을 언어로 삼았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거기에 전통 굿의 기능까지 더했다. 굿은 음악과 춤과 서사로써 망자의 한을 씻고, 엉킨 매듭을 풀어 안녕과 평안을 기원한다. 에선 망자의 자리에 짓밟혀 쓰러진 여성 노동자를 놓았을 뿐, 이들의 한과 설움을 씻어내고 응어리를 풀어, 그들이 다시 일어나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김민기가 굳이 ‘굿’을 강조한 이유였다. 물론 형식과 내용이 획기적이라거나 파격적이라고 해서 작품성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음악적 구조에서 완결성을 갖춰야 한다. 은 21개의 장면으로 구성돼 있고, 장면마다 하나의 노래가 등장한다. 노래는 장면의 내용에 따라 그 성격을 가장 잘 구현할 구전 가요, 흑인영가, 남도소리, 전자음악 등을 적절히 배치해 전체적으로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꾀했다. 예컨대 사건의 전개에 해당하는 ‘교대’ ‘사고’ ‘작업장’ 장면에선 단순하면서도 반복되는 전자음의 선율로 시작해 긴장감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성격을 예감케 한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프로그레시브 록을 활용해, 긴장감을 극적으로 고조시킨다. 그렇다고 각 노래가 노래굿이라는 전체를 위한 부분으로만 기능하는 것도 아니다. 각 노래(장면)는 전체적인 서사에 한 부분으로 복무해 한 편의 굿을 완성하면서도, 저마다 완결된 메시지와 음악적 구조를 갖춰 독립된 노래로서 예술성을 갖는다. 동요풍이면서도 언어 감각이 세련된 ‘공장의 불빛’, 일제 말부터 구전한 노래에서 핵심적인 멜로디(주제)를 빌려와 노동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야근’, 레치타티보(선율보다는 대사에 중점을 둔, 음악극을 여는 노래) 스타일을 이용해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과 사용자의 노조 설립 방해 공작을 드러내는 ‘음모’, 진양조의 서러운 감성으로 절망적 현실을 표현한 ‘두어라, 가자’,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이 세상 어딘가엔’ 등 각 장면의 노래는 모두 스스로 빛나는 하나의 노래였다. 이 노래들을 음악적 전통이나 양식 혹은 장르에 따라 묶어 편집한다면, 당대의 전혀 새로운 노래 교과서로도 손색이 없다. 흑인영가, 왈츠, 트위스트, 성가, 판소리, 남도소리, 구전 가요 등 다양한 노래 혹은 소리가 있고 풍물, 전자 악기부터 다양한 국악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전통의 악기와 소리가 노래를 얼마나 풍부하게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는지도 실증한다. 익숙한 구전 가요를 마치 회화의 오브제, 영화의 몽타주 수법처럼 활용하는, 작곡의 마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구전 가요에 내재한 대중적 음악성을 이렇게 적절히 활용한 일도 일찍이 없었다. 극적으로는 각 장면의 모두에 앞으로 전개될 사건의 내용을 암시하는 부분(복선)을 두었다. 시청자가 극의 흐름에 빠지지 않고, 사건의 성격을 따져보고 나름의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독일의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창시한 서사극의 ‘소격 효과(疏隔效果)’를 감정이입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노래의 장르에 적용한 것이다. 정재일이 2004년 리메이크한 노래굿 공장의 불빛 앨범 사진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을  재구성한 정재일(사진 왼쪽) 과 김민기가  공장의 불빛 리메이크 음반 발매 하루 뒤인 2004년 10월 16일 한 행사장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질문을 받고 있다. 2004.10.16  연합뉴스  김민기에게 전권을 받아 2004년 재구성한(리메이크) 정재일은 1978년 판 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민기 선생님의 노래는 소박하고 서정적인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처음 들었을 때 다듬어지지 않은 사나운 소리에 놀랐죠. 혼재된 스타일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작품이 그 시절에도 있었구나, 김민기라는 사람이 이런 작품도 했구나’.” 음악 외적 부분에서 카세트테이프라는 매체의 활용을 한 번 더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경이로운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대중음악을 전달하는 매체는 라디오나 엘피(LP)판이 전부였다. 막 태어난 카세트테이프는 싸고 이용하기 편하긴 했지만, 음악적으로는 수준이 낮은 저급한 매체로 외면당했다. 