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명분으로 자식 죽게 하면, 의열인가 패륜인가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럴 때 사적인 관계를 기준으로 해야 하나, 공적 기준을 적용해야 하나 고민하게 되는데요. 그 가장 극적인 예를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서 찾아 보고자 합니다. 세자가 왕인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했다는 엽기적 사건은,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요. 따라서 이 사건은 한국 역사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소재 중 하나였습니다.
대체로 사도세자를 광증에 걸린 비운의 세자 또는 당쟁의 희생양으로 조금씩 다르게 묘사하고 있어요. 거기에서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이 생모였다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그런데 영빈이 세상을 떠나자, 후궁의 신분이었음에도 영조는 파격적으로 직접 나서 장례를 주도했어요. 세손에게도 최고의 예를 표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영조는 왜 이렇게까지 우대를 했고 ‘의열’이라고까지 칭송을 했던 것일까요?
출신의 약점 메우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한 영조
영조는 1694년에 숙종의 아들로 태어나, 1699년에 연잉군(延礽君)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모는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였어요. 그녀는 인현왕후 민씨가 출궁을 당한 후에, 열심히 기원하는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복귀했던 인현왕후가 죽자, 장희빈이 저주를 했다고 고발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후궁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궁궐에서 쫓겨나 사가에서 지내다가 1718년 죽었습니다.
영조는 31세인 1724년에 즉위하여 조선 왕조에서 가장 긴 52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1776년에 83세로 사망했어요. 그는 자신의 약점을 메우기 위해, 신하들보다 학문을 더 열심히 닦았고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당쟁의 폐단을 막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고 군포를 반으로 줄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준 균역법을 제정했어요. 잔혹한 고문을 금지하고 서얼의 서용을 가능케 하였으며 신문고를 부활시켜 완벽한 유교적 성인 군주 를 지향했습니다.
영조의 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에게는 연잉군 시절에 가례를 맺은 정성왕후 서씨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조선왕조 역사에서 가장 오랜 33년 동안 중전의 자리에 있었지만, 영조에게 철저히 외면당했고 자식도 낳지 못했어요. 1719년 숙종 45년에 정빈 이씨가 아들을 낳았고 영조가 즉위한 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28년 9살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효장세자인데, 나중에 정조는 그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 후에 그를 진종으로 추존하게 되지요.
손자 정조가 ‘여자 중의 군자’로 평한 영빈 이씨
6살에 궁녀로 입궁했던 영빈 이씨는 숙종의 세 번째 왕비였던 인원왕후의 상궁이었다가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전의 지밀상궁으로 추천되었어요. 그러다가 영조가 사대부의 여자로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선발하기보다 차라리 궁중의 후덕한 사람을 취하는 편이 낫다”며 서른 살에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숙의에 임명되었다가 귀인을 거쳐 4년 만에 최고의 자리인 빈에 올랐어요. 그는 연달아 1남 6녀를 낳았습니다.
드디어 마흔 살이 되던 1735년 영조 11년에 아들을 낳았고, 7년 동안 아들이 없던 영조는 곧바로 그를 왕세자로 책봉했습니다. 하지만 궁궐의 법도에 따라 세자는 바로 정성왕후의 아들로 입적되었어요. 1757년에 정성왕후가 죽었지만, 그 자리를 이을 수도 없었습니다. 장희빈 사태를 겪었던 숙종이 유언으로, 후궁을 중전으로 승격시키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1759년에 15살의 정순왕후가 66세 영조의 왕비로 책봉되었지요.
비록 세자를 낳았지만, 실제로는 품에서 키워 보지 못했던 영빈은 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가장 의지하고 따르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대비 인원왕후는 물론, 왕비 정성왕후를 정성껏 모시면서 며느리에게 왕실의 법도에 적응하도록 이끌었다고 혜경궁은 회고합니다. 영조에게도 때로 직언을 아끼지 않았고, 언제나 사리가 분명했던 할머니 영빈에 대해 정조가 ‘여자 중의 군자’라고 평가했을 정도였어요.
광증이 극에 달한 자식 버리고 왕과 손자 구한 결단
그런데 사도세자가 아버지의 기대에 못미치다 보니 그로 인해 마음의 병이 생겼습니다.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전하는 내용만 보더라도 끔찍하지요. 무려 백여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특히 옷을 입으면 화가 밀려오는 의대증이라는 증세로, 궁녀와 내시는 물론 아들까지 낳았던 첩 빙애마저 1761년 1월 구타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어요. 심지어 죽은 내시의 목을 잘라 혜경궁에게 보여 주었답니다.
