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의 암호는 풀고 자신 향한 사슬은 못 푼 앨런 튜링 [사회혁신] 직함이 너무 많은 사람
앨런 매시슨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1954)을 소개하려면 직함부터 골라야 한다. 현대 전자계산기의 뿌리를 놓은 수학자, 인공지능이라는 물음을 정식으로 던진 사상가, 나치 독일의 암호를 푼 해독자다. 올림픽 출전을 꿈꿀 만큼 잘 달린 마라톤 애호가이기도 했다. 명함 한 장으로는 모자란다. 게다가 영국정부가 마지막에 붙여 준 직함은 유죄판결을 받은 자 였다. 이력서에 적기 난감한 항목이다.
기행도 볼만했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해 방독면을 쓰고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 사슬이 잘 빠지자 고치는 대신 페달 돌린 횟수를 세어 빠지기 직전에 내려서 손 봤다. 전쟁 중에는 나라에 돈이 없어질까 걱정해 은덩이 두 개를 숲에 묻었다가 끝내 찾지 못했다. 나치의 암호는 푼 사람이 제 은덩이는 못 푼 셈이다.
1951년의 튜링(위키피디아)
1936년, 셈으로 셈의 한계를 재다
당시 수학계의 큰 화두는 1928년 독일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가 던진 결정 문제 였다. 어떤 수학 명제든 정해진 절차만 따르면 참인지 거짓인지 가려낼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튜링은 1936년 논문에서 가상의 기계를 그려 이 물음에 답했다. 종이띠에 기호를 읽고 쓰는 단순한 장치인데, 규칙만 바꿔 넣으면 어떤 계산이든 해낸다. 그리고 이 기계로도 풀 수 없는 문제가 있음을 증명했다. 미국의 알론조 처치(Alonzo Church, 1903~1995)도 비슷한 시기에 다른 방법으로 같은 결론에 이르렀고, 튜링은 이듬해 그가 있던 프린스턴 대학교로 건너가 193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늘날 모든 계산기계의 밑그림이 바로 이 튜링 기계 다. 쓸모없어 보이는 문제를 붙들고 늘어진 젊은이가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기계의 원리를 내놓았으니, 기초학문을 두고 그걸 어디에 쓰느냐 고 묻는 이들이 새겨들을 일이다.
16세 무렵의 튜링(1928년 아니면 이듬해)(위키피디아)
1939~1945년, 암호를 풀어 전쟁 종식 앞당겨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튜링은 영국정부 암호학교가 있던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로 불려갔다. 상대는 독일의 암호기 에니그마 였다. 길을 먼저 낸 이들은 폴란드 수학자 마리안 레예프스키(Marian Rejewski, 1905~1980), 예지 로지츠키(Jerzy Różycki, 1909~1942), 헨리크 지갈스키(Henryk Zygalski, 1908~1978)다. 이들이 1939년에 해독기술을 영국에 넘겼다. 튜링은 이를 발판 삼아 암호 조합을 기계로 걸러내는 장치를 개량했고, 동료 고든 웰치먼(Gordon Welchman, 1906~1985)과 함께 그 장치를 공장처럼 돌렸다. 특히 대서양에서 영국 수송선을 노리던 독일 잠수함의 암호를 푸는 일을 이끌었다. 일부 역사가는 이 성과가 전쟁을 2~3년 앞당겨 끝낼 수 있는 발판이 됐다고 봤다.
정작 이 공은 오래 묻혔다. 해독 사실은 1974년 프레더릭 윈터보텀(Frederick Winterbotham, 1897~1990)의 책이 나오고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튜링은 이미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다. 나라를 구하고도 자랑 한마디 못 하고 입을 다문 채 살았다.
1930년대의 튜링(위키피디아)
1950년, 기계에게 사람 흉내를 시키다
전쟁이 끝나고 튜링은 계산기계 설계에 매달렸고, 1950년 논문 「계산하는 기계와 지능」에서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꺼냈다. 그는 답하기 어려운 이 물음을 모방 게임 으로 바꿨다. 판정자가 글로만 대화해 보고 상대가 사람인지 기계인지 가리지 못하면, 그 기계를 생각한다고 봐도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흔히 튜링 시험 이라 부른다.