그러나 카세트테이프의 효용성은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각 가정에 보급된 레코더만 이용하면 언제 어디서 누구나 마음대로 녹음하고 복제해 유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공연 예술 특히 대중음악의 저승사자 구실을 했던 ‘공륜’을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었다. 비공식 시장에서 노래의 유통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사전심의를 회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전심의를 거부하고, 검열 제도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매체였다. 김민기는 이 ‘저급한’ 매체의 무한한 확장성을 이용해, 공식 시장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지하) 시장을 만들었으며, 공식 시장 진입의 벽을 이용해 무소불위 칼을 휘두르던 권력의 통제도 비웃어 버렸다. 김민기의 이후 민중가요가 폭발적으로 확산한 공신은 바로 카세트테이프였다. 운동권의 엄숙주의자들은 한때 비참한 한국 노동자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소시민적 발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어떤 노동자가 그 비싼 카세트 녹음기를 살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다. 당시 카세트테이프레코더의 가격이 비싸 노동자 개인이 소유하기 힘들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기숙 노동자들은 조나 반별 단위로 한 대 정도 갖고 있었다. 당시 청년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대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자취해도 여럿이 같이했다. 하루 12~14시간 일하는 이들은 여가를 즐길 시간도 돈도 없었다. 그렇다고 허구한 날 기계처럼 일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도 때로는 노래도 듣고 따라 부르며 춤도 추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들어야 하는 젊은이였다. 그런 이들이 쥐꼬리만 한 여가에 ‘문화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도구가 카세트테이프레코더였다. 물론 노동자가 혼자서 사기엔 버거웠다. 그러나 룸메이트가 십시일반 추렴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삼진통상 시절 김민기가 자주 봤던 게 그 레코더를 둘러싸고 앉아 있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엄숙주의 운동권의 이런 비판은 곧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오히려 이들은 카세트테이프레코더를 가장 애용하는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됐다. 초판 2천 개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그러나 성경 속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초판’ 테이프들은 재판, 3판, 4판으로 새끼에 새끼를 쳐 기하급수로 제작되고 유포됐다. 순전히 카세트테이프레코더 덕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카세트테이프를 운동 비용을 조달하거나, 구속된 이들의 지원 비용 마련에도 활용했다. ‘메아리’ 등 개별적인 단체가 제작한 카세트테이프도 그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포함된 노래굿 테이프도 그랬다. 1980년대 초 산재한 문화운동 패들의 역량을 결집할 목적으로 결성된 민족문화운동협의회는 특이하게도 상근자에게 활동비를 지급했는데, 이 경비는 대부분 민중가요 테이프를 제작하고 팔아 마련했다. 1980년대 민중가요가 폭발적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은 카세트테이프라는 ‘하위’ 미디어 덕이었고, 그것의 ‘민중성’을 간파한 김민기 덕이었다. 테이프 인트로에는 김민기가 설명하는 간단한 ‘테이프 활용법’이 있다. 그는 이미 새로운 매체로서 테이프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 테이프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가 제작한 노래굿 입니다. 뒷면의 반주 테이프를 틀어놓고 그것에 맞추어 몇 사람의 노동자들이 노래와 춤으로 재미있게 꾸밀 수 있을 것입니다.” , 그것은 내용과 형식 그리고 유통에서 당대의 혁명이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던 그것을 현실로 끌어내 목전의 저 강고한 철벽을 뛰어넘게 해준 디딤돌이었고, 장대였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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