더구나 영조의 허락도 없이 평양을 다녀온다던가, 심지어 칼을 들고 경희궁에 머물던 영조에게 가려고 하는 상태에 이르렀어요. 이것은 분명 역모였습니다. 그로 인해 세자가 죽음을 당하게 되면, 세손이었던 정조의 왕위계승도 절대로 가능하지 않았어요. 영빈이 선택한 것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세자를 버리고 손자라도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울러 살인마 세자가 왕이 되어서는 나라 꼴이 완전히 말이 아닐테니까요.
결국 그녀가 택한 것은 영조를 찾아가 사도세자의 대처분(大處分)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서의 개인적인 아픔보다 영조의 입장과 정조의 미래를 선택한 결단이었어요. 며느리 혜경궁도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남편을 버리고 아들의 미래를 선택했습니다. 결국 영조는 폐세자 시킨 뒤에, 뒤주를 가져다가 가두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임오화변’을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 궁궐에서 내보낸 세손 모자를 입궁시켰어요.
영빈 이씨의 죽음을 최고의 예우로 기린 영조
그런데 세손은 사도세자가 아닌, 이미 죽은 효장세자의 대를 잇는 것으로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아무래도 폐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정통성 시비를 당하지 않게 하려는 영조의 배려이기도 했어요. 비록 대의를 위한 결단이었지만, 영빈은 내가 차마 자식에게 못할 짓을 했으니,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고통스러워 했다고 하는데요. 결국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나자마자, 1764년 영조 40년에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조는 영빈이 후궁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서서 장례를 주관하였고, 무덤을 한성에서 가까운 연희궁 터로 정하면서 의열묘(義烈墓)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친히 관 위에 ‘守義保社(대의를 지켜 사직을 보존하다)’라고 썼고, 묘표(墓表)와 묘지(墓誌)도 영조가 직접 쓴 것이 남아 있어요. 그리고 현재 국립서울농학교 자리에 사당을 짓고, 시호인 의열을 따라 의열궁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조 어필 의열표 현판
이어서 『표의록(表義錄)』을 직접 쓰고 간행하여 ‘사사로운 연을 끊고 나라를 위하였던 영빈 이씨의 의열을 만세에 전하도록’ 했습니다. 영조는 ‘영빈 덕분에 사도세자가 복권되고 혜빈과 세손이 그들의 지위를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했어요. 따라서 이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세손으로 하여금, 의리를 내세워 영빈의 장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일의 정당성을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수경원이 된 경위와 바로 잡아야 할 현재의 모습
사실상 영빈 덕분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명예회복을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나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했음에도, 끝내 사도세자를 추증하지는 못했어요. 사도세자가 병이 있어 비행을 저지른 것은 맞으나 동시에 모함하는 무리들이 있었고 이 때문에 관계가 더 악화되었다.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했다 는 식으로 수정만 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할아버지 영조가 영빈의 무덤과 사당에 의열이라는 명칭을 쓴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지요. 그래서 사당의 이름을 선희궁(宣禧宮)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다가 고종이 1899년에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고 종묘로 부묘하면서, 황제의 어머니 자격으로 수경원(綏慶園)이 되었지요. 그런데 1970년에 수경원은 서오릉 경내로 이장되었고,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1974년에 루스채플이 들어서 연세대학교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에 남아있는 수경원 정자각
하지만 정자각과 비각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요. 대학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장할 당시 지금의 국가유산청인 문화재관리국이 연세대에 매각했다는 문서가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국가문화유산을 이렇게 처분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지금 서오릉에 있는 수경원에는 정자각도 비각도 없는 초라한 모습입니다. 비록 분명한 소유권이 있더라도, 정자각과 비각을 제 자리로 돌려주는 아량을 베풀면 좋겠네요.
영빈 이씨가 묻힌 수경원.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소재
민주시민의 선택은 사적 의리 아닌 공적 기준이어야
영조가 자신의 출생 콤플렉스로 인하여 너무 지나친 완벽주의자였고 그로 말미암아 사도세자를 정신병에 이르게 한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영조까지 해치려 했던 그를 죄가 없다고 할 수도 없지요. 그가 만약에 왕이 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영빈의 대처분 요청을 ‘아들을 고발한 비정한 어미’로 비난하기보다 공적인 결단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지요.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아무래도 혈연과 지연, 성별과 학연 등 사적인 인연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하지만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는 공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자세입니다. 지난 12.3 내란을 막을 수 있었던 것도 공적인 차원에서 가담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앞으로 우리의 정치적 선택은 한국 민주주의를 한층 굳게 다진다는 공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왕조 시절에는 왕으로서의 자질이 없어도, 왕위계승의 순위는 국왕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정해야 했습니다. 그의 능력과 자질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영빈의 선택은 현명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습니다.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은 국민의 공적인 판단에 달려 있어요. 권력자가 사적으로 물려 줄 수 있는 것도, 특정세력이 옹립한다고 해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바랄게요.
주진오 한국현재사 formchu@hanmail.net