한국사회도 이 물음을 피부로 겪었다. 2016년 3월 이세돌(1983~)이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와 맞붙어 1승 4패를 기록했을 때, 온 나라가 기계의 생각 을 두고 밤새 토론했다. 지금은 사람보다 글을 잘 쓰는 기계와 진짜 같은 조작 영상 앞에서 튜링의 물음이 거꾸로 돌아왔다. 기계가 사람 흉내를 내는 것보다 무엇이 진짜인지 가려내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도 실은 튜링의 생각을 본뜬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스티븐 케틀이 제작하고 시드니 프랭크가 의뢰하여 블레츨리 파크에 세워진, 에니그마 기계를 들고 있는 튜링 동상은 50만 개의 웨일스산 슬레이트 조각으로 만들어졌다.(위키피디아)
1952년, 국가가 건넨 감사장은 유죄 판결
튜링은 동성을 사랑했다. 당시 영국 법은 이를 범죄로 다뤘다. 1885년 법에 이른바 라부셰르 조항 이 끼어들었는데, 헨리 라부셰르(Henry Labouchere, 1831~1912)가 의원 시절 밀어 넣은 조항이다. 이 조항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를 1895년에 감옥으로 보낸 바로 그 법이다. 라부셰르가 세상을 뜬 1912년에 튜링이 태어났으니, 악법은 저승사자보다 오래 살아남은 셈이다.
튜링은 1952년 유죄 판결을 받았다. 감옥 대신 호르몬 주사를 택했고, 이는 사실상 화학적 거세였다. 1951년 영국 외무부 관리 가이 버지스(Guy Burgess, 1911~1963)와 도널드 매클린(Donald Maclean, 1913~1983)이 소련으로 넘어간 뒤라, 정보기관은 동성애자를 곧 보안 위험 인물로 보았다. 전쟁 중 최고기밀을 다루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감시대상이 된 것이다. 튜링은 1954년 6월, 마흔한 살에 숨졌다. 검시관은 청산가리 중독에 의한 자살로 판정했으나, 어머니 에델 세라 튜링(Ethel Sara Turing, 1881~1976)은 끝까지 사고사를 주장했다.
영국정부의 사과는 한 참 늦었다. 2009년 총리 고든 브라운(Gordon Brown, 1951~ )이 공식 사과했고, 2013년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1926~2022)가 사면했으며, 2017년에는 같은 법으로 유죄를 받은 이들을 사후 사면하는 이른바 튜링 법 이 시행됐다. 2021년에는 50파운드 지폐에 그의 얼굴이 실렸다. 사과까지 55년, 복권까지 반세기를 넘겼고, 지폐에 얼굴을 올리기까지는 67년이 걸렸다.
현재 블레츨리 파크의 국립 컴퓨팅 박물관에 있는, 실제로 작동하는 봄브(Bombe) 복제품(위키피디아)
한국에서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첫째, 재능을 사람 됨됨이가 아닌 딱지로 재는 나라는 손해를 본다. 한국은 차별금지법 제정이 오랫동안 미뤄져 왔고, 군형법의 추행 조항은 그동안 여러 차례 합헌으로 유지돼 왔다. 12·3 계엄 이후 차가운 광장을 채운 이들 가운데는 온갖 깃발과 응원봉을 든 다양한 시민들이 있었다. 나라를 지켜 낸 이들에게 나라가 화답할 차례다. 튜링을 내친 결과가 어땠는지는 영국이 이미 보여 주었다.
둘째, 기록과 진실의 문제다. 영국은 공로를 30년 넘게 봉인했고 한국은 반대로 기록을 없앨까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다. 계엄관련 문건폐기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게다가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도 사과와 보상이 생전에 닿지 못하는 일은 한국에서도 흔하다. 영국의 55년을 비웃을 처지가 결코 아니다.
셋째, 셈을 아는 사회가 필요하다. 의대로만 쏠리는 인재, 기초수학과 과학에 대한 홀대를 그대로 두고 인공지능 강국을 외칠 수는 없다. 게다가 계엄의 명분으로 내세운 부정선거 주장은 증명 없이 숫자를 들먹이는 셈법이었다. 튜링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증명부터 하라 고 했을 것이다.
튜링은 기계에게 사람 흉내를 시험했지만, 정작 시험대에 오른 것은 사회의 사람다움이었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영국은 낙제했다. 한국은 아직 답안지를 쓰는 중이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튜링이 살다 세상을 떠난 윌름슬로 애들링턴 로드 43번지 주택에 부착된 파란색 명판